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0화
한참이 지나서야 태자비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운을 뗐다.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뭘 어떡할 수 있겠느냐? 일단은 참아야지.”
요 노부인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이리 말했고, 요 부인도 옅은 한숨을 쉬며 동조했다.
“지금 그 주운환이라는 자가 불세지공을 세워 황제 폐하께서 크게 총애하십니다. 게다가 백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으니 지금으로서는 그저 그자의 칼끝을 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태자비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머리를 돌렸다.
“오라버니 쪽에서는 아직 좋은 소식이 없나요?”
태자비의 오라비는 바로 요리였다. 연초에 은정랑의 호적 일로 관직을 빼앗긴 그는 이후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며 아직까지도 복직되지 못했다.
원래 요양성은 태자에게 요리의 복직을 도와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주운환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고 주묘서가 태자의 측비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태자는 주운환이라는 조력자를 얻게 되면서 마음이 전부 주묘서와 주운환 쪽에 기울었으니, 어디 요리의 복직을 위해 계획을 세울 겨를이 있겠는가? 이제 태자가 아닌 다른 인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자리에는 이미 다른 사람을 앉혔다.”
요 노부인은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전보다 한 단계 낮은 직위를 얻게 되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느냐?”
이 때문에 요리는 당장은 그저 집에서 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자비도 안색이 확 변하더니 이렇게 분을 표출했다.
“어떻게 일만 있다 하면 다 주씨 가문인 건지, 원!”
그 말투에서 분노와 원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요리의 자리에 대신 앉은 사람은 바로 진무였다. 그 진무의 아들 진지항이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 엽영교인데 그녀는 엽연채의 친척이자 주운환의 친척이었다. 그러니 다들 한통속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 태자부로 시집와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사람 또한 주운환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들의 면면을 떠올리자 태자비는 분통이 터져 하마터면 피를 쏟을 뻔했고 주씨 가문에 깊은 혐오를 느꼈다.
“지금은 그자를 피할 수밖에 없다. 우선 시간이 좀 흐른 후에 다시 계획을 세우자꾸나. 말만 해서는 아무 쓸모도 없다. 가장 중요한 건 어서 적자를 낳는 것이다.”
요 노부인은 태자비에게 몇 마디를 더 건네며 그녀를 달랜 후 태자부로 돌려보냈고 금슬은 요씨 가문에 머물며 상처를 치료했다.
그날, 요양성은 조금 늦게 집에 돌아왔고 태자비가 들렀었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난감하면서도 무력한 표정을 슬쩍 내비쳤다. 가족들은 태자비가 지금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전부 자신 때문임을, 자신이 자초한 일임을 모르고 있었다.
애당초 자신이 주운환을 겨냥하여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에게 밀서를 보내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런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풍씨 가문은 그 지경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풍 측비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풍 측비가 죽지 않았다면 측비 자리도 비지 않았을 테니 당연히 주묘서가 태자부로 들어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설령 태자가 주운환을 끌어들일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손을 썼을 테니, 현재처럼 자기 여식에게 이런 강력한 적수를 붙여 주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이렇듯 태자에게 주운환이라는 조력자가 생기면서 요씨 가문은 태자에게 더욱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요양성은 후회막급이었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없으니 일단은 참고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태자와 주묘서는 황궁을 나와 마차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주묘서는 그의 팔짱을 끼더니 이렇게 말했다.
“전하, 어제 저희 혼례식이 아주 떠들썩했다고 하는데 저는 보지 못했잖습니까. 그래서 며칠 뒤에 태자부에서 추국연秋菊宴을 열어 가족과 친척, 벗들을 초대해 함께 즐기고 싶어요.”
“이런 사소한 일은 태자비와 이야기한 뒤 사람을 시켜 준비하게 하면 된다.”
태자가 웃으며 허락하자 주묘서는 더욱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황송하옵나이다. 전하!”
태자와 주묘서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태자비도 이미 귀가한 후였다.
주묘서는 자신의 처소로 향해 녹지를 불렀다. 태자비를 찾아가 그녀에게 추국연을 열 거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이미 태자의 허락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하라고 했다.
녹지를 마주한 태자비는 화가 나 눈을 부릅떴지만 동의하지 않을 다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회를 허락한 후에 아프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태자도 오늘 일이 너무 과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시켜 태자비에게 보약을 좀 보냈고 그런 후 주묘서의 처소로 걸음해 그녀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녹지와 춘산은 태자부의 추국연 첩자를 만들었고 이어 여러 가문으로 첩자를 보냈다.
엽연채는 집에서 귀비의에 엎드려 화본을 보고 있었고 혜연과 청유는 맞은편의 권의에 앉아 수를 놓고 있었다.
이때, 추길이 황급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님, 녹지가 왔습니다.”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뜨뜻미지근하게 말했다.
“아. 안으로 들이거라.”
잠시 후, 녹지가 추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녹지는 득의만면한 얼굴로 엽연채에게 인사를 드렸다.
“마님을 뵈옵니다.”
“무슨 일이냐?”
엽연채는 반투명한 둥글부채를 들고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어머님께서 무슨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느냐?”
녹지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좀 쌀쌀맞아 보였는데, 지금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인지 그 느낌이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께서는 모르시는군요. 전 이제 주인마님 곁에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인마님께서 저를 태자부로 보내 측비 마마의 시중을 들게 하셨습니다.”
엽연채는 말없이 입꼬리만 삐죽거렸고, 녹지가 이어서 말했다.
“전… 아니지, 이젠 스스로를 노비奴婢(상전으로 황실 사람을 모시는 이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라고 불러야 하죠. 아무래도 저희 태자부는 황가皇家이니 당연히 규율도 허접스러운 집안과는 비교가 될 수 없죠. 하하하하.”
그녀는 그리 말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엽연채는 웃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었다. 하찮은 것이 눈앞에서 날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광경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그럼 측비 마마께서 무슨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느냐?”
엽연채는 좀 가소롭다는 듯이 물었다.
“저희 마마께서 사흘 후에 태자부의 어경원御景園에서 추국연을 연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친척들과 벗들이 모두 참석하실 겁니다. 하여 마님도 오십사 전하러 왔습니다. 그날 괜히 다른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엽연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래. 가면 가는 거지, 내가 왜 안 가겠느냐?”
“오. 좋습니다. 그럼 노비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녹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두 걸음도 채 떼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는 엽연채 앞으로 걸어와 이렇게 말했다.
“참, 제 기억이 맞다면 진씨 가문 부인이 도성 북쪽에서 사시죠?”
엽연채는 입꼬리를 샐룩였다. 녹지가 말한 진씨 가문 부인은 바로 엽영교일 것이다. 엽연채는 한발 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하하. 잘됐네요. 잠시 후에 주씨 가문으로 첩자를 전달하러 갈 건데 가는 김에 그쪽에도 한 장 전달해야겠어요.”
녹지는 그제야 돌아서서 천천히 그곳을 떠났다.
옆에 있던 혜연과 청유는 녹지의 말에 깜짝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엽연채는 웃음을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과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보구나!”
“영교 아가씨한테까지 자랑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전 다만… 저 사람의 득의양양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역겹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거기다 마님께서 안 오실까 봐 노심초사하더군요.”
옆에 있던 청유가 이렇게 한마디 거들었다.
“넌 아마 모르겠구나.”
엽연채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다독였다.
“저것들이 저렇게 과시할 때마다 결말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단다.”
녹지는 진서후부를 나온 후 곳곳에 첩자를 전달하러 갔다.
그녀가 두 번째로 간 곳은 장씨 가문이었다.
녹지가 장씨 가문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은 그녀가 태자부 사람임을 바로 알아봤고 한 어멈이 얼른 그녀를 맞이하며 집 안으로 들였다.
옆에 있던 어린 여종은 한발 먼저 주인에게 황급히 돌아가 이 사실을 아뢰었다.
그 시각, 맹씨는 자신의 처소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장굉과 함께 장찬의 처소에서 장만만의 혼사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맹씨가 안주인이라지만 아이의 혼사는 그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일은 늘 장찬의 뜻대로 결정되었다.
“어제 매파 고씨가 집에 방문하여 제게 몇몇 가문을 소개해 줬는데 살펴보니 모두 만족스러웠습니다.”
맹씨는 그리 말하며 장찬을 쳐다봤다.
“영안후부의 넷째 공자와 오씨 가문의 둘째 공자인데 둘 다 용모가 뛰어나고 성취욕도 강한 사내들입니다.”
상석의 장찬은 희끗희끗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놔두거라. 좀 더 생각해 보마.”
“아버님.”
맹씨는 버들잎 모양의 고운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재촉했다.
“만만이는 이미 열여덟 살입니다. 더 늦춰서는 아니 됩니다.”
“됐으니 그만하거라. 나도 다 생각이 있다. 내가 만만이 혼사를 소홀히 하겠느냐.”
장찬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한마디 보탰다.
“내 생각이 언제 틀린 적 있더냐?”
맹씨는 표정이 굳어졌고 그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장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버지 말씀이 맞소. 그러니 아버지 뜻에 따릅시다. 박원이를 보시오. 그때 아버지 말씀을 따랐다면… 에휴, 그만합시다.”
맹씨는 순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장박원과 엽이채가 사랑의 도피를 했다가 돌아왔을 때, 장찬은 엽이채를 단호히 반대하며 꼭 엽연채여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장박원이 끝까지 고집을 부려 엽이채를 선택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이때, 어린 여종이 안으로 뛰어 들어와 고했다.
“노태야, 마님. 태자부에서 마님께 첩자를 보냈습니다. 가 보시지요.”
장찬과 맹씨 부부는 어리둥절했다.
“태자부?”
맹씨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태자부라는 세 글자를 듣자 속에서 구역질이 다 났다.
장만만은 원래 태자 측비 후보였는데 결국 태자부와 인연이 닿지 않았고, 심지어 평판까지 바닥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장만만은 이로 인해 사람이 완전히 변해 버렸고 아직까지도 충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데려오면 된다.”
“예.”
장찬이 옅은 한숨을 쉬며 대꾸하자 여종은 대답한 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녹지를 데리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