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15화 (515/858)

제515화

주묘서는 입꼬리를 당겼다. 자신을 짓밟았던 사람들이 지금 자신 앞에서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희열감이 차올랐다.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

주묘서의 말에 진 부인은 얼른 엽영교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때, 주묘서가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더니 엽연채를 쳐다봤다. 엽연채가 자신에게 예를 올리지 않았음을 방금 막 알아차린 것이다. 주묘서는 비웃음 어린 눈빛을 번득이더니 버들잎 모양의 고운 눈썹을 추켜세웠다.

“작은새언니. 우리가 가족이기는 하나 이제 나는 황실 사람입니다.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라는 말이 있죠. 이제 전 황실의 일원이고 품계가 있는 측비입니다. 그런데 작은새언니는 어째서 예를 올리지 않는 겁니까?”

사람들은 주묘서의 말을 듣고는 모두 어리둥절했고 원남옥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두 사람은 한 가족이 아닌가? 설령 전에 갈등이 있었다고 해도 어째서 여기까지 와서 주묘서는 이런 행동을 한단 말인가?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엽이채와 포기는 속으로 흥분해 마지않았고 맹씨조차도 아주 고소해했다.

‘정말 체면이 제대로 깎이는군. 쯧쯧.’

진씨와 녹지도 기가 활짝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진씨는 엽연채를 쓱 쳐다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셋째야, 뭐 하는 것이냐? 설마 군신의 예조차 잊어버린 것이냐?”

엽연채는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로 날카로운 빛을 내비치더니 냉소를 지으며 주묘서를 쳐다봤다.

“저보고 예를 올리라고 하는 건가요? 무릎을 꿇으라고요?”

주묘서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작은새언니, 우리가 가족이고 새언니가 제 올케언니라고 해도 전 이제 측비이니 제게 예를 올려야 마땅하죠.

새언니는 제 올케니까 예를 따르지 않고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건 우리 대제의 법률이에요! 새언니가 이리 행동하는 건 우리 대제의 법률을 안중에도 안 두는 거 아닌가요? 우리 대제의 황실은 안중에도 없는 거 아니냐고요?”

주묘서는 숨도 쉬지 않고 와다다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고, 말을 하면 할수록 감정이 격양됐다.

그녀는 엽연채가 분명히 고분고분 자신에게 예를 올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대응책을 준비해 놓았다. 그녀가 며칠에 걸쳐 이 거창한 이치를 준비한 건 하늘만이 알 것이다.

일을 점점 더 키울 건데 그래도 감히 엽연채가 무릎을 안 꿇고 배길지 주묘서는 지켜볼 작정이었다.

진씨는 주묘서가 이렇게 매서운 기세로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기쁘고 안심이 되는 눈빛을 보이며 웃음기를 띠었다. 이제 딸도 혼자서 일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주묘서가 낭랑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이 말을 던지자 화원 전체가 요동쳤다.

주묘서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녀는 엽연채가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말을 더듬으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엽연채는 뜻밖에도 코웃음을 치며 맞섰다.

“가족 간의 정을 따지지 않겠다고 하니 그럼 도리를 논해 보죠. 측비이니 정2품 맞죠?”

“그래요. 교활하게 궤변을 늘어놓을 생각은 하지 말아요.”

주묘서가 큰 소리로 말하자 엽연채가 의아하다는 투로 말을 받았다.

“이것 참 궁금하네요. 전 정1품 부인이고 아가씨보다 품계가 두 단계 높아요. 그런데 저보고 예를 올리라고 하는 건가요?”

그녀가 이 말을 꺼내자 화원 전체에 ‘윙’ 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제야 엽연채의 품계가 정1품 부인임을 떠올렸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이미 이 점을 생각하고 있던 쪽이었다.

주묘서와 진씨는 어리둥절했다.

‘정1품이라고?’

주묘서는 엽연채에게 ‘짝’ 소리가 나게 뺨을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 새언니가… 정1품이라고요?”

“네, 이제 어떡할까요?”

엽연채는 비소를 지었다.

주묘서와 진씨는 표정이 굳어졌다. 주묘서가 태자부로 시집가면 태자 측비이자 황실의 일원이 되며 황실 족보에도 오르고 품계도 생기니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태후와 황후, 태자비와 왕비를 제외하고는 주묘서가 가장 고귀한 존재이니, 모든 부인과 규수들이 모두 그녀에게 예를 올리고 고개를 숙이며 신하로서 복종해야 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갑자기 ‘정1품’이라는 말을 꺼낼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주묘서도 머리가 있으니 당연히 정1품이 정2품보다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었다.

“에휴, 전 우리가 가족이니 예를 차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줄곧 아가씨에게 예를 올리지 말라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가족들 간의 정에 기대어 규율을 어지럽히면 안 된다는 말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속으로 이렇게 예의를 지키는 걸 신경 쓰고 있었군요.

맞아요. 어쨌든 태자부에 시집… 아니지, 황실로 시집을 갔다고 해야죠. 황실로 시집을 갔으니 아무래도 규율에 따라야겠죠.”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감개무량하고 대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묘서는 엽연채가 자신의 말을 이용해 도리어 쏘아붙이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장만만은 코웃음을 치다가 하마터면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 뻔했다.

주위에 있는 많은 귀부인과 규수들은 진작부터 주묘서가 눈에 거슬렸었다. 그녀는 진씨 가문을 싫어했으면서 진지항이 탐화로 합격하자 다시 그에게 들러붙었고, 또 가난했을 때 서씨 가문과 정혼을 했다가 부귀해지자 다시 서씨 가문을 짓밟고 다섯 식구의 목숨을 앗아 간 여인이었다.

정말로 사람들을 전부 바보로 아는 걸까? 몇 마디 말로 포장하면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말인가?

황제가 나서서 뒤처리를 하고 태자가 그녀를 태자부로 들이려고 하니 감히 그녀의 추잡한 일을 언급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많은 귀부인과 규수들이 얼굴에 조롱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주묘서는 부끄럽고 화가 나 더듬더듬했다.

“난 태자 측비이고 황실의 일원이에요. 난 군君이고 새언니는 신臣이니… 새언니가 저에게 예를 올려야죠…….”

그런데 뜻밖에도 엽연채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싸늘한 빛이 번득이더니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되받아쳤다.

“아가씨 체면을 살려 주려 측비라고 부르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는 그저 첩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거예요?”

주묘서와 진씨는 엽연채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이리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들과 말다툼하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주묘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낯빛을 어쩌지 못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이 측비는… 측비는……!”

“엽씨 이것아!”

진씨가 써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묘서는 네 시누이다. 너 같은 사람이 대체 어디 있느냐? 이 시어머니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엽연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는 또 제 시누이인가 보죠? 그럼 방금 전에 저보고 예를 올리라고 했을 땐 어째서 가족 간의 정을 이유로 규율을 어지럽히면 안 된다고 한 건가요? 올케인 제게 몸을 낮추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올리라고 했을 때, 어째서 어머님은 나서서 아가씨를 막지 않으신 거죠? 그러셨으면서 지금은 저보고 어머님을 안중에도 안 둔다고 하시는군요.”

엽연채가 진씨를 쏘아붙이자 그녀는 몸이 뒤로 젖혀졌다.

“하하, 이건 전형적인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네요.”

이때, 누군가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모두 그쪽을 쳐다보니 곱고 아리따운 외모를 가진 절세미녀가 눈에 들어왔다.

진씨와 주묘서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지난 일 년간 많은 자리에 참석했으니 두 사람은 당연히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이 소녀는 바로 금위군 통령이 애지중지하는 딸 상관운이었다.

과거 상관운과 유곡요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도성 제일의 규수였다. 한 사람은 최고의 미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최고의 재녀였으니. 나중에 명성을 전부 엽연채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상관운의 말에는 여전히 무게가 있었다. 상관운이 핵심을 찌르자 힘들게 참아 왔던 많은 사람들이 그만 비웃음을 터뜨렸다.

주묘서는 조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곳에 앉아 있었고 치켜뜬 두 눈엔 핏발이 섰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쥐구멍을 찾아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은 원래 자신이 가장 빛나는 날이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추앙받는 날이었다. 그런데 결과가 이랬다.

주묘서는 바닥에 떨어진 체면 때문에 그야말로 엉엉 울고 싶었다.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받치더니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옆에 있던 녹지가 깜짝 놀라 그녀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측비 마마, 측비 마마! 왜 그러십니까?”

“흑… 머리가 아프구나…….”

주묘서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색한 상황을 피하고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하께서는, 전하께서는 돌아오셨느냐…….”

주묘서가 태자를 찾자 옆에 있던 춘산이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고 화원 안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한참이 지난 후, 춘산이 흥분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녀는 정자 안으로 뛰어 들어와 이렇게 고했다.

“측비 마마, 전하께서 마침 퇴청하여 태자부로 돌아오셨습니다. 노비가 전하께 측비 마마께서 몸이 편찮으시다고 하니 전하께서 옷조차 갈아입지 않으시고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그녀는 마지막 말을 꺼낼 때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태자가 돌아왔다. 태자부로 돌아온 그는 주묘서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리에 옷조차 갈아입지 않고 황급히 오고 있었다. 그녀의 일에 의분을 느끼는 것이었다.

주묘서는 태자가 온다는 소리에 흥분이 됐다. 그녀는 진씨의 품에 기대 몹시 고통스럽고 힘든 척을 했지만 돌아가서 쉬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태자가 와서 그녀 대신 화풀이를 하고 그녀의 체면을 회복시켜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자신이 측비여서 신분이 충분하지 않다면 태자가 직접 엽연채를 처리하게 하면 되었다.

주묘서는 그런 생각을 하자 또다시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음흉하고 악독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쓱 보더니 다시 주위에 있는 규수들을 하나하나 쳐다봤다.

‘이 사리분별 못 하는 비천한 것들아. 잠시 후에 전하께서 나를 얼마나 총애하는지 잘 지켜보거라. 그리고 전하의 노여움을 한번 잘 견뎌내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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