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6화
주위에 있던 규수들은 얼떨떨해서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엽미채는 이미 엽연채 곁으로 다가와 있었는데, 자신감이 넘치는 주묘서의 얼굴을 보자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엽연채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맞은편에 서 있던 엽이채와 포기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더니 이어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하마터면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반격할 뻔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태자가 주묘서를 아주 총애하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주묘서가 이리 자신만만해할 리 없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주묘서가 아무리 첩실이라고 해도 황실의 족보에 올랐으니 평범한 첩실들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전 엽연채는 이치를 따져 가며 진씨를 몰아붙였고 그야말로 주묘서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려 짓밟아 버렸다.
어찌 됐든 간에 주묘서도 태자부의 사람인데 개를 잡더라도 주인을 봐 가며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태자는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할 테니 당연히 엽연채에게 화풀이를 하려고 할 것이었다.
주위 공기는 순식간에 조금 옅어졌고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눈빛으로 엽연채와 주묘서를 훑어봤다.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밖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태자 전하 납시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보니 태자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검붉은 빛 천사금天絲錦으로 만든 둥근 깃이 달린 망포를 입은 그는 품위 있는 잘생긴 외모에 쭉 뻗은 체형이라 일국의 태자가 가진 당당한 기세와 중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금세 그 뒤편의 사람에게로 향했다.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화려하고 부티 나는 외모의 그 소년은 유문流紋이 들어간, 옷소매가 좁은 검은색 깔끔한 옷을 입었다. 옷소매에는 암홍색 테두리가 들어가 있고 울퉁불퉁한 무늬가 들어간 순금 각띠를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포복袍服이 나풀거렸고 등 뒤의 검은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는 멋스러운 풍모를 뽐냈고 얼굴에선 생기가 넘쳐흘렀다. 바로 주운환이었다.
자리에 있던 많은 규수들은 수려한 외모를 가진 주운환을 보더니 눈빛이 조금 반짝거렸다.
“태자 전하와 진서후를 뵈옵니다.”
자리에 있던 부인과 규수들은 잇달아 예를 올렸다.
주운환은 시선을 엽연채에게 향했다. 화려하면서도 차갑고 어둡던 눈빛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웃음기가 살짝 돌았다.
주묘서와 진씨는 주운환이 나타나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주묘서는 지금 이것저것 따질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 그저 엽연채를 죽여 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태자가 본인 대신 화풀이를 해 주기를 절실히 바랐다.
설령 주운환이 이곳에 있다 해도 뭐 어떻단 말인가. 그는 그저 후야에 불과하고 이 천하는 모두 태자의 것이었다.
주묘서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태자를 불렀다.
“전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태자에게 달려가 단숨에 그의 품에 안기고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전하… 신첩을 위해 이 일을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아픈 척을 하려면 제대로나 하든가!’
실은 그저 태자가 그녀를 위해 나서 주기를 바라는 것뿐이라는 티가 나도 너무 났다.
주묘서가 사람들 앞에서 가식적인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며 달려들자 태자도 순간 거북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저 까닭을 물었다.
“무슨 일이냐?”
“전하… 오늘 신첩이 꽃놀이 연회를 열었습니다. 신첩은 전하의 측비이고 황실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신첩에게 예를 올리지 않고… 신첩이 태자 전하께 시집을 갔더라도 비천한 첩실에 불과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중요한 이야기는 피하고 지엽적인 이야기만 꺼냈다.
엽연채의 품계가 더 높다고 해도 뭐 어떤가? 지금 태자는 자신을 지극히 총애했다.
태자비에게 차를 올릴 때 함께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규율마저 어겼고, 금슬이 무고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녀를 쫓아내어 태자비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태자비를 대면할 때조차 자신이 그의 총애를 믿고 행패를 부리게 놔뒀으며, 심지어 태자비의 체면을 깎을 수 있게 도와줬다. 그러니 엽연채는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태자는 주묘서가 이곳에서 수모를 당했다고 하니 본인도 정말 화가 났다. 그것도 주운환 앞에서 말이다. 주운환의 누이동생이 수모를 겪게 할 수는 절대로 없었다.
태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아했다.
“누구냐? 누가 감히 측비에게 무례를 범했느냐!”
“그게…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흑흑…….”
주묘서는 눈물을 쏟으며 엽연채를 가리켰다.
“저 사람입니다! 저보고 그저 비천한 첩실에 불과하다며… 예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태자는 어리둥절했다. 주묘서가 가리킨 사람은 뜻밖에도 엽연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겠습니까. 제 올케인 걸 믿고 절 업신여기는 겁니다……. 저보고 비천한 첩실이라고 했어요……. 흑흑. 전하, 절 위해 이 일을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주묘서는 흐느끼면서도 득의양양한 눈빛을 번뜩였다.
태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숙이고 주묘서를 내려다보니 그녀는 악랄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고 또 주위의 손님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엽연채의 곱고 아리따운 눈동자엔 조롱기가 묻어 있었다.
엽연채는 냉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저희는 주 측비의 초대에 응해 꽃놀이 연회에 참석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주 측비께서 위세를 부리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오자마자 제게 예를 올리라고 하며 규율은 규율이니 가족이라는 점에 기대 규율을 깨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는 대역무도한 일이며 황실과 황제 폐하를 안중에도 안 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하. 제가 전 정1품이고 측비는 정2품이니 제가 품계가 더 높다고 말하자 측비께서는 울면서 본인은 황실의 일원이니 황실의 존엄성을 대표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눈물을 흘리며 태자 전하께서 대신 이 일을 해결해 주실 거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전하께서 오셨으니 어서 측비를 대신해 이 일을 해결해 주십시오!”
태자는 엽연채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엽연채의 명백한 비웃음을 보자 이 이야기가 사실임도 알게 되었다. 시누이와 올케 사이의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태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자신도 주묘서와 주운환 사이의 갈등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갈등을 그저 사소한 집안일로만 치부했었다.
대장부는 전체적인 국면을 중요시해야 하며, 이런 사소한 문제는 앞날에 있어서 그야말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주운환은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은 인물이고, 주묘서는 주운환의 세력에 기대 태자부로 시집을 온 것이다. 남매의 이해관계가 맞으니 서로 돕고 보완하며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해 주고 보살펴 줘야 하는데, 주묘서가 뜻밖에도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태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때, 눈앞에서 사람 그림자가 휙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주운환이 앞으로 걸어 나온 것이었다. 엽연채의 손을 맞잡은 그의 화려하고 귀티 나는 얼굴이 얼음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고 위로 살짝 올라간 눈은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주묘서를 쳐다봤다.
“측비는 정말로 존귀한 분이시군요. 저희는 도저히 측비와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용서하십시오. 앞으로 이 주운환에게는 측비 같은 누이동생은 없습니다.”
주운환을 그리 말하곤 태자를 쳐다봤다.
“전하, 소신은 내자를 데리러 온 것입니다. 이제 만났으니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주운환은 엽연채를 끌고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전부 소스라쳐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이!”
주묘서는 태자의 낯빛이 확 변한 줄도 모르고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바로 애처로운 눈으로 태자를 쳐다보며 발을 굴렀다.
“전하, 보세요. 저 사람들이 이렇게 절 업신여깁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절 위해 이 일을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태자는 눈물을 쏟으며 떼를 쓰는 주묘서를 보더니 크게 노하여 그녀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주묘서는 ‘짝’ 소리와 함께 몸이 돌아가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묘서야!”
아연실색한 진씨는 급히 주묘서에게 달려갔다. 진씨는 주묘서를 부축하려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보니 태자가 얼음처럼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그만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묘서는 넋이 나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억울하면서도 놀라 두려움을 느꼈다.
‘전하께서 어떻게, 어째서 날 때리신 거야? 전하는 분명 그렇게나 날 총애하시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지. 이럴 수는 없지……!’
그녀는 억울했다. 엽연채에게 수모를 당했는데 태자가 왔으니 그는 당연히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측비가 자격이 부족해 네가 예를 올릴 수 없다면 나라면 되겠느냐?’
엽연채가 머리를 조아리게 만든 다음 품에 안은 자신을 보며 만족하느냐고 물어야 했다.
‘그렇게 돼야 맞는 건데 어떻게 이럴 수가…….’
“이 몹쓸 것!”
태자는 주묘서에게 심한 욕을 퍼부으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너무 심하게 닦아세우면 자신이 주운환의 환심을 사고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주묘서를 측비로 맞이한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물론 이게 사실이기는 하나 대놓고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넌 내 측비이자 첩실이다. 네게 품계가 있으니 귀부인들 모두 네게 예를 올려야 하나 그 사람은 네 올케언니다! 그런데 감히 손윗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행동을 하다니! 게다가 그 사람은 정1품 부인이다. 본래 너보다 품계가 높은데 뭘 어쩌고 싶은 것이냐? 썩 물러가 벽을 보고 잘못을 반성하거라!”
말을 마친 태자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그곳을 떠났다.
태자가 떠나자마자 진씨는 미끄러지듯 바닥에 쓰러졌고 놀라서 감히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주묘서를 부축하러 가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손님들은 주묘서의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더니 아주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중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가리고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진작부터 주묘서가 눈에 거슬렸었다. 태자부에 들어온 후 첫날부터 태자비의 측근을 쫓아내고 태자비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섰으니 말이다.
자리에 있는 귀부인들은 전부 정실이었고 규수들도 대부분 적녀였다. 그러니 첩실이 정실을 깔아뭉개는 행동이 어디 곱게 보이겠는가?
하지만 어쨌든 간에 주묘서는 태자의 측비이고 게다가 주운환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으니 별수 없이 그녀에게 생글생글 웃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묘서가 자신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엽연채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다니, 비굴하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본인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