제518화
한편, 마차를 타고 태자부를 나온 엽연채와 주운환은 곧장 진서후부로 향했다.
엽연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주운환을 쳐다보았다.
“거긴 왜 온 거예요?”
“오늘 당신과 사람들이 꽃놀이 연회에 온다니까 태자 전하도 아주 기뻐하시더군요.”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검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주묘서가 갑자기 무슨 꽃놀이 연회를 열겠다는데, 당연히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태자는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는 꽃놀이 연회에 엽연채가 참석할 줄 알고 퇴청할 때 자신에게 다가와 태자부로 부인을 데리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자신은 물론 그 말에 응했다.
“태자 전하가 절 부르지 않았더라도 원래 데리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엽연채는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굴리더니 조그만 입을 삐죽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재미난 구경을 하려고 온 거죠? 주묘서는 과시하기 위해서 꽃놀이 연회를 연 건데 전 당연히 걔가 절 억누르게 놔두지 않을 테니 싸움을 피할 수 없는 걸 알고요.”
그러자 주운환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녀에게 다가가며 대꾸했다.
“구경하려고 간 게 아닙니다. 그저 부인을 찾으러 가고 싶었던 것뿐.”
그리 말하며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엽연채는 ‘아’ 하더니 조그만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손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자 주운환은 크게 웃었고 그녀를 안아 들어 무릎에 앉히더니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적거리며 자꾸만 이름을 불렀다.
“연채, 우리 연채…….”
“왜 불러요?”
엽연채는 자그마한 얼굴이 한층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귀 좀 봅시다.”
“싫어요.”
그녀는 귀를 가린 손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주운환은 더욱 엽연채를 간지럽히며 이리저리 비비적거렸다.
한편, 경인은 밖에서 즐겁게 마차를 몰고 있었는데 그 옆에 앉아 있는 추길은 안에서 들리는 큰 웃음소리와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벼운 웃음소리를 듣더니 속에서 짜증이 치밀었다.
‘여긴 큰길인데 좀 반듯하게 있을 수는 없나?’
추길은 평소 주운환이 매일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엽연채가 가장 먼저 달려 나가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의 품 안에 안기며 달라붙으려 하는 모습이 또 떠올랐다. 지난번 온씨가 했던 당부는 전부 잊어버린 모양이다.
“추길아, 너 왜 말이 없니?”
사정을 모르는 경인은 헤헤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저 이렇게 대답했다.
“배고프다. 방금 전에 꽃놀이 연회에 갔을 때 아무것도 못 먹었어.”
“하하, 그럼 돌아가서 먹어. 거의 도착했어!”
경인이 그리 말하며 말고삐를 살짝 당기자 말은 곧바로 모퉁이를 돌았다.
잠시 후, 사자가 누워 있는 듯한 모습의 커다란 진서후부가 보였고 마차는 진서후부로 들어가더니 수화문에서 멈춰 섰다.
추길은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얼른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작은 걸상을 마차 아래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운환이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고개를 돌려 손을 안쪽으로 뻗었다.
엽연채가 자신의 보드라운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리자 그는 손을 꼭 쥐나 싶더니 다시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엽연채의 허리를 잡더니 그녀를 안아서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걸상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추길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또다시 마음이 우울해졌다. 하지만 옥패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급할 게 뭐가 있는가.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자신에게도 활로가 생길 테니 말이다.
아직 엽연채가 회임하지 않았으니 자신 역시 유난스러운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안 그러면 오랫동안 쌓아 온 주인과 하인 간의 정리에 금이 갈 터였다.
경인이 말을 세우러 가는데 뜻밖에도 뒤에서 대추색 준마 한 마리가 그를 따라갔다. 털에서 광택이 나고 늠름해 보이는 말이었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어? 부군 말 아니에요?”
주운환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퇴청할 때 저 녀석을 타고 태자부에 갔습니다. 지금 집으로 돌아올 땐 당신과 마차를 타고 왔으니 녀석에게 우리 뒤를 따라오라고 시킨 겁니다.”
엽연채는 놀라워했다.
“정말 똑똑한 아이네요.”
“그래서 내 군마로 삼았지요.”
주운환은 앞으로 다가가 녀석의 털을 만지며 엽연채에게 물었다.
“타 보겠습니까?”
“네.”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며칠 뒤에 시간이 나면 그렇게 해요. 밖으로 나가서 태워 주겠습니다.”
주운환은 웃는 낯으로 그리 말하고는 말의 몸에 묶여 있는 몸체가 전부 새카맣고 위에 연꽃 문양이 들어간 활을 풀었다.
엽연채는 당장 말을 탈 수 없게 되자 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운환의 손에 들린 근사한 활을 보더니 아주 부럽다는 투로 말했다.
“나도 한번 쏴 볼래요!”
“그러세요.”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활을 그녀의 품에 안겨 주었다.
“잘 들어야 합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손을 놓았고 엽연채는 순간 휘청거렸다. 활이 이렇게 무거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으…….”
엽연채는 작게 소리를 내며 몸을 두어 번 휘청거렸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주운환이 다시 팔을 뻗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고는 나지막이 웃음을 지었다.
“갑시다. 활 쏘는 법을 가르쳐 줄테니.”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활을 드는 걸 도와줬다. 주운환은 방금 전 그녀가 활에 눌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던 애처롭고도 귀여운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함께 서과원의 무도장武道場으로 걸어갔다. 이 널찍한 공터는 주운환이 무술 연습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곳이었고 앞쪽엔 과녁이 여러 개 있었다.
엽연채는 활시위조차 당기지 못했기에 주운환이 뒤에 서서 그녀를 품 안에 감싸고는 도와줬다. 처음으로 활을 쏴 보는 엽연채는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부부는 노느라 신이 났는데 안타깝게도 엽연채는 이쪽으로는 별로 재능이 없어 정확히 맞히지를 못했다. 하지만 엽연채는 여전히 신기해하며 즐겼고 이튿날에 또 해 보겠다는 의욕까지 보였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반 시진 동안 놀고 나서야 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 주운환은 들고 있던 활을 여양에게 건네고는 엽연채의 손을 맞잡았다.
“이따가 작은 걸 하나 만들어 주겠습니다. 그럼 혼자서도 활시위를 당길 수 있을 겁니다.”
“좋아요.”
자신의 활을 갖게 된다는 생각에 엽연채는 흥미가 더욱 고조됐다.
점심 식사를 한 뒤 주운환은 하인을 시켜 재료를 가져오게 했고 엽연채를 위한 조그만 활을 만들기 시작했다. 엽연채는 옆에서 그가 활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 * *
평온한 진서후부에 비해 태자부 쪽은 아주 시끌벅적했다.
주묘서가 태자에게 뺨을 맞은 후 태자부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그녀가 태자부로 들어온 후로 태자부의 여인들에게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주묘서가 하루가 다르게 거물이 되어 가는 주운환을 등에 업고 있으니 누가 감히 그녀를 건드리겠는가? 그녀는 태자부에서 얼마든지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커다란 배경과 대단한 뒷배를 그녀가 스스로 차 버릴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이고, 우스워 죽겠네.”
태자비는 탁자에 엎드려 웃어댔다.
“꽃놀이 연회에 가지 않은 게 정말 후회되는구나. 손찌검을 당했으니… 쯧쯧, 아주 볼만했을 텐데!”
검은 빛깔의 옷을 입은 하좌의 시녀도 웃음소리를 냈고 석 마마는 이렇게 말했다.
“들어 보니 예를 올리라고 진서후 부인을 몰아붙였다고 합니다. 진서후 부인이 주 측비보다 자신의 품계가 높다고 맞서니 주 측비는 태자 전하를 불렀다더군요. 눈물 바람으로 호소해 전하께서 진서후 부인을 혼쭐내시길 바랐는데 결과는 뺨을 맞은 거죠.”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몸이 옆으로 돌아가더니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검은 옷의 시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보탰다.
“쯧쯧, 가자. 어서 가서 주 측비에게 약을 건네자꾸나.”
석 마마 등을 데리고 문을 나선 태자비는 일부러 백여언과 태자부의 서비庶妃 네 명도 불러 함께 묘언헌으로 향했다.
주묘서는 여전히 진씨와 함께 울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 있던 시녀가 갑작스레 태자비 등이 왔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주묘서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대응책을 준비하기도 전에 태자비 등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 측비, 들어 보니 태자 전하께 뺨을 맞았다고 하던데. 그래서 내 특별히 약을 가져왔네.”
태자비는 환하게 웃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탑상에 앉아 있는 주묘서는 평범하면서도 엄숙해 보이는 태자비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모습을 보자 더없이 혐오감이 느껴지고 부아가 치밀었다. 태자비가 입을 열자마자 태자에게 뺨을 맞았다는 소리를 하는 건 자신의 뺨을 한 대 더 갈기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
주묘서는 화가 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유, 예는 올리지 않아도 되네.”
태자비는 본디 규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건만 오늘은 일부러 아량을 베푸는 척했다.
“난 올케가 왔는데도 예를 올리라고 하는 주 측비와는 다르네. 주 측비는 지금 상처를 입었으니 그곳에 앉아 푹 쉬게.”
그 말에 주묘서는 머릿속에서 쾅 하고 굉음이 울리더니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때, 백여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오더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보게, 동생. 태자 전하께서 왜 동생에게 손찌검을 하신 건가? 무슨 오해라도 있는 거 아닌가? 우린 다 형님 동생 사이이니 돌아가면 꼭 주 측비를 위해 부탁을 해 보겠네. 그러니 말해 보게나. 우리도 도와줄 테니.”
“그, 그건…….”
주묘서의 작다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백여언은 몰락한 집안의 여식에 불과했다. 태자 전하와 살을 맞댄 일 때문에 운 좋게 태자부로 들어올 수 있었으면서 지금 감히 자신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굴다니!
“측비 마마, 주 측비 마마는 저희 셋째 마님과 그저 말다툼을 좀 하신 것뿐입니다. 별일 아닙니다.”
정 마마가 얼른 몸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무슨 말다툼을 했다는 것이냐?”
태자비 등은 그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모습으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정 마마의 낯이 벌게졌다 파래지길 반복했으나 감히 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말을 많이 해 봐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지 않은가.
주묘서는 더더욱 화가 나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