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17화 (517/858)

제517화

엽영교는 진씨 모녀를 보며 풉 하고 냉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운환이에게 기대 몸값을 올려 태자부로 시집온 거면서, 연채 부부에게 아첨을 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연채의 무릎을 꿇리려고 했다니. 머리에 똥만 차 있나 봐요? 하하, 정말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네요.”

“꽃놀이 연회를 못 열 것 같은데 우린 이만 가 보자꾸나.”

진 부인은 그리 말하며 엽영교를 부축했고 엽미채와 제민도 얼른 그들을 따라 함께 이곳을 떠났다.

장만만, 포모, 오설매는 사람들 뒤에 서 있었는데 주묘서가 뺨을 맞는 모습을 보더니 순간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며 마음속에 쌓여 있던 울분이 마침내 사그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장만만은 작게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쯧쯧. 창피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우리를 이곳으로 초대한 건가 봐요. 정말 초대해 줘서 너무 고맙네요.”

포모도 눈웃음을 치며 동조했다.

“정말 목숨 걸고 재미난 구경거리가 되어 주네요.”

“하하하. 오늘 구경은 정말로 최고였어요. 전에 회방루에서 봤던 연극보다 훨씬 재미있네요. 자, 우리도 어서 가죠.”

오설매의 이 말에 그들도 밖으로 나갔다.

반면, 근처에 있던 엽이채와 포기는 꼴사나운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는 주묘서를 쳐다보며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또 이런 결과라니…….’

엽연채는 모욕을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체면을 세웠고 측비인 주묘서조차 이 일로 뺨을 맞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고 도저히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어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태자가 경려원을 떠나자 이계가 얼른 앞으로 나와 그에게 아뢰었다.

“전하, 진서후 부부는 이미 떠났습니다.”

그러자 태자의 품위 있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계는 방금 전 일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주묘서를 수백 번 넘게 욕했다. 그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더니 태자에게 물었다.

“진서후를… 쫓아가야 할까요?”

태자는 착 가라앉은 차가운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됐다.”

오늘 일로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다. 그런데 지금 주운환을 쫓아가기까지 한다면 자신이 주운환을 너무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주운환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신하에 불과했다. 주운환에게 예의를 갖추고 중요하게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지나치게 간절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이다.

태자는 방금 전 주운환이 준미한 얼굴로 차가운 표정을 짓고는 엽연채와 함께 자리를 떠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상황을 곱씹어 보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속이 편치 않았다.

엽연채 같은 미인은 지금 봐도 마음이 간질간질한데 주운환과 엽연채가 그런 다정한 모습을 보이니 좀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가자. 묘언헌으로 갈 것이다.”

말을 마친 태자는 발걸음을 돌려 청석판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한편, 주묘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자에게 뺨을 냅다 얻어맞은 후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거기다 엽영교는 대놓고 저를 비웃기까지 했다.

오늘 부른 그 많은 손님들은 원래 자신이 잘나가는 모습을 보려고 이곳에 온 건데 지금 도리어 자신이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주묘서는 부끄럽고 분해서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어댔다. 무슨 낯짝으로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서야…….”

진씨는 창백한 얼굴로 걸어오더니 주묘서를 부축해 일으켰다.

“내 새끼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태자의 손찌검에 진씨도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도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 재수 없는 곳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묘서는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진씨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녹지와 춘산 등도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감싸 줬다. 그들은 그제야 기가 죽은 모습으로 경려원을 떠났다.

모녀는 방금 막 묘언헌으로 돌아와 장미 문양이 들어간 자단나무로 장식되고 나전을 상감한 탑상 위에 앉았다. 주묘서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데 밖에 있던 시녀가 갑자기 소리를 쳤다.

“태자 전하 납시오!”

주묘서와 진씨는 낯빛이 확 변했다. 이들이 일어서기도 전에 태자가 이미 뒷짐을 지고 어두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주묘서는 두려움에 낯빛이 하얗게 질렸고 억울하면서도 가련한 모습으로 눈물을 왈칵 쏟으며 말했다.

“전하. 전…….”

태자는 그녀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자 거부감이 들며 더욱 화가 났고 냉랭한 목소리로 이렇게 나무랐다.

“혼인 전에 규율을 배우지 않은 것이냐?”

주묘서는 몸을 덜덜 떨며 말을 더듬었다.

“전하. 전, 전…….”

분명히 다 배웠다. 하지만 너무 많아서 다 기억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규율은 깨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차를 올릴 때 태자비와 금슬을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태자는 표정이 더욱 싸늘해지더니 이렇게 말을 이어 갔다.

“태자 측비가 이렇게 규율도 모르고 교양도 없으니 우리 황실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사람들은 네 올케이고 오라버니다. 그런데 감히 그렇게 행동하다니, 넌 네 오라비가 아니었다면 태자부에 시집오지 못했을 거라는 걸 몰랐단 말이냐! 이 일을 아바마마께 보고해 널 남겨 둘지 말지 결정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소매를 홱 뿌리치며 가 버렸다.

주묘서와 진씨는 머릿속에서 쾅 하고 굉음이 울렸고 맥이 풀려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주묘서가 불현듯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두 손으로 제 어깨를 꽉 감싸 안았다.

“아아악! 이, 이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전하! 전하! 아니야! 그럴 리가!”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벌떡 일어서더니 그를 쫓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정 마마와 녹지가 얼른 그녀를 제지하며 끌어당겼다.

“측비 마마… 전하께서는 이미 나가셨습니다. 일단 저희끼리 상의를 하시지요. 마마께서는 이미 태자부로 들어오셨으니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으아아악!”

주묘서는 여전히 펑펑 울었고 고통스럽고 괴로우면서 동시에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방금 전 태자의 말과 손찌검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주운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태자는 자신을 측비로 들이지 않았을 거란 뜻이었다.

이는 그야말로 자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즉 한 여인의 존엄과 관련된 문제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야? 분명 전하는 나를 좋아한다고, 나를 사랑한다고 하셨어. 거기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맺어 주신 혼사인데…….’

주묘서는 태자가 자신을 매우 총애하니 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런 내막이 있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아니다. 사실은 진작부터 생각했어야 할 부분이었다.

전부터 그들은 장원 급제한 주운환의 세를 이용해 좋은 곳에 시집갈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주운환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주씨 가문의 위상도 높아지며 주씨 가문 소저들의 몸값도 오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째서 태자는 과거엔 주묘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걸까? 왜 이제 와서야 그녀가 마음에 든 걸까? 이 모든 일이 주운환 때문이란 게 더없이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실지로 주묘서도 속으로는 모두 알면서도 안간힘을 다해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녀는 여태 자신은 지위 높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에게 지극히 사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존귀한 태자가 그녀를 애지중지하고 너무 총애해서 설사 그녀가 나쁜 짓을 하고 법을 어겨도 그녀를 보호하려고 하고 뒤치다꺼리를 해 주는 그런 한없는 사랑 말이다.

주묘서는 자신의 인생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높은 곳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니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삶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태자부에 들어와서도 태자는 여전히 자신을 총애했다. 초야를 치르고 이튿날 태자비에게 차를 올릴 때도 이쪽이 태자비를 업신여기는 데 도움까지 주었다.

그에 주묘서는 흡족한 기분이 들었고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호되게 손찌검을 당해 정신이 번쩍 들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진씨와 주묘서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주운환이 없다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현실을 말이다.

“어, 어머니, 저 이제 어떡해요?”

주묘서는 조그만 얼굴이 백지장이 된 채로 몸을 덜덜 떨며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태자 전하께서… 절 폐위할까요? 흑……. 전 황실 사람이에요, 전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태자 측비란…….”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전에는 태자 측비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엽연채가 그 화려한 껍질을 싹 벗겨 버렸다.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해도 그저 첩실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정2품에 불과했다.

“흑, 흑흑…….”

그런 생각을 하자 주묘서는 억울하면서도 원망스러워 목놓아 울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전하께서는 그러지 않으실 거다.”

진씨도 속으로는 놀랍고 두려웠으나 얼른 그녀를 위로했다.

“전하께서 정말로 널 폐위하려고 하셨다면 곧장 궁으로 들어가셨을 거다. 지금 이렇게 일부러 널 찾아와 말하지는 않으셨을 게다. 전하는 그저 네게 깨달음을 주려고 겁을 주신 것뿐이다.”

“맞습니다.”

정 마마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태자부로 들인 이상 쉽게 폐위하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정 마마는 조금 떨떠름한 눈빛을 보였지만 그래도 뒷말을 꺼냈다.

“태자 전하는 여전히 셋째 나리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십니다. 셋째 나리와 친척 관계로 지내고 싶어 하시죠. 그런데 마마를 폐위하게 되면 이 관계가 굳건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주묘서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았고 흥분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주묘화도 있지 않은가! 전하께서 날 폐위하고도… 그 서자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면 주묘화를 측비로 들일 거네……. 아아, 그리되면 난 어떡하지?”

정말로 그리된다면 사람들은 저를 실컷 비웃을 것이다. 태자부로 시집을 갔지만 다시 반품되어 폐위되는 것이다. 거기다 비천한 서녀 동생이 자신의 자리에 대신 앉아 측비가 되는 꼴도 지켜봐야 할 터였다.

주묘서는 그런 상황은 죽어도 원치 않았다. 절대로 원치 않고 전혀 달갑지 않았다.

진씨와 정 마마 등은 주묘화도 있다는 말에 낯빛이 또 한 번 변했다. 진씨도 이 가능성을 생각해 보더니 감정이 격양돼 온몸을 바들댔다.

“최대한 빨리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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