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2화
엽영교와 진 부인도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가 혼인한 지 일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그녀들도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진 부인은 얼른 이렇게 말했다.
“곧 생길 거네. 전에는 젊은 후야께서 과거 시험 준비로 바쁘고 또 출정 준비로 바빴으니 그쪽으로는 신경을 못 썼던 게지. 이제 돌아온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뭘.”
“고모, 고모는 탕포를 제일 좋아하죠. 어서 우리 집 요리사의 솜씨가 어떤지 맛 좀 보세요.”
엽연채는 그 이야기를 더 하기 싫어 탕포 하나를 집어 엽영교의 밥그릇에 놓아줬고, 엽영교는 반색하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마음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연채뿐이구나.”
방 안의 사람들은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 식사를 했고 여종들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추길은 이 틈을 타 옥패를 끌고 밖으로 나가 조그만 뒤채로 걸어가더니 문을 닫았다.
옥패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뗐다.
“뭐 하려고 날 이렇게 비밀스럽게 끌고 온 거야? 아, 알겠다. 어떻게 해야 마님에게 하루빨리 좋은 소식이 생기는지 물어보고 싶은 거지?”
옥패는 풉 하고 웃었다. 그러나 엽연채에게 아이가 들어서지 않은 지 꽤 오래됐다는 생각이 곧바로 따라붙자 그녀도 심히 걱정이 되었다.
추길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마님이 영교 아가씨보다 일찍 혼인하셨는데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잖아. 너희 상전은 참 대단하시다. 곧 있으면 5개월이 되잖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혼인 전에 주인마님께서 얼마나 공을 들이셨는데. 음식도 계속 신경 쓰셨고.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옥패는 엽영교가 혼인 전에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떻게 먹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해 줬다. 그런데 추길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서 옥패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무엇도 기억하지 못했다.
“영교 아가씨는 마음이 넓어 보이시던데, 지금 몸이 불편하니 나리께 사람은 붙여 드리셨는지 모르겠다.”
옥패는 추길의 말에 순간 어리둥절해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씨 가문에는 좋은 규율이 있어. 들어 보니 돌아가신 노마님께서 아이를 가졌을 때 첩실에게 수모를 당해 아이를 유산하셨던 적이 있대. 진씨 가문은 늘 대를 이을 아들이 부족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대를 이을 아이를 낳는 거였어.
그래서 당시 어르신께서 정실이 회임하면 첩실을 들여서는 안 되며 적장자가 태어난 후에야 가능하다는 규율을 만드셨어. 만약 3년 동안 적자를 낳지 못하면 그 경우에도 첩실을 들일 수 있다고 하더라.”
추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건 진씨 가문의 규율이지.”
“맞아.”
옥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넌 마음 푹 놓아도 돼. 너희 주씨 가문에는 그런 규율이 없잖아.”
추길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떠듬거렸다.
“무,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돌렸다. 옥패는 헤헤 웃더니 뒤에서 추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조금 더 분명히 말했다.
“우린 다 같은 처지잖아. 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난 당연히 알고 있어. 우린 그저 걷는 길이 다를 뿐이야. 게다가 난 너희들처럼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니까.”
추길의 얼굴이 아예 불타올랐지만 그래도 옥패의 말을 들으니 걱정이 다소 줄어드는 듯했다. 그녀는 주씨 가문 사내들을 떠올려 봤다. 주비양이든 주종과든 모두 혼인 전에 통방을 가졌고, 주씨 가문에 첩실과 관련해 다른 규율은 없었다.
“너희 마님은 대범한 분이시잖아. 그러니 내 말은 기다려 보라는 거야! 때가 되면 네 살길도 열릴 테니 말이야.”
옥패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 말에 추길은 외려 조금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늘 대범했던 엽연채가 이번엔 자기 것에 너무 욕심을 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마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어찌 됐든 간에 상전의 뒷소리를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추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만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 영교 아가씨에게 이야기하면 안 돼.”
“그럼.”
옥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랑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는데 내가 널 팔아먹겠니.”
두 사람은 뒤채에서 나왔고 밖에서 한 바퀴를 돈 후 운연거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소월과 매화가 밥그릇과 젓가락을 치우고 있었다. 엽연채와 엽영교 등은 입을 헹군 뒤 서차간에 잠시 앉아 있었다.
“참, 주묘서가 혼인한 지 이틀 만에 태자부에서 소란을 피웠다는데 그 이야기는 들었어?”
제민이 운을 떼자마자 엽연채와 엽영교는 풉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지.”
시녀들 앞에서 피운 금슬을 내치는 소란을 피웠으니, 개중 한 사람만 입을 놀려도 소문은 금세 도성 전체에 파다하게 퍼지기 마련이었다. 어찌나 빠르게 퍼지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절로 알게 될 정도였다.
“죽자 사자 일을 벌이는데 어쩜 그리 낯짝이 두꺼운지 정말 모르겠다.”
엽영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모, 걘 지금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 영광스러운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아주 득의양양해하고 있겠죠.”
엽연채는 말로 뱉고 나니 어이가 더욱 없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꽃놀이 연회까지 열었겠죠.”
제민과 엽영교는 조용히 입꼬리만 삐죽거렸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일행은 이각 정도 쉬고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에 가까워지자 태자부로 출발했다.
* * *
오늘은 태자부에서 꽃놀이 연회를 여는 날이었다.
하지만 주묘서는 꽃놀이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이 연회를 마련했다. 그래서 유명하고 진귀한 화초는 준비하지 않았고 그저 아랫사람들을 시켜 국화를 심은 화분 백여 개를 태자부의 경려원景麗園에 가져다 놓게 했다.
경려원은 태자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원이었다. 화원 안에는 석가산들이 우뚝 솟아 있고 왼쪽엔 투구 모양의 팔각지붕 정자 두 개가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엔 포도들이 기둥을 타고 올라간 낭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계절이 변함에 따라 가운데 커다란 화단의 식물들도 달라졌는데, 현재는 애기동백이 한가득 심어져 있었다. 난만히 피어 있는 꽃들이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절로 감동이 느껴지는 정경이었다.
백옥으로 만든 화단 아래는 황금빛 국화들이 크게 한 바퀴 둘러싸고 있어 화단 전체에서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겼다.
주묘서는 온종일 오늘 있을 꽃놀이 연회만 기다리고 있었기에, 요 이틀 동안 이 화원에 자주 들러 한가롭게 거닐었고 오늘 이른 아침에도 또 와서 어슬렁거렸다. 사방을 거닐던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곳 풍경이 이렇게나 아름다우니 이 계절에는 당연히 꽃놀이 연회를 열어야 하지. 안 그러면 이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헛되이 보내는 것 아니겠느냐?”
마치 진심으로 꽃놀이를 즐기고자 연회를 연 것처럼 말이다.
“측비 마마.”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춘산이 걸어왔다.
“초대한 손님들이 들어오고 계십니다. 지금 수화문에서 내리고 계세요!”
지금 사람들이 자신을 보러 왔다고 하니 주묘서는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충동을 꾹꾹 억누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우리는 일단 돌아갔다가 사람들이 모두 와서 어느 정도 놀았다 싶으면 그때 오자꾸나. 녹지야, 넌 시녀들에게 손님들을 잘 대접하라고 일러 두거라.”
주묘서는 그리 분부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고, 녹지는 자기 밑의 사람들을 불러 수화문으로 가서 손님들을 전부 모셔오라고 했다.
태자부는 몰려드는 손님들로 아주 시끌벅적했다.
화려하고 큰 마차 두 대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와 수화문에서 멈춰 섰고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추길은 등받이가 없는 작은 걸상을 내려놓은 후 엽연채를 부축해 줬다. 그러고는 재차 손을 뻗어 엽영교와 제민도 부축해 줬다.
진 부인과 엽미채는 다른 마차를 타고 왔다.
이때, 둥근 지붕이 달린 검은 마차가 그들 옆을 지나가더니 근처에 멈춰 섰다. 잠시 후, 안에서 맹씨와 엽이채, 장만만이 내렸다.
맹씨와 엽이채는 가까이 선 엽연채를 보더니 표정이 굳었다. 더욱이 엽이채는 여위어 뼈만 남은 얼굴로 분노와 원망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이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저 빌어먹을 계집애!’
그런데 그 순간, 주묘서와 엽연채의 사이가 줄곧 좋지 않았음이 떠올랐다. 지금 주묘서는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니 분명 교묘하게 엽연채를 괴롭힐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엽이채는 조금 흥분되고 기대가 됐다.
“연채야.”
장만만이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맹씨의 표정이 더욱 굳어 버렸다. 그녀는 도저히 이렇게 부귀하게 변한 아들의 전 정혼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만났는데 인사를 하지 않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다 떠나서 어찌 됐든 간에 친척이니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맹씨는 억지미소를 지으며 엽이채와 함께 장만만의 뒤를 따라갔다.
“연채야, 오랜만이다.”
장만만은 힘없는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엽연채가 보니 장만만은 전에 비해 살이 쏙 빠져 있었다. 원래는 통통했던 얼굴이 지금은 바짝 야위어 있었지만, 얼굴 골격 자체가 크기 때문에 살이 밭았다 해도 갸름한 계란형이 되지는 못했다.
“언니까지 초대한 거예요?”
엽연채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정말이지 주묘서는 너무도 뻔뻔했다. 장만만 역시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안 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했지!”
이렇게 끼어든 맹씨는 낯빛이 새파랬다.
“내가 만만이가 몸이 안 좋다고 하니 기어코 가서 들여다봐야겠다고 했네. 숨으려 해도 숨을 수도 없었지. 진서후 부인의 시누이는 머리가 어떻게 좀 되기라도 한 건지. 진서후 부인도 시누이 단속을 좀 해야겠네.”
그녀는 원망이 섞인 말투로 마지막 말을 꺼냈다. 마치 엽연채가 다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처럼 들리게 말이다.
엽연채는 맹씨가 은근히 비꼬듯이 말하자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엽이채가 선수를 쳤다.
“어머님, 이 일은 큰언니를 탓할 수 없습니다.”
엽이채는 엽연채를 보더니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큰언니가 지금 아무리 부귀를 누리게 되었어도 어쨌든 서자의 아내입니다. 그에 반해 주 측비는 정실의 소생이죠. 위로 친어머니와 친오라버니 내외가 있는데 어디 큰언니가 단속할 순서가 오겠습니까? 그러니 큰언니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서자’라는 단어에 잔뜩 힘을 주며 이야기했다.
저번 일이 있은 후, 엽이채와 맹씨의 고부 관계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오늘 맹씨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여식이 주묘서에게 업신여김을 당해 불쾌하던 차에 엽연채의 이런 부귀한 모습을 보니 더욱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지금 엽이채가 은근히 엽연채를 깔아뭉개는 말을 꺼내자 맹씨는 기분이 조금 상쾌해지고 엽이채와도 호흡이 척척 맞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