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9화
주묘서는 그 말에 작게 감탄했다.
“연회를 연다고?”
“예!”
녹지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측비 마마의 이름으로 여러 가문의 젊은 부인들이나 소저들에게 첩자를 보내 태자부에 와서 화연에 참석하라고 초대하는 겁니다.”
“그게… 내가 그래도 되는 건가?”
주묘서는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왜 안 되겠습니까? 측비 마마는 이제 태자 전하의 측비이십니다. 조그만 연회를 여는 건 사소한 일에 불과합니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주묘서는 생각할수록 흥분되었다. 이날 이때까지 화연 같은 건 오직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사람들만이 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공주나 황후, 왕비 같은 사람들만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도 이미 그런 위치에 오른 것이다. 여러 가문에 첩자를 보내 사람들을 태자부로 초대해 화연을 열 수 있었다.
“좋다. 그럼 녹지 네가 가서 준비하거라.”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귀비의로 걸어가 나른하게 드러누웠다.
그녀가 누워서 쉰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시녀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측비 마마, 마차가 준비되었으니 수화문으로 가시지요.”
궁에 들어가 황후를 알현해야 된다는 뜻이었다.
“그래.”
주묘서는 내키지 않는 어투로 그리 대꾸하고는 얼굴도 들지 않고 물었다.
“전하께서는?”
“태자 전하는 아직 서재에 계신데 무슨 일을 의논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태자 전하께 사람을 보냈으니 곧 수화문에 도착하실 겁니다. 마마께서도 준비하시지요.”
이 말에 주묘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녹지와 춘산은 얼른 주묘서를 일으켜 옷매무새를 고친 후 바로 수화문으로 향했다. 문 입구를 나서자 태자와 마주쳤고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와 마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시간이 좀 흘러 마차는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마차가 동화문에서 멈춰 서자 커다란 가마가 다가왔고 주묘서와 태자는 함께 가마에 오른 후 봉의궁으로 향했다.
* * *
그 시각 봉의궁.
귀비의에 앉아 있는 정 황후는 하좌의 궁녀가 태자부 일에 대해 보고하는 걸 듣고 있었다. 수척한 얼굴의 어린 궁녀가 정 황후 앞에 선 채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른 아침에 금슬 언니가 매를 맞은 후 태자부에서 쫓겨났다고 하옵니다.”
듣고 있던 정 황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꿈틀거렸다.
‘태자부에 들어온 지 겨우 하루 만에 그런 소란을 일으켰다는 말인가?’
정 황후는 저도 모르게 서씨 가문 다섯 식구가 목매달아 죽은 일이 또다시 떠올랐다.
“태자 전하와 주 측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그들의 도착을 알리는 궁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 황후가 입술을 약간 오그리며 고개를 들어 보니 태자와 주묘서가 함께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짙은 남색 망포를 입고 있는 태자는 온화하고 품위 있어 보였고, 대금식 수홍색 상의와 치마를 입은 주묘서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 다가와 정 황후에게 큰절을 올렸다.
“어마마마를 뵈옵니다.”
“그래.”
정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부축해 주려는 시늉을 하자 두 사람은 얼른 자리에 똑바로 섰다.
정 황후는 주묘서를 바라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이렇게 물었다.
“오늘 태자비에게 차를 올릴 때 측비가 손을 데었다고? 괜찮으냐?”
주묘서는 얼른 태자의 몸에 기대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 마마… 정말로 뜨거운 차에 데었습니다.”
정 황후는 그녀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자 혐오감이 잔뜩 들어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게 무슨 반응이란 말인가? 간단히 질문 하나 했을 뿐인데, 주묘서는 태자에게 기대 시어머니가 자신을 괴롭히니 나서 달라는 기색을 보였다. 마치 자기 아들에게 자신과 맞서라고 하는 듯이 말이다.
“어마마마, 확실히 금슬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태자가 옅은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저희는 이만 아바마마와 할마마마를 뵈러 가 보겠습니다.”
정 황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주묘서는 태자에게 기대어 승리자라도 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녀는 더욱더 혐오감이 들었다. 하지만 주묘서가 주운환의 누이동생이라는 생각이 들자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황제와 태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 일은 일단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정 황후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우선 할마마마께 가 보자꾸나.”
정 황후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봉의궁을 나와 태후의 궁전으로 향했다.
정선제 등도 그곳에 있었고 태자와 주묘서는 안으로 들어가 예를 올린 후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그런 뒤 정선제는 그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들은 봉의궁으로 돌아왔고 정 황후는 공주에게 주묘서를 데리고 나가라고 해 태자만 남긴 후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태자부에 온 지 겨우 하루밖에 안 됐는데 그런 소란이 일어나다니.”
그리 말하는 정 황후의 약간 둥그스름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어마마마,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태자는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소자에게 시집오게 되었으니 당연히 속으로 좀 우쭐해할 겁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옵니다. 금슬이는 참… 소자가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사옵니다. 전에 분명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것이옵니다.”
“태자, 제대로 말을 해 보게.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었단 말인가?”
정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자 태자는 더욱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일은 말하자면 정말… 이야기가 깁니다.”
태자는 주묘서가 전에 태자부에 왔다가 쫓겨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에 주묘서를 태자부에서 쫓아낸 것은 태자의 뜻이었다. 그때는 엽연채라는 절세미인이 옆에 있었으니 비교가 되었고 태자의 마음은 온통 엽연채에게 향해 있었다.
주묘서는 엽연채에게 못되게 구는 나쁜 여인이라고 생각했으니 당연히 주묘서가 꼴도 보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엽연채는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태자는 그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주묘서는 이제 그 주씨 가문의 적장녀이고 주운환의 누이동생이니 몸값이 배로 뛰어오른 것이다. 태자도 주묘서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태자는 떠듬떠듬 우물쩍거리며 엽연채가 작년에 태자부에 와서 말린 꽃을 만들고 차를 우렸으며 주묘서도 들락날락했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그 이야기를 듣던 정 황후는 태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화가 난 그녀는 태자를 노려봤다.
‘이 얼빠진 놈! 엽연채를 어떻게 해 보려는 생각을 했다니.’
다행히도 그러지 못했으니 망정이었다. 이제 주운환이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게 됐는데 만약 그때 일이 밝혀졌다면 그를 끌어들이는 건 고사하고 그가 양왕이나 다른 사람에게 붙어 자신들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니 하늘이 보우하신 셈이었다.
“당시 금슬이가 주 측비를 태자부에서 쫓아냈었습니다. 그러니 주 측비가 속으로 앙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작은 복수를 한 겁니다. 다만 너무 조급했던 것뿐이죠.”
태자가 말을 마치자 정 황후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공연히 말썽 피우는 걸 좋아하는 아이처럼 보이더구나.”
방금 전 주묘서의 행동을 떠올려 보니 그건 첩실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이었다. 못된 짓을 하고서도 먼저 고자질을 하는 행동 말이다.
측비가 첩실이기는 하나 황실의 첩실이니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주묘서는 적장녀이니 어릴 때부터 온유하고 단정하고 바르게 키웠을 것이며 도량이 넓은 정실부인의 모습을 갖췄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첩실들이나 하는 행동을 보였다.
“여인들 간의 질투와 다툼에 불과합니다.”
태자의 이 말에 정 황후는 미간을 문지르더니 이렇게 당부했다.
“아무튼 돌아가서 그 아이를 잘 단속하거라!”
“예.”
태자는 대답한 뒤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태자가 떠나는 모습을 쳐다보며 정 황후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고, 뒤에 있던 사 마마가 그녀의 걱정을 덜어 주려 입을 뗐다.
“마마,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앙갚음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한번 소란을 피운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정 황후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기를 바랄 수밖에…….”
* * *
태자와 주묘서가 태자부를 나와 궁으로 들어간 사이, 태자비는 이 틈을 타 사람을 시켜 금슬을 데리고 함께 친정으로 향했다.
학자 가문이자 명망 높은 집안인 요씨 가문의 현 주인은 바로 요양성이었다.
요 노부인은 며느리인 요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린 여종이 뛰어와 아뢨다.
“노마님, 태자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 노부인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째서 이런 때에 왔단 말이냐?”
요 부인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제 막 새로운 측비가 태자부에 들어갔는데 아가씨께서 지금 이곳에 오셨다니…….”
요 부인은 그리 말하며 요 노부인과 눈을 맞췄다. 두 사람이 아직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여종이 문발을 걷으며 알려 왔다.
“태자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이어 몹시 어둡고 착 가라앉은 표정을 짓고 있는 태자비의 엄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냉랭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으나 요 노부인과 요 부인을 보더니 대단히 억울한 일을 당한 양 바로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 새언니.”
“아이고, 내 새끼. 어떻게 이런 때에 친정에 온 것이냐?”
요 노부인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태자비를 끌어당겼다.
“어제 주 측비가 태자부로 들어왔다지. 하지만 네가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겉으로는 내색을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침울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 태자 전하와 황후 마마께서 더욱 네게 트집을 잡으려 하시지 않겠느냐?”
태자비는 요 노부인을 부축하며 탑상으로 갔고 모녀는 자리에 앉았다.
태자비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저도 참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묘서라는 것이 정말 너무도 뻔뻔합니다.”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줬다. 요 노부인과 요 부인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요 노부인은 화가 나서 씩씩댔다.
“사람을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전에 풍 측비도 총애를 믿고 교만하게 굴기는 했지만 적어도 체면은 차렸었다. 그런데 이 주묘서라는 물건은 정말 뻔뻔하기 이를 데 없구나.”
그 말에 태자비와 요 부인은 모두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