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03화 (503/858)

제503화

주씨 가문이 몰락하자 평왕비는 이 혼사를 원치 않았다. 갈란 군주 또한 혼인을 그다지 원치 않는 모습이었고 결국 혼사를 물리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갈란 군주는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도성 병영의 책임자인 오일의와 혼사를 맺게 되었다. 그에게 시집을 가도 충분히 명예롭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주비양은 의기소침해졌고 사람들은 모두 그게 다 그가 갈란 군주와 혼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삶은 살아가야 했기에 진씨는 계속해서 주비양의 혼처를 찾았다. 결국 강심설이 마음에 들었고 강심설은 그렇게 주비양에게 시집오게 되었다.

당시 주씨 가문 사람들은 조금 남아 있는 체면에 기대 밖을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강심설은 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갈란 군주를 만나게 되었다. 갈란 군주는 그녀를 보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과연… 날 좀 닮았네! 그래서 그 사람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저런.”

강심설은 이 말을 듣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닮았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강심설은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야 자신과 갈란 군주의 용모가 조금 닮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강심설은 갈란 군주의 신분을 몰랐었다. 나중에 물어보고 나서야 그녀가 주비양의 정혼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갈란 군주가 주비양과 혼인을 하지 않겠다 했는데, 주비양은 여전히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강심설도 갈란 군주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심설은 그녀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저 주비양이 혼인을 원한다는 건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며 부부간에 서로 격을 두고 대하면 된다는 생각만 했다. 천천히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부간에 서로 격을 두고 대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신이 누군가의 대체품이 되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갈란 군주를 닮았기 때문에 아내로 받아들였다는 말인가?

과연 주비양은 매일 넋 나간 얼굴로 앉아 있거나 서 있었고 밤낮으로 다른 여인을 생각했다. 심지어 자신을 쳐다보면서도 그 여인을 생각하니 강심설은 구역질이 왈칵 치밀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건 한 여인의 존엄이 걸린 일이었다.

하지만 뭘 어쩔 수 있겠는가. 자신에겐 이 모든 것을 바꿀 힘이 없었다.

자신은 이미 주비양의 아내이니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출신 또한 주씨 가문만 못해 사사건건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당했다.

그러니 잘 살려면 아이에게 의지하고 시어머니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강심설이 보기에 아이든 시어머니든 주비양보다는 훨씬 믿음직했다.

요즘 한창 전성기를 누리는 주씨 가문은 이미 권문세가들의 중심으로 돌아왔지만, 강심설은 여전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갈란 군주와 마주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주묘서가 출가하는 날이었다. 새언니인 자신이 모르쇠로 집 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주묘서와 진씨에게 원망을 살 게 분명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갈란 군주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리라고 어디 생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갈란 군주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아무도 없는 곳으로 왔는데 갈란 군주가 이렇게 자신을 쫓아오기까지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강심설은 잠시도 갈란 군주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갈란 군주가 그녀 앞에 와 있으니 먼저 자리를 피한다면 기가 죽어 보일 터였다. 결국 강심설은 할 수 없이 창백한 얼굴로 그곳에 서서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오신 거예요?”

“말하지 않았나. 그저 안부가 궁금한 것뿐이라고.”

갈란 군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나 때문에 그 사람이 그리 변해 버렸으니 말이네.”

이 말은 비수가 되어 강심설의 가슴에 꽂혔다. 주비양이 이 여인을 못 잊고 이 여인 때문에 매일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생각하면 강심설은 속이 다 뒤집히고 너무도 괴로웠다.

“그 사람이 그렇게 의기소침해하고 있으니 내가 참 마음이 쓰인다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마음을 넓게 가지지 못하는 건지.”

갈란 군주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났는데 여전히 날 잊지 못하고 있다니, 원.”

강심설은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이래서 연회 같은 데 참석하는 게 제일 싫었다. 매번 이렇게 굴욕을 당해야 하니 말이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빠져나간다고 해도 망신을 피할 수 없었다.

“주씨 부인, 집에 돌아가면 그 사람을 잘 타이르게. 날 잊고 더 이상 날 사모하지 말라고. 안 그러면 나도 무척 곤란하니까.”

갈란 군주는 간절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강심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부릅뜨고 있는 벌건 두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형님, 여기서 뭐 하세요?”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심설과 갈란 군주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계수나무 근처에서 붉은 치마를 입은 아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한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바로 엽연채였다.

강심설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꼴사나워 보이지 않게 얼른 눈물을 훔쳤다. 동서까지 자신을 비웃고 우습게 보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갈란 군주는 엽연채를 보고는 표정이 굳어졌으나 이내 활짝 미소를 지으며 알은체를 했다.

“진서후 부인이 아니신가? 그대도 이곳에 놀러 왔는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곳 계화가 참 아름답게 피었구려!”

하지만 엽연채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전 두 분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고 엿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제가 먼저 이곳에 와 있었는데 뜻밖에도 두 분이 제 뒤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시더군요. 그런데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 갈란 군주께 말씀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그 말에 갈란 군주의 부드럽고 고운 얼굴이 더욱 굳어졌고 눈동자는 노기로 물들었다. 강심설 앞에서는 말할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이야기인데, 지금 엽연채가 전부 들었다는 소리 아닌가.

“군주, 제가 좀 여쭙겠습니다. 저희 아주버님이 군주께 무슨 행동이라도 하셨습니까? 매일 군주께 연서戀書를 보내시나요? 아니면 매일 군주를 따라다니나요? 혹 군주의 앞을 가로막기라도 하나요?”

“그…….”

엽연채가 질문을 하나 또 하나 던질 때마다 갈란 군주의 낯빛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엽연채는 난감해하는 그녀를 보고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사납게 몰아붙였다.

“군주, 어째서 말씀이 없으십니까? 이런 일이 없으셨나 봅니다? 그럼 군주는 어떻게 저희 아주버님이 아직도 군주께 미련이 남아 있다고 단정하시는 거죠?”

갈란 군주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는 엽연채 앞에서 주비양이 자신에게 접근한 일이 없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답하지 않으면 더욱 망신을 당할 것이었다.

“그, 그 사람이… 오늘 태자부에서… 계속 날 쳐다봤네…….”

그러자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 군주께서는 뭘 기다리고 계십니까? 어서 가서 부군께 알리지 않으시고요. 오 대인께서 저희 아주버님을 잡아가 매질을 하게 하셔야죠! 오 대인이 하시기 좀 그러면 군주께서 바로 황제 폐하께 알리세요. 황제 폐하는 군주의 친조부님이 아니십니까! 분명 군주를 위해 이 일을 해결해 주실 겁니다.”

갈란 군주는 멍해졌다. 엽연채가 이렇게 나오리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순식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러겠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러지 않겠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갈란 군주는 부끄러운 나머지 성을 내며 우겼다.

“아무튼 그 사람이 사모하는 사람은 나란 말일세!”

그에 엽연채는 경멸하는 눈빛을 보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희 아주버님은 군주를 사모합니다. 됐습니까? 차라리 두 분이 다시 만나 서로를 사모하는 건 어떠세요?

군주는 여기서 전 정혼남을 생각하고 그 아내를 질투하며 다투고 계시는데, 부군께서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전 정혼남이 아직도 자신을 사모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고 그걸로 전 정혼남의 아내에게 상처를 주며 우쭐거리시는데, 부군께서는 이 사실을 아십니까?”

갈란 군주는 엽연채가 잇달아 오일의를 언급하자 낯빛이 확 변하더니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 일은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강심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이 이야기를 언급한 건 강심설은 열등감과 수치심 때문에 죽어도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꺼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군주, 저희는 다 같은 여인입니다. 다들 사는 게 녹록지 않은데 굳이 이렇게 서로를 괴롭혀야 합니까?”

엽연채는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오늘 일은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집으로 돌아가신 후에는 평안하게 지내세요!”

갈란 군주는 핏기 없는 얼굴로 손수건을 홱 뿌리치더니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강심설은 화를 참는 갈란 군주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속이 좀 후련해졌다. 하지만 엽연채를 보자 또다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자신과 동서는 전부터 사이가 좋다 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녀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실컷 비웃을 수 있겠네요!”

엽연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반문했다.

“제가 왜 형님을 비웃어야 되죠? 갈란 군주는… 일부러 형님에게 상처를 주려 하는 게 분명하니 저 사람 말은 듣지 마세요.”

강심설은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저도 갈란 군주가 일부러 나에게 상처를 주려 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주비양이 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믿는 구석이 있으니 갈란 군주가 저리 겁 없이 행동하는 거죠.”

말을 마친 강심설은 수치심이 불쑥 치솟아서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엽연채는 허겁지겁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채야.”

계수나무 뒤에서 양쪽으로 큰 올림머리를 한 조그만 머리가 나타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앵기야. 계화나 계속 따자.”

엽연채는 고개를 돌리더니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계수나무 뒤로 돌아간 후 다시 계화를 꽤 많이 땄는데 남의 집 계화를 쓸어 가는 건 좀 뭣하니 두 주머니 정도만 채우고는 더는 따지 않았다.

그때쯤 손님들은 이미 식사를 마친 후여서 대부분 잠시 더 머물러 있다가 그곳을 떠났다.

위 마마가 재촉하자 조앵기는 못내 아쉬워하며 엽연채와 작별 인사를 했고 그런 뒤 위 마마에게 끌려갔다.

엽연채는 조앵기를 수화문까지 배웅해 줬고 그녀가 마차를 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추길에게 주운환이 갔는지 안 갔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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