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4화
진 부인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더는 모른 척하기 곤란하여 엽영교와 함께 안으로 걸어 들어가 미소와 함께 말을 붙였다.
“오랜만입니다. 주 부인.”
“그러게요. 오랜만입니다.”
진씨는 그리 말하며 득의양양한 눈빛을 번뜩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떤 일들은 정말 꿈처럼 느껴지네요. 모든 건 다 운명으로 정해져 있나 봅니다. 우리 묘서는 평범하게 살 팔자가 아니라 황실로 시집갈 운명이었던 거예요. 하하하. 어찌 됐든 간에 진 부인과 며느님께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진 부인과 엽영교는 짜증이 치밀었다. 진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연히 알아들었으니 말이다. 진지항이 그 당시 주묘서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아서 고맙다는 뜻이었다.
진 부인도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저도 고맙기는 마찬가지예요!”
‘쳇. 그런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물건은 우리 진씨 가문도 하나도 아쉽지 않거든. 만약 그 애를 정말로 며느리로 들였다면 조상님들 묘가 무너져 내렸을 거고, 관판棺板(관棺을 만드는 데 쓰는 넓고 긴 널빤지)도 못 눌러 놨을 거야. 황릉의 관판은…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지 뭐!’
“하하.”
진씨는 웃음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속으로는 진 부인이 자기가 꿀리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진씨 가문 사람들은 분명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있겠지! 전에는 너희들이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이제 우리는 너희들이 감히 넘보지도 못할 사람이 되었으니까.’
“아, 참.”
진씨가 갑자기 엽연채를 쳐다보며 온씨를 찾았다.
“너희 어머니는 어째서 오지 않으셨느냐?”
“저희 어머니는 고뿔에 걸려서 오지 못하셨습니다.”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러자 진씨가 눈썹과 눈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고뿔이라고? 큰일 아니더냐? 녹엽아, 지금 가서 사돈을 뵙고 오너라.”
가서 내막을 알아보라는 의미였다. 녹엽이 온씨를 보고 돌아오면 분명 그녀가 꾀병을 부렸노라고, 주묘서가 좋은 곳에 시집간 꼴을 차마 못 보는 속 좁은 사람이라고 사실대로 보고할 것이었다.
“됐으니 밖에 나가 놀거라!”
진씨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쓱 쳐다봤다.
“예.”
엽연채는 대답한 뒤 정자 밖으로 나갔다.
줄곧 진씨 옆에 앉아 있던 주묘화는 맥이 탁 풀렸고 실망한 눈빛을 보였다. 그녀도 작은새언니와 함께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그리하면 진씨가 분명 화를 내리라.
엽연채가 정자 밖으로 나오자 곧장 또 몇몇 규수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연채야, 왔구나.”
그때 부드럽고 아름답게 생긴 한 소녀가 생글거리며 다가왔다. 바로 원남옥이었다.
“민이도 여기 있네. 우리 저쪽으로 가서 바둑을 두자.”
“에휴. 왜 매번 바둑, 바둑 하는 거야. 바둑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고 싶으면 시간 있을 때 현주를 집으로 불러. 아니면 진서후부에 가서 배워도 되고. 오늘은 저쪽에 가서 시를 짓자! 여긴 국화가 활짝 피어 있고 화단의 애기동백도 아주 곱던데 시를 짓는 편이 낫지.”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소저가 끼어들더니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바로 포모였다.
엽연채가 화단 근처를 쳐다보니 황금빛으로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 소저 둘이 앉아 있었다. 단풍나무에 반쯤 가려져 있는데도 엽연채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봤다. 바로 장만만과 오설매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포모였다.
장만만과 포모, 오설매 이 세 사람은 전에 태자 측비 후보였는데 지금 주묘서가 한 사람도 빼먹지 않고 모두 부른 것이었다. 정말이지 졸렬해도 너무 졸렬했다.
“난 시를 짓는 법을 몰라. 저쪽에 핀 애기동백이 아름다우니 우리 가서 꽃이나 구경하자.”
엽연채가 말했다.
“그럼 현주는 우리와 함께 바둑을 보러 가자.”
원남옥은 그리 말하며 제민을 끌고 저쪽에 있는 낭가 아래로 갔고, 엽미채는 애기동백 구경이 내키지 않아 제민을 따라 바둑을 보러 갔다.
엽연채와 엽영교는 포모를 따라 단풍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정자 안에 있던 장국후부 부인은 엽연채가 포모와 노는 모습을 보더니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맞은편 석가산 아래에선 엽이채가 포기와 함께 속닥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엽연채를 몹시 미워하고 질투했기 때문에 말이 아주 잘 통했다.
엽이채가 어두운 표정으로 포모를 흉봤다.
“네 언니 좀 보라지. 엽연채를 보자마자 아주 찰싹 달라붙네.”
포기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언니는 원래부터 그랬어. 너희 아가씨도 마찬가지 아냐.”
‘아가씨’는 당연히 장만만을 일컫는 것이었다.
“잠시 후면 주묘서가 오는데 어디 얼마나 더 까부는지 볼 거다.”
“그래, 진짜 볼거리는 지금부터야!”
엽이채가 화제를 돌리자 포기도 흥분에 찬 표정을 지었다.
“태자비 마마의 측근마저 주묘서가 쫓아냈다고 하던데. 참 대단하지?”
두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며 좋은 구경거리가 생기겠다는 기대를 내비쳤다.
* * *
그 시각 묘언헌.
주묘서는 방 안에 앉아 있었지만 계속해서 밖을 쳐다봤다. 하지만 동작을 크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밖에 있는 시녀들이 그 모습을 보고 남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를 비웃을 테니까 말이다.
이때, 녹지가 황급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춘산은 기뻐하며 그녀를 맞았다.
“녹지 언니, 다들 도착했어요?”
“응.”
녹지는 말을 하며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셋째 마님, 장만만, 포모, 오설매 그리고 진씨 가문 사람들이 전부 와 있습니다. 측비 마마께서 나오시기를 정중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묘서는 ‘정중히 기다린다.’라는 말에 속으로 우쭐해하더니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진씨 가문 사람들이 왔단 말이지. 마침내 그것들의 콧대를 뭉개 줄 수 있게 되었구나.”
그러면서 살판난 눈빛을 번뜩였는데, 그 눈빛에는 쾌감이 잔뜩 묻어났다.
그때 진씨 가문 일로 주묘서는 체면이 크게 깎였었다. 그녀는 진지항에게 시집가고 싶었는데 진지항은 그녀를 거절하더니 엽영교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젠 그 사람이 그때 날 아내로 맞이하지 않은 게 정말 고맙구나.”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서 그것들을 만나자꾸나.”
“예.”
녹지와 춘산은 대답과 동시에 얼른 그녀의 손을 잡아 부축하며 문을 나섰다.
“방금 전에 셋째 마님이 오셨을 때 많은 규수들과 젊은 부인들이 마님을 에워쌌어요. 무슨 귀한 사람을 봤단 듯이 말이죠.”
녹지의 말에 주묘서는 코웃음을 치더니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고 냉담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가자!”
주묘서와 녹지, 춘산은 문을 나섰고 열 명가량의 시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가지런히 두 줄로 서서 걸어갔고 화려한 의복을 입은 이 많은 시녀들이 주인을 둘러싸고 있으니 아주 호화스러워 보였다.
경려원은 한창 떠들썩했는데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측비 마마 납시오!”
화원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했고 진씨는 흥분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왔구나.”
왕 부인과 장국후부 부인은 서로 눈을 맞추더니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엽연채와 엽영교, 진 부인과 장만만은 단풍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이 소리를 듣고는 모두 멍해졌다. 엽영교가 조롱 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비아냥댔다.
“일개 측비 주제에 ‘납시오’는 무슨.”
대제에는 ‘납시오’라는 말을 누구에게는 써도 되고 누구에게는 쓰면 안 된다는 법률은 없었으나 일반적으로 황제, 태후, 황후, 황자, 공주, 황자비皇子妃 같은 사람에게만 이 말을 썼다.
다른 사람들에게 ‘납시오’라는 말을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는 암묵적으로 굳어진 관례였다.
그런데 주묘서는 일개 측비에 불과한데 시녀들에게 ‘납시오’라고 외치게 했으니 정말 우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보니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주묘서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수홍색 바탕에 나비가 수선화 주위를 날아도는 문양이 수놓인, 앞섶이 교차하는 운금雲錦 상의를 입고 있었고 담황색 금실로 마찬가지로 수선화를 수놓은 긴 치마를 입었다. 머리는 회심계回心髻 모양으로 만들었고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꼬리엔 다채로운 빛깔의 보석이 상감된 도금 장신구를 꽂았다. 또 봉황의 부리 부분은 홍옥 미심추眉心墜(양미간의 정중앙에 드리우는 장식)를 늘어뜨리고 있어 아주 화려하고 귀해 보였다.
그녀가 정비 같은 기세를 보이자 엽연채는 그 모습을 쳐다보며 실소했다.
주묘서는 한 발씩 내디디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만인에게 주목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주 득의양양해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규수와 귀부인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고,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측비 마마께서 오셨군요.”
왕 부인이 그녀를 쳐다보며 ‘아이고’ 하더니 얼른 장국후부 부인을 끌고 정자 밖으로 나갔다. 진씨도 밖으로 나와 미소를 지으며 주묘서를 쳐다봤다.
“묘서야.”
“어머니.”
주묘서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서 이쪽에 앉거라.”
진씨는 그리 말하며 주묘서를 끌고 정자 안으로 들어가 입구와 마주 보는 위치에 앉았다.
“하하하. 주 측비 마마를 뵈옵니다.”
왕 부인과 장국후부 부인 그리고 정자 안에 있던 몇몇 규수들도 함께 예를 올렸다.
주묘서는 입꼬리에 미소를 머금고는 옥같이 희고 아름다운 손을 흔들며 인사를 받았다.
“일어나세요.”
왕 부인 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자 다른 손님들도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정자 밖에 서서 그녀를 향해 예를 올렸다. 주묘서는 마치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그녀가 눈을 들어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장만만 등이 있었고 엽연채와 엽영교도 그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주묘서는 미간을 씰룩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진씨 가문 부인 아닌가? 오랜만이네.”
이 말이 나오자 화원 전체에 정적이 흘렀고 사람들은 조금 미묘한 눈빛으로 엽영교와 주묘서를 쳐다봤다.
사람들은 진지항이 탐화가 되었을 때 주묘서가 큰 손해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주묘서가 태자에게 시집가 측비가 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말 새옹지마라는 말이 딱 맞았다.
엽영교는 그녀가 자신을 부르자 짜증이 나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왕 여기까지 와서 피할 이유가 없으므로 진 부인과 포모, 장만만 등과 함께 주묘서에게 예를 올렸다.
“측비 마마를 뵈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