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1화
장찬과 맹씨 부부가 고개를 들어 보니 비단옷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여종이 환하게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확실히 태자부 사람의 티가 났다.
“장씨 가문 노태야, 노야, 부인을 뵈옵니다. 호호호.”
녹지는 자리에 많은 사람이 있는 걸 보고도 움츠러들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맹씨는 녹지의 낯이 좀 익다 싶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단박에 떠오르지는 않았다. 일 년 넘게 왕래를 하면서 맹씨는 자연히 주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을 익혔지만 주씨 가문 여종들을 전부 다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맹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 어떤 첩자를 보내신 건지 모르겠구나.”
“태자 전하께서 장씨 가문에 첩자를 보내신 게 아닙니다. 측비 마마께서 보내신 겁니다.”
녹지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첩자를 꺼냈다. 옆에 있던 어린 여종이 그 첩자를 건네받아 맹씨에게 다가섰다.
맹씨는 녹지가 ‘측비’라는 말을 꺼내자 표정이 확 굳었다. 첩자를 열어 보니 과연 주묘서가 보낸 초대장이었다.
맹씨는 속이 한층 뒤집어졌으나 겉으로는 허허 웃더니 이렇게만 말했다.
“주 측비 마마께서 보내신 거였구나.”
“저희 측비 마마께서 사흘 후에 꽃놀이 연회를 여실 겁니다. 그러니 부인, 식솔들 모두와 함께 오셔요. 꼭 오셔야 합니다. 귀찮다고 안 오시면 안 됩니다.”
녹지가 거듭 강조하자 맹씨는 눈빛이 어두워졌다. 자신들과 주묘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무슨 꽃구경을 하라고 부른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주묘서는 태자 측비이니 그 체면을 깎기는 곤란했다.
맹씨는 미소를 짓더니 응하겠노라 대꾸했다.
“그런 거였구먼. 마마께서 꽃놀이 연회를 여신다고 하니 크게 기대가 되는구나. 그날 꼭 제때에 참석하겠다.”
“그리해 주신다면 더욱 좋죠.”
녹지는 고개를 끄덕였고 바쁘지도 않은지 이 말도 꺼냈다.
“저희 측비 마마께서 장씨 가문을 정말 아끼십니다. 부인들뿐만 아니라 장씨 가문 대소저도 초대하셨죠.”
맹씨는 녹지가 장만만을 콕 집어 오라고 하자 표정이 살짝 차가워졌고 장찬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태자부와 ‘태자 측비’라는 단어는 장만만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역린逆鱗이자 악몽이었다. 그러니 지금 장만만에게 태자부로 가서 꽃놀이를 즐기라는 건 그녀의 가슴에 칼을 꽂는 일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속으로 크게 분노한 맹씨는 헛웃음을 치며 거절했다.
“우리도 측비 마마께서 베푸는 꽃놀이 연회가 당연히 기대된다. 하지만 만만이는… 미안하지만 요 며칠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의원이 외출하면 안 된다고 했다.”
녹지는 그녀가 거절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만만이 오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장씨 가문 사람들을 초대한 건 태자 측비 후보였지만 지금은 실패자가 되어 버린 장만만이 태자부에 와서 주묘서의 잘나가는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녹지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을 받았다.
“그런가요? 장 소저께서 편찮으셨군요. 그럼 이 노비가 찾아뵈어야겠네요. 저희 측비 마마께서 장 소저가 마음에 든다 하셨거든요.”
장씨 가문 사람들은 전부 화가 치밀었고 장찬의 표정은 하도 음침하고 차가워 소름이 확 끼칠 정도였다.
녹지도 당연히 장찬의 표정을 봤다. 그녀는 좀 움찔했지만 금세 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봤자 3품 관원에 불과한 주제에! 우리 측비 마마는 정2품 측비이시고 부군은 어엿한 태자 전하이시다! 대제에서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가장 존귀한 분이시지.’
맹씨는 녹지의 오만방자한 언행에 화가 나 가슴이 벌렁거렸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묘서는 반드시 장만만이 와야 한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사람을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참석하도록 하겠다!”
이때, 누군가의 싸늘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장찬이었다.
녹지도 장찬의 호통에 놀랐지만 측비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또 그렇게 그가 무섭지는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날 장 소저께서 타고 오실 마차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녹지는 그제야 아주 흡족해하며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녹지의 뒷모습이 밖으로 사라지자 맹씨는 낯빛이 확 어두워졌다. 그녀는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는데 두 눈에 핏발이 다 섰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장찬에게 말했다.
“아버님…….”
“됐다! 우리가 이 정도 도량도 없을 정도로 옹졸하다는 말이냐?”
장찬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됐으니 너희들은 돌아가 보거라. 만만이의 혼사는 나도 계획이 있다.”
맹씨와 장굉은 대답을 하고서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부부의 뒷모습이 문 입구에서 사라지자 장찬은 들고 있던 백자 찻잔을 홱 집어 던졌다. 찻잔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장찬은 장만만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려 봤다.
원래 태자는 장만만을 측비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백여언의 미색을 탐내 약속을 깨 버렸다. 뭐 약속을 깬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지만 그는 혼자만 쏙 빠져나가기 위해 장씨 가문의 평판을 망가뜨렸다.
연초에는 태자부의 백 측비가 찾아와 업신여기더니 이젠 태자부의 주 측비가 찾아와 자신들을 업신여겼다.
장씨 가문이 태자의 눈에는 그렇게 가치 없는 존재로 보인다는 말인가?
* * *
장씨 가문을 나온 녹지는 이번엔 주씨 가문과 진씨 가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 밖에도 알고 지내는 가문을 전부 들러 첩자를 건네며 꼭 태자부의 연회에 참석하라고 전했다.
이 소식은 금세 궁으로 전해졌다. 정 황후는 주묘서가 태자부로 들어온 지 이틀 만에 꽃놀이 연회를 연다는 말에 놀라서 얼이 빠졌다가, 금세 낯빛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모두 수줍어하는 사람을 새색시로 표현하곤 한다. 그건 새색시들이 모두 수줍어하며 사람들이 쳐다보면 얼굴을 붉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갓 혼인한 새색시인 주묘서가 혼인한 지 이틀 만에 꽃놀이 연회를 열겠다며 법석을 떨다니, 그녀는 ‘조신’이라는 글자를 어떻게 쓰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녀는 항상 평범한 사람들과는 이리도 다른 것인가.
정 황후는 주묘서가 벌이는 연회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오늘 아침에 자신이 말 한마디 한 것뿐인데 주묘서가 태자의 품에 기대어 은근히 사람을 모함했던 일이 절로 떠올랐다. 정 황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정 황후는 온몸을 부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주묘서가 공연히 소란을 피우는 건 아니겠지?”
사 마마도 주묘서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입으로는 제 주인을 달랬다.
“마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오해가 있을 수도 있사옵니다.”
정 황후는 말문이 막혀 입술을 맞붙였다. 아무 말도 더 꺼내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를 측비로 들였으니 뭘 어쩔 수 있겠는가?
“마마, 아니면 가서 측비 마마께 꽃놀이 연회 같은 건 열지 말라고 하는 건 어떠신지요?”
사 마마가 말했다.
“주묘서가 이미 곳곳에 첩자를 보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취소하겠다고 하면 태자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거 아니겠는가?”
정 황후는 그리 말하며 조금 가소롭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래 봤자 꽃놀이 연회에 불과하다. 뭐 대단한 일도 아니니 제 뜻대로 하게 두거라.”
그녀는 그리 말하며 숨을 크게 내쉬고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슴이 좀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구나.”
사 마마도 오른쪽 눈꺼풀을 계속해서 푸르르 떨었고 그녀는 얼른 정 황후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우선 침실로 돌아가 좀 쉬십시오. 아니면 의정醫正을 불러올까요?”
정 황후는 손사래를 쳤다.
* * *
주묘서가 아는 가문은 전부 주묘서의 첩자를 받았고, 사흘 후 첩자를 받은 사람들은 잇달아 문을 나섰다.
이날 아침이 밝자마자 엽연채도 추길과 혜연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혀졌고, 둘은 그녀의 머리를 빗었다.
“마님, 진씨 가문 부인 등이 오셨습니다.”
밖에서 청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는 그 말을 듣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고모 일행이 오셨구나. 추길아, 넌 어서 머리를 만져 주거라. 청유와 백수 너희들은 밖으로 나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렴. 고모와 함께 아침을 들 것이다.”
추길과 청유 등은 얼른 대답했다. 추길은 머리단장을 서둘렀고 혜연은 옷을 골랐으며 청유와 백수는 밥상을 차리러 갔다. 또 매화와 소월은 사람들을 맞이하러 갔다.
잠시 후, 엽연채의 치장이 끝나자 때마침 밖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는 금줄 세공을 한 나비 모양 머리 장식을 만지며 소청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진 부인이 엽영교를 직접 부축하며 문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고 제민도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이어 연두색 옷을 입은 작은 체구의 여인도 그 뒤를 쫓아왔는데 바로 엽미채였다.
엽연채는 엽미채를 보더니 표정이 굳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엽연채는 엽미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마저도 놓아주지 않은 거니?”
엽영교와 제민 등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엽미채만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 말인즉 주묘서가 자신의 새로운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까지 불렀다는 건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했다.
자신과 주묘서는 말 한마디조차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주묘서는 본인이 잘나가는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까지 부른 것이었다.
“자, 우리 우선 식사부터 해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권하고는 엽영교를 부축해 함께 소청으로 들어갔다.
어제 주묘서의 첩자를 받은 엽영교는 바로 엽연채에게 서신을 보내 우선 이곳에서 모이자고 했다. 그래서 아침에 간단히 요기만 하고 곧장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임산부이니 배가 자주 고팠다.
일행은 소청으로 들어가 녹나무 탁자에 둘러앉았다. 청유와 백수는 커다란 찬합을 들고 있었고 추길은 안에 든 간식거리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을 하나하나 탁자 위에 차려 놓았다.
탕포湯包(물기나 기름기가 많아 국물 상태처럼 된 소가 들어간 만두), 간증소매干蒸燒賣(찐만두의 한 종류)와 새콤달콤한 간식거리, 우유도 준비되어 있었다. 다 임산부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
접시를 다 내려 둔 추길은 임신한 티가 나는 엽영교의 배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곧 있으면 회임한 지 5개월이시죠.”
“그래.”
엽영교 역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제 움직이기도 한단다.”
추길은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 마님은 언제 회임하실지 모르겠어요.”
엽연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추길을 쏘아보았다.
“그런 말은 뭣 하러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