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3화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채, 네 말대로야. 내가 단속하고 싶어도 내 차례까지 오지 않거든. 그런데 넌 입만 열었다 하면 우리를 서자 내외라고 부르며 내 부군의 출신을 비하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구나.”
엽이채와 맹씨는 그 말을 듣더니 거짓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두 사람은 에둘러서 말했는데 그녀는 어떻게 이리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친척 간의 연을 끊겠다는 건가? 체면도 차리지 않겠다는 건가?
“뭘 그렇게 노려들 봅니까?”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
“이 지경이 됐는데 어디 하하 호호 친척 관계로 친하게 지내겠습니까? 내가 그쪽들 집에 밥을 빌어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왜 그쪽들 체면을 세워 줘야 합니까?”
엽이채와 맹씨는 화가 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둘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고 난처하면서도 분노가 치밀었다. 엽이채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내며 말했다.
“진서후면 뭐 해. 여전히 서자인데.”
“그래, 서자야.”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네 부군은 적자이지. 정말 대단하네! 그런데 넌 어째서 네 부군에게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으며 후야가 되어 보라고 하지 않니?”
엽이채와 맹씨는 또다시 낯빛이 확 변했다. 둘 다 뺨을 실컷 얻어맞은 듯한 느낌에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체면이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엽이채는 변변찮은 장박원을 떠올리다가 다시 제 남편이었어야 할 주운환을 떠올렸다. 주운환만 생각나면 화가 나 눈물이 다 쏟아질 것만 같았다.
분한 엽이채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서자는 서자야……! 아무리 공을 세워 신분이 변한다 한들 귀해질 수 없어.”
엽연채는 그녀를 쳐다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네 아버지는 서자이고 네 어머니는 서녀잖아. 네 가족들은 서출이야.”
엽이채는 또다시 엽연채에게 뺨을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었다.
“이, 이……! 난 이제 장씨 가문 적장자의 아내야.”
“어머, 시집을 가면 귀해질 수 있는 거였어? 방금 네 입으로 아무리 변한다 한들 귀해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니?”
엽연채는 허허 웃음을 지었고, 엽이채는 화가 나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좀 조용히 있을 수는 없는 거예요?”
보다 못한 장만만이 앞으로 나오더니 싸늘한 눈으로 엽이채를 노려봤다.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공연히 소란을 피우는군요. 그러니 내 변변치 못한 오라버니마저 이젠 새언니를 아내로 맞이한 걸 후회하고 있는 거라고요.”
엽이채는 말문이 막혔고 조그마한 얼굴에선 순식간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녀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소매 안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후회한다고? 장박원이 후회를 한다고?’
자신도 ‘애당초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제 장박원을 싫어하기까지 했다. 그는 머저리 같은 사내, 진사로 합격도 못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가 장원 급제를 하고 후야가 되는 길은 요원했다.
엽이채는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달갑지가 않았고 화가 치밀었다.
“안 가고 뭐 해요?”
장만만은 냉랭한 눈으로 그녀를 힐긋하고는 고개를 돌려 맹씨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가시죠.”
“그래.”
맹씨도 속으로 화를 참고 있었는데 딸이 가자고 재촉하자 그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엽이채는 할 수 없이 그들을 쫓아갔고 조금 걸어가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음침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쏘아봤다.
‘빌어먹을 계집애. 지금 의기양양해하는데 잠시 후에 주묘서를 만나도 그럴 수 있을까? 걔가 어떻게 널 못살게 구는지 내가 이 두 눈으로 지켜볼 거다.’
엽영교는 이미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상태였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엽이채 등의 뒷모습을 보더니 낯빛이 어두워졌다.
“저 천박한 것.”
한편, 엽영교를 부축하는 엽미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묘서가 늘 엽연채를 못마땅해했으니 잠시 후 분명 자신들을 난처하게 만들 터였다.
“가요.”
엽연채는 이리 말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태자부의 시녀가 다가오더니 그들을 이끌고 수화문을 지나 자갈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엽연채 일행은 온갖 정자와 누각들을 지나쳐 화원으로 안내받았는데, 화원 입구의 커다란 반월문半月門 위에는 커다란 세 글자 ‘경려원’이 적힌 도금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비단옷을 입은 우아한 자태의 여인들이 북적거렸고 갖가지 장신구들은 눈이 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 꽃놀이 연회에 초대받은 여러 가문의 여인들이었다.
정원의 낭가 아래에는 바둑판이 준비되어 있었고 근처 단풍나무 아래엔 커다란 탁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시를 쓸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었다.
규수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같이 깔깔거리며 즐겁게 웃어댔다.
진씨는 주묘화를 데리고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 와 있었다. 그녀는 석가산 근처의 정자 안에 앉아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에 이 귀부인들은 진씨를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주운환이 전공을 세우고 후야가 된 후에도 그들은 엽연채에게 더욱 들러붙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주묘서가 태자 측비가 되자 귀부인들은 바로 진씨에게 아첨을 하며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진씨는 지금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중심에 있으니 마치 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씨 가문이 몰락하기 전, 그 영광스러웠던 시절 말이다.
그녀는 속으로 우쭐했고 만인에게 주목받는 느낌을 즐겼다. 그래도 내색해서는 안 되니 다만 바른 자세로 앉아 제 격에 맞는 미소를 얼굴에 띤 채 시큰둥한 기색을 보였다.
“주 부인, 머리에 꽂은 수비취水翡翠를 상감한 작약꽃 모양 장신구가 정말 아름답네요. 이 장신구는 어느 상점에서 만든 건가요?”
왕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맞아요. 정말 너무 아름답네요.”
옆자리의 장국후부 부인도 얼른 맞장구를 치자 진씨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런가요? 하지만 이건 그저 팔진루八珍樓에서 파는 장신구예요. 평범한 거죠.”
팔진루는 도성의 장신구 상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점이라지만, 지금 이 귀부인들에게는 평범한 상점에 불과했다.
“팔진루 물건도 아주 훌륭하죠. 한데 이 머리 장신구는… 저번에 저도 팔진루에서 봤는데 사지는 않았어요. 그땐 이 머리 장신구가 특별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주 부인 머리에 꽂혀 있는 모습을 보니 생동감이 넘치고 반짝반짝 빛이 흐르네요. 과연 어떤 사람이 차는지가 중요하군요. 주 부인에게선 고귀한 분위기가 흘러넘치니 목잠木簪만 꽂아도 분명 고상한 분위기가 흐를 겁니다.”
왕 부인이 웃는 낯으로 다시 한번 추켜세웠다.
진씨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입꼬리를 올리며 더욱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화려한 치장을 한 자신에게 사람들이 아부하고 비위를 맞추는 이 느낌이 너무나도 좋았다. 이래야만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이렇게 외쳤다.
“진서후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아유, 진서후 부인이 왔군요!”
진씨와 같은 정자에 앉아 있던 부인과 규수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진씨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얼굴이 확 굳어졌다. 옆에 있던 왕 부인과 영안후부 부인 등 몇몇 귀부인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리하면 체면이 확 깎일까 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환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씨는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진씨가 고개를 들어 보니 화원 입구에서 오밀조밀한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수홍색 상의와 치마를 입은 엽연채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걸어오며 자신을 둘러싼 규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맑고 아름다운 그 미소에는 높은 곳에 오른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와 침착함이 담겨 있었다. 진씨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짜증이 치밀었다.
어디 그뿐인가. 정자에 있던 사람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엽연채를 보더니 냉큼 달려가 그녀에게 알랑방귀를 뀌었다. 진씨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태자 측비의 친어머니인데 이 사람들이…….’
“하하하. 진서후 부인은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가 잘 통하겠죠.”
장국후부 부인은 얼른 미소를 지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했다.
다들 후 부인이기는 했지만 장국후부는 이미 좀 기울어진 집안인지라 엽씨 가문이 작위를 빼앗기기 전보다도 별로 나을 게 없었다. 집안의 기둥이 5품 소관에 불과하니 당연히 조정의 신흥 귀족인 주운환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장국후부 부인도 엽연채와 친분을 쌓고 싶었다. 장국후부와 엽씨 가문은 대대로 교분이 있는 집안이지 않은가. 하지만 엽영교의 혼사 때문에 묘씨와 얼굴을 붉히게 됐으니 지금은 다가가기가 곤란했다.
이때, 녹지가 걸어왔다. 그녀는 어둡게 가라앉은 진씨의 표정을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녹지는 진씨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마님,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은 그저 셋째 마님이 젊은 분이니 저 젊은 부인들과 규수들이 다가서는 것뿐입니다. 잠시 후에 측비 마마께서 오실 텐데 어디 언제까지 기고만장할 수 있는지 한번 보시죠.”
“그래.”
진씨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묘서가 언급되자 그제야 한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묘서는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것이냐?”
“준비는 다 되셨습니다. 손님들이 다 모였을 때 측비 마마께서 등장하셔야 한층 존귀해 보이실 겁니다.”
녹지의 대답에 진씨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보아하니 거의 다 온 것 같구나. 지금 가서 묘서에게 잠시 후에 나오라고 말하려무나.”
“네.”
녹지는 대답을 하고선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가 경려원 안으로 들어서자 규수들과 젊은 부인들이 재잘거리며 그녀를 둘러쌌다. 하지만 엽연채는 그저 미소만 지은 후 정자 안으로 걸어가 가장 먼저 진씨를 찾았다.
어찌 됐든 간에 진씨는 자신의 시어머니이니 당연히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불효하고 무례하게 군다고 수군거릴 테니 말이다.
엽연채는 진씨에게 예를 올렸다.
“어머님.”
진씨는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잠시 후 주묘서가 와서 그녀를 깔아뭉갤 거라는 생각을 하자 다시금 기분이 한결 좋아져 허허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왔구나.”
진씨는 그리 말하며 밖을 쳐다봤다. 보니 엽영교가 근처에 서서 엽연채를 기다리고 있었고 진 부인은 엽영교 옆에 서 있었다.
진씨는 미소를 지으며 먼저 알은체했다.
“어머, 진 부인과 며느님이 아니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