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07화 (507/858)

제507화

주씨 가문과 엽연채 쪽에 비해 주묘서가 있는 태자부는 확실히 시끌벅적했다.

주묘서는 동방화촉을 치르며 총애를 담뿍 받았고 태자가 더없이 부드럽게 그녀를 대하자 더욱더 의기양양해졌다.

이튿날 이른 아침, 춘산이 주묘서가 씻고 치장하는 걸 도와줬고 녹지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알렸다.

“측비 마마, 지금 정화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녹지는 진씨가 가장 신임하는 여종이라 주묘서가 출가할 때 그녀를 딸려 보냈다.

정화원에 가야 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주묘서는 가서 태자비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차를 올려야 한다는 걸 알아차리곤 기분이 확 나빠졌다.

“서야.”

이때, 부드럽고 중후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태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주묘서는 태자를 보더니 조그만 얼굴이 단박에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보드라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전하.”

태자는 이미 그녀의 뒤로 와 있었고 주묘서는 얼른 가냘픈 몸을 그의 품에 기대었다.

태자는 미인이 자신의 몸에 살포시 기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묘서는 원래도 미인인 데다가 어젯밤 막 초야를 치른 후라 태자는 그녀에게 신선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이 포실해진 그는 정다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전하, 잠시 후에 정화원에 가 봐야 해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태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따 궁으로 들어가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도 뵈어야 하니 적어도 정화원은 먼저 갔다 와야지.”

주묘서는 입을 삐죽거리며 이리 청했다.

“그렇긴 하지만… 전하, 전하께서 저와 함께 가 주세요.”

태자부로 들어오기 전에 주묘서 역시 황궁의 규율에 대해 배웠으니 태자와 태자비야말로 정식 부부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측비이니 아무리 태자부에 처음 들어왔다 하더라도 오늘은 태자와 함께 정화원으로 가면 안 되었다. 반드시 태자가 먼저 정화원으로 가서 태자비와 함께 자리에 앉아야 하고 그녀는 그 후에 안으로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래야만 의식을 치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주묘서의 요구는 무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주묘서가 꽤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주운환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으니 당연히 그녀를 떠받들어 주려고 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함께 가자꾸나.”

주묘서는 이 말을 듣더니 그제야 싱글벙글 웃었고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했다.

* * *

그 시각, 정화원.

태자비는 상석에, 그 오른쪽에는 아리따운 외모를 가진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바로 측비 백여언이었다.

하좌에는 이십 대로 보이는 여인들이 몇 명 자리했다. 이들은 태자의 서비庶妃와 지위가 높은 부인들이었다. 그리고 왼쪽엔 소녀 둘과 소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가장 큰 소녀는 열한 살쯤 되어 보였는데 태자비의 소생인 적장녀 화순 군주였다. 그 옆에는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태자 서비의 소생인 서자였다.

이들 외에도 태자에게는 딸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풍 측비가 남긴 딸이었다. 풍 측비가 죽은 후 이 아이는 몸져누웠는데 주묘서가 태자부로 시집오는 시점에 아이가 죽으면 불길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아니었다면 아이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하께서는 왜 아직도 안 오시는 게냐?”

태자비의 원래도 엄숙한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어제 주묘서가 태자부로 들어왔을 때 태자비는 자신의 처소에 머물며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대제의 규율에 따르면 측비가 시집올 때 정비나 다른 측비들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안 그러면 새로 들어온 측비가 태자부에 들어오자마자 윗사람에게 차 시중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규율을 따름으로써 정비와 다른 측비들은 넓은 도량과 관용을 베푸는 셈이었다.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주 측비 마마도 도착하셨습니다!”

때마침 밖에서 시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태자비 등은 그 말을 듣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

“뭐라? 태자 전하께서……!”

‘그 천한 계집애와 함께 왔단 말인가?’

그녀가 호통을 치기도 전에 주묘서가 태자의 팔짱을 낀 채 가녀린 몸을 이끌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주묘서는 방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고는 속으로 우쭐했다. 설령 자신이 측비라고 해도 지금 태자에게 가장 큰 총애를 받고 있으며 태자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사람이었다.

태자는 자신을 위해 규율까지 깸으로써 자신이 태자부의 처첩들 중 가장 총애받는 사람임을 보여 줬다.

‘특히 상석의 태자비는…….’

주묘서는 저도 모르게 작년 일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하좌에 엎드려 아랫사람처럼 행동해야만 했고 결국엔 꼴사나운 모습으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랬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다시 이곳에 돌아온 것이다.

과거의 자신은 무시당했지만, 현재의 자신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주묘서는 이런 생각을 하자 더욱더 의기양양했고 태자비의 얼굴을 서슴없이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처음 태자비를 봤을 때, 이런 생각도 했었다.

‘이 사람이 바로 태자비구나. 별거 없네! 저런 상판으로도 태자비가 될 수 있는데 나도 오를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왜 그때 보잘것없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말이다. 모두 운명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태자부에 속하게 될 운명이었고 태자의 총애를 받으며 결국에는 저 여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주묘서의 미소 띤 얼굴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빛났다. 그녀는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다는 듯 태자의 팔짱을 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어젯밤에 얼마나 총애를 받았는지 넌지시 내비쳤다.

태자비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더 짜증이 났고 화가 난 그녀는 온몸을 부들대며 싸늘한 눈으로 태자를 쳐다보았다.

“전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규율은…….”

“됐소! 아침부터 규율, 규율 하는데 지겹지도 않소? 일어난 후 곧장 이곳으로 왔으니 그냥 넘어갑시다!”

태자는 냉랭한 눈으로 태자비를 쓱 쳐다봤다.

태자비는 그가 주묘서를 감싸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지금 주운환이 가진 권세가 떠올랐고 또 자신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저 울분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차를 올리거라. 난 상석에 가서 앉아야 한다.”

태자는 고개를 돌려 따뜻한 목소리로 주묘서에게 말했다.

“전하…….”

“착하지.”

주묘서가 입을 빼쭉거리자 태자는 그녀의 손을 톡톡 두드리고는 태자비 옆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스스럼없이 애정 행각을 하자 태자비와 백여언 등은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태자비 뒤에 있던 석 마마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측비 마마, 태자비 마마께 차를 올리세요.”

그러자 주묘서는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네!”

그녀는 목소리를 길게 뽑으며 달갑지 않은 자신의 기분을 실컷 드러냈다.

태자비는 화가 나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고 금슬은 얼른 분홍색 부들방석을 주묘서 앞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주묘서는 무릎을 꿇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아이고’ 소리를 내며 넘어질 듯 말 듯 휘청였다. 뒤에 있던 춘산과 녹지가 얼른 뛰어나와 그녀를 부축했다.

태자비의 미간이 툭툭 불거졌다.

“왜 그러느냐? 설마 측비는 내게 머리를 조아리고 차를 올리고 싶지 않은 건가? 알겠네. 그럼 주씨 가문 대소저는 어제 태자부로 들어와 의식을 치렀다고 해도 내게 차를 올리지 않았으니 태자 측비는 아닌 것이지!”

주묘서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마, 소첩이 언제 무릎을 꿇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까? 소첩은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전하!”

그녀는 그리 말하며 또다시 태자를 쳐다봤다. 대단히 억울한 일이라도 당했단 양 말이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입꼬리를 실쭉거렸고 온몸에 닭살이 일었다.

태자도 탐탁지 않았고 주묘서가 너무 설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운환이 떠오르자 그래도 그녀를 위해 나서야겠다 싶었다.

태자가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 태자비가 한발 먼저 화가 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무릎을 꿇을 것이면 꿇으면 되지, 꿇기 전에 춤을 출 것까지 뭐가 있다고.”

태자비는 그리 말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주묘서가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신첩도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은 넘치지만, 기력이 없습니다. 무릎 꿇는 동작조차 아프니 말이죠. 정말이지… 어젯밤에…….”

그녀는 그리 말하며 교태 섞인 수줍은 표정을 지었고 태자비 등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는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저런 우라질, 누군 첫날밤을 안 치른 줄 아나!’

어디 주묘서가 말한 것처럼 그리 심하게야 했겠는가? 어떻게 초야를 치렀다고 저 지경이 되었겠느냐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방사房事(남녀가 성적 관계를 맺는 일)를 언급하다니. 수치심도 없는 걸까? 이 자리엔 어린아이들도 있는데 말이다.

“마마께 차를 올려야 하니 어서 부축하거라.”

주묘서가 말했다.

태자비 등은 두 눈을 부릅뜨고 두 여종이 좌우에서 주묘서를 부축하며 그녀가 천천히 무릎을 꿇는 모습을 지켜봤다. 무릎을 꿇을 때도 그녀는 아프고 괴로운 척하는 표정을 지었고 우쭐거리며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얼굴이 화끈거려 차마 그 모습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한쪽에 있던 어린 군주는 얼른 손을 뻗어 못 볼 꼴을 보지 않도록 어린 남동생의 눈을 가렸다.

천신만고 끝에 주묘서는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금슬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첫인사는 늘 정실부인들이 가장 질질 끌고 싶어 하는 일로, 첩실들이 비굴하게 무릎 꿇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 했다. 그런데 주묘서는 하는 짓이 너무 볼썽사나워 혐오감이 들 정도였다.

금슬은 얼른 쟁반 하나를 들고 왔고 그 위엔 청화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주묘서 앞에 그 쟁반을 갖다 놓았다.

주묘서는 그 찻잔을 들고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기막힌 장면을 연출했다. 그 찻잔이 그녀의 손에서 뒤집어지면서 주묘서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앗, 뜨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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