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08화 (508/858)

제508화

태자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냐?”

태자가 얼른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주묘서는 태자의 품에 얼굴을 묻고는 이렇게 말했다.

“전하… 이 시녀가 일부러 뜨거운 차를 엎질러 제 손을 데게 만들었어요. 제게 건넬 때 일부러 제대로 잡지 않은 거예요……. 흑흑흑…….”

“이런……!”

태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측비 마마… 왜 소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시는 겁니까.”

금슬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측비가 조심하지 못해 찻잔이 뒤집어지는 걸 내가 봤네.”

상석의 태자비는 얼굴을 돌처럼 굳힌 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하나가 끝나니 또 다른 짓을 벌이고 있었다! 아주 한도 끝도 없었다.

“저 애가 그랬어요……. 손이 너무 아파요…….”

태자비가 그러거나 말거나, 주묘서는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

“전하… 정말 아파요. 너무 아파요!”

“어찌하면 좋겠느냐?”

태자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 역시 주묘서가 일부러 이랬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차는 그렇게 뜨겁지도 않았다.

하지만 주운환을 생각하자 그는 반사적으로 주묘서의 편을 들었다. 게다가 그녀 자체에도 아주 흥미를 느끼고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뜻에 따라 주려고 했다.

“태자비 마마를 곁에서 모시는 시녀가 일부러 이랬다면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고, 실수로 이랬다면 어리석은 겁니다.”

그리 말하는 주묘서의 눈빛엔 조롱기가 스쳤다.

“그러니 어떤 것이든 간에 태자비 마마를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따라서 곤장 30대를 치고 태자부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무엄하다!”

태자비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 아이는 내 시녀다. 그런데 네가 감히 쫓아내겠다는 것이냐?”

“그럼 마마의 뜻은 잘못을 저지르고 남에게 해를 입혀도 처벌받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주묘서는 조그만 얼굴을 치켜들고 무슨 대단한 도리라도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어 더없이 억울해했다.

“전 그저 측비이자 첩실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태자비 마마께서는 당연히 절 못살게 굴고 괴롭히려고 하시겠죠…….”

태자비는 대로해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목청을 높였다.

“금슬이에게 잘못이 있다면 내가 벌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애는 잘못을 하지 않았다! 금슬이가 일부러 찻잔을 엎는 걸 본 사람이 있느냐?”

태자비는 그리 말하며 백여언 등을 훑어봤다. 첩실들은 순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약속이나 한 듯 태자를 쳐다봤다.

주묘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태자에게 들러붙었다.

“전하, 소첩을 위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태자부로 들어온 지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는데 이리 괴롭힘을 당하니 이건 저희 주씨 가문을 업신여기는 것 아닙니까?”

태자는 원래부터 그녀를 떠받들어 줄 생각이 있었는데 그녀가 마침 주씨 가문을 언급하자 편을 들어 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 봤자 일개 시녀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주묘서를 달랬다.

“당연히 널 위해 나서 줄 것이다. 걱정 말거라.”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확 변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주묘서는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걸 알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첩실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도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방금 전에 태자비 마마께서 물으신 것처럼 금슬이가 일부러 찻잔을 엎는 걸 본 사람이 있습니까?”

첩실들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저희는 이곳에 서 있어서 제대로 못 봤습니다.”

그러자 주묘서는 눈물을 흘리며 이번엔 그들을 물고 늘어졌다.

“어떻게 제대로 못 볼 수가 있습니까? 태자비 마마께서 절 괴롭히시는 걸 도와주는 겁니까? 흑흑…….”

태자비는 가슴에서 통증이 다 느껴져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됐다. 내가 처리하마.”

태자는 그리 말하며 싸늘한 눈빛으로 금슬을 쓱 쳐다봤다.

“끌고 나가 곤장 30대를 치고 태자부에서 쫓아내거라.”

금슬은 낯빛이 종잇장처럼 질린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억울하다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꾹 삼켜 버렸다. 아무리 항변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눈먼 장님이 아니었다. 주묘서가 공연히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태자 역시 그 사실을 똑똑히 알면서도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니, 소리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곧 밖에서 어멈 두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금슬을 끌고 나갔다.

주묘서는 꼴사나운 모습으로 끌려가는 금슬을 쳐다보며 흥분과 쾌감이 섞인 눈빛을 보였고, 그제야 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하, 이제 신첩을 놔 주세요. 신첩은 태자비 마마께 차를 올려야 해요.”

태자는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또 다른 시녀가 차를 가져왔다. 그녀는 주묘서가 또 공연히 말썽을 피울까 봐 창백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찻잔을 건넸다.

주묘서는 이번엔 바른 자세로 무릎을 꿇고 차를 올리며 인사했다.

“태자비 마마께 차를 올립니다.”

태자비는 화가 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찻잔을 홱 가져와 들더니 입에 댄 다음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옷소매를 뿌리치고 자리를 떠났다.

태자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본디 태자비를 좋아하지 않으니 구태여 붙잡고 싶지 않은 것이다.

주묘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습으로 그곳을 떠나는 태자비를 쳐다보며 통쾌해했다.

‘쯧쯧.’

태자부로 들어온 지 하루 만에 사람들을 이 지경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이 태자부는 나 주묘서의 천하가 될 것이다!’

차를 올린 후 허리도 시큰거리지 않고 다리도 아프지 않은 주묘서는 금슬이 매질당하는 모습을 보러 갔다.

금슬은 곤장 30대를 맞았지만 그녀는 태자비의 측근이었고 태자비는 태자부 안에서 여전히 위신이 좀 있기에 곤장을 치는 사람은 그녀를 아주 살살 때렸다. 물론 그럼에도 금슬은 다 죽어 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녀는 그 상태로 수화문 밖으로 던져졌다.

이때, 오밀조밀한 꽃문양이 들어간 자줏빛이 섞인 붉은색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주묘서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는 금슬을 내려다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금슬아, 작년 일을 아직 기억하니? 네가 날 이렇게 태자부에서 쫓아냈었지. 그때 네가 이렇게 내 앞에 서서 날 내려다보며 이런 말도 했었다.

‘자신이 뭐라도 된 줄 아시나 본데, 대체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희 태자부의 상전이라도 된 줄 아십니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시게요? 앞으로 태자부에 한 걸음도 들일 생각 하지 마세요. 태자부는 추접하고 구린내 나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중상을 입은 금슬은 숨을 헐떡거렸고, 주묘서의 말에 낯빛이 더욱 새파랗게 변했다.

“그때 난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젠 네가 했던 말에 대답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난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난 이제 태자부의 상전이고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난 태자부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태자부는 내 집이 되었다. 하하하!”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한없이 의기양양한 눈빛을 보였다.

“네가 그 말을 꺼냈던 순간, 내가 그 모든 걸 너에게 돌려줄 게 운명으로 정해졌던 것이다. 이런 걸 인과응보이자 운명이라고 부르는 거지. 썩 꺼지거라! 이 비천한 것아.”

그녀는 금슬에게 욕을 내뱉은 후에 돌아서서 바깥으로 나왔다.

주묘서는 금슬이 하인들에게 끌려 나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쳐다보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처소를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시녀들과 마주쳤는데 하나같이 겁먹은 모습을 보이며 고개를 숙이고는 큰 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측비 마마를 뵈옵니다.”

주묘서는 시녀들이 더없이 공손한 표정과 태도를 보이자 기쁜 나머지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아. 이게 바로 내가 추구하던 지고지상한 사람들의 삶이지.’

주묘서는 속으로 우쭐했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오만하게 시선을 위로 한 채 냉담한 어투로 인사를 받았다.

“그래. 모두 일어나거라.”

말을 마친 주묘서는 천천히 그녀들 사이를 지나갔다.

주묘서는 고개를 돌려 시녀들의 표정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리하면 그다지 위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테니 꾹 참았다.

그녀의 뒤를 쫓던 녹지와 춘산도 우쭐거리는 기색이었다. 둘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한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면 그 딸린 식구도 권세를 얻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체득하게 된 것이다.

주묘서와 여종들은 묘언헌에 돌아오고 나서야 웃음을 터뜨렸다.

녹지가 말했다.

“전 측비 마마께서 분명 지고지상한 분이 되실 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정말 현실이 되었네요.”

“그런데 아쉬운 부분이 있구나. 엽연채와 주묘화도 이곳에서 위신이 선 내 모습을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오늘 내가 벌인 일이 그것들 귀에도 들어갈까?”

주묘서는 자신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금슬은 태자비가 가장 믿고 아끼는 시녀였다. 그래서 작년에 엽연채와 함께 태자부에 왔을 때도 금슬에게 예의를 차려 행동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금슬은 자신 때문에 곤장을 맞고 태자부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이건 그야말로 태자비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과 다름없으니, 어찌 우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은 비록 측비에 불과하지만 지금 어엿한 정실인 태자비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섰다. 이건 결단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대단한 일을 엽연채 쪽에서 모른다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주묘서는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금슬 그 하찮은 걸 이곳에 며칠 더 놔뒀을 텐데. 며칠 안에 기회가 생기면 엽연채와 주묘화를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자비의 체면을 깎았을 거다. 그럼 위엄을 더 잘 보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녹지와 춘산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춘산이 말했다.

“어쨌든 일은 이미 벌어졌습니다. 오늘 저희 모두 아주 즐거웠고 기도 펴게 됐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태자부는 도성에서 가장 지고지상한 곳이니 이곳에 관심 갖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들도 금세 알게 될 겁니다.”

주묘서는 이 말을 듣고서 속이 좀 후련해졌지만 또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좀 찜찜한 기분이 드는구나. 체면을 확 뭉개 버린 느낌은 아니란 말이지.”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총애를 받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녹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측비 마마께서 그분들을 불러 마마께서 얼마나 잘 지내는지 보여 주고 싶으시다면, 어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측비 마마, 화연花宴을 열면 어떠실지요? 엽연채 등을 전부 부르는 겁니다. 이곳에 와서 제대로 보게 해 질투를 느끼게 만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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