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02화 (502/858)

제502화

엽연채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규수들과 젊은 귀부인들이 일제히 그녀를 둘러쌌다.

“어머. 진서후 부인 아닙니까?”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엽연채는 한참 동안 그들을 상대한 후에야 겨우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근처에 있는 정자로 가서 자리에 앉았는데 누군가가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연채야! 연채야!”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였다. 조앵기가 온 것이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앞에는 소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고 그 뒤로 양쪽으로 큰 올림머리를 한 사람이 그들을 빠르게 스쳐 지났다. 이내 조앵기가 무리에서 뛰어나왔다.

복숭아 꽃 문양이 들어간 붉은색 비단 적삼과 분홍색 제흉유군을 입은 그녀는 목에 팔보영락 목걸이를 걸치고, 가슴 앞에는 여러 가닥으로 땋은 붉은색 긴 띠를 둘렀는데 그 가닥이 바람에 계속 펄럭거렸다. 수를 놓은 신발에는 동해산 진주가 달려 있고 머리 위에는 양쪽으로 묶은 큰 올림머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앵기는 치마를 들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쏜살같이 달려왔다.

“오, 너도 왔구나.”

엽연채는 그녀가 외출한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 곁의 주묘화는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조앵기를 쳐다봤다.

조앵기는 정자 안으로 한달음에 뛰어 들어왔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그리 말하며 엽연채 옆에 앉더니 그녀의 팔짱을 끼고는 조그만 손을 펼쳐 보였다.

“이거 봐 봐.”

엽연채와 주묘화의 시선이 그녀의 보드라운 손바닥으로 향했다. 아주 깔끔하게 만들어진 붉은색 나비 모양 낙자가 들려 있었다.

“정말 예쁘다.”

엽연채가 싱글벙글 웃으며 칭찬을 해 주자 주묘화는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나쁘진 않지만, 그래 봐야 자신이 처음 낙자 만드는 법을 배웠을 때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원래는 몸에 걸고 싶었는데 어디다 걸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조앵기는 조그만 입을 빼쭉 내밀었다.

“옥패나 염낭에 달면 돼. 앞섶이 교차하는 옷이나 대금유군 또는 웃옷과 치마를 입을 때는 허리춤에 달면 되고.”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알려 주자 조앵기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제흉유군에는 달고 싶어도 달 곳이 없네. 난 이런 옷밖에 없어. 전하께서 다른 옷은 못 입게 하시거든.”

엽연채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조앵기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소매 안쪽에서 낙자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버들잎 모양의 담녹색 낙자이고 다른 하나는 매화 모양의 연홍색 낙자였다.

“이건 연채 네 거야.”

조앵기는 그리 말하며 매화 낙자를 엽연채에게 건넸고 다시 버들잎 낙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민이 거야.”

엽연채는 그녀가 제민의 이야기를 할 때 말투에서 싫어하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때, 시녀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식사를 하러 벽옥헌碧玉軒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엽연채는 고개를 돌려 조앵기에게 말했다.

“가자. 가서 함께 식사하자.”

“이렇게 빨리 식사를 한다고?”

조앵기는 속상했다. 식사를 한 뒤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그녀는 콧날이 시큰했고 엽연채를 쳐다보며 애원 조로 말했다.

“방금 만나서 아직 제대로 놀지도 못했잖아.”

조앵기에게 외출이 어렵다는 걸 잘 아는 엽연채는 그녀의 작은 손을 붙잡으며 다독였다.

“오늘 출가한 사람이 내 시누이라 더 빨리 올 수는 없었어.”

게다가 조앵기가 올 수 있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조앵기는 상심한 나머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이따가 식사를 마친 후에 이곳을 둘러보자.”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그녀를 달랬다. 그제야 조앵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엽연채는 조앵기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서 연회를 베푸는 벽옥헌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한편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태자는 신방으로 향했다.

신방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꾸며져 있었는데, 붉은 비단과 창화窓花든 촛불이든 간에 전부 자줏빛을 띠는 붉은색이었다.

태자가 머릿수건을 들어 올리자 주묘서의 아리따운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태자는 그 모습을 보며 깜짝 놀라 이렇게 감탄했다.

“서야. 오늘 정말 아름답구나.”

“전하.”

태자의 칭찬에 주묘서는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당연히 오늘 근사한 혼례식을 치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은 붉은색 옷을 입을 자격조차 없었고 신랑도 그녀를 맞이하러 오지 않았으며, 심지어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건넬 때도 혼자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태자부로 들어올 때도 측문으로 들어왔으며 신랑과 함께 천지 신령과 웃어른들께 인사를 드릴 수조차 없었다.

주묘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했다. 자신이 왜 측비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왜 고작 측비여야 하느냔 말이다! 분명 자기 집안의 가세가 태자비보다 낫고 태자가 사모하는 사람은 자신인데 고작 측비가 되다니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억울함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았지만, 지금 태자가 부드럽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자 그의 진심이 느껴져 기분이 좀 나아졌다.

“넌 비록 측비이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은 바로 너다.”

태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들고 또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금 풀어 자신의 머리카락과 감았다. 결발부부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전하…….”

주묘서는 크게 감동했다.

그때 태자가 또 이렇게 말했다.

“이곳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느냐?”

“뭐라고 부릅니까?”

“묘언헌妙言軒이라고 부른다. 네가 이곳에 오니 내가 특별히 이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전하께서 직접 이름을 바꾸신 거예요?”

자신은 과연 크나큰 총애를 받고 있었다. 주묘서는 그를 위해 모든 수모를 참은 게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자는 그녀를 조금 더 달래고 나서야 밖으로 나가 손님들을 접대했다.

* * *

식사를 마친 후, 엽연채는 조앵기를 데리고 슬그머니 빠져나와 태자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두 사람은 함께 백옥이 깔린 오솔길을 걸었는데 양쪽으론 수양버들이 늘어서 있었다. 날씨가 쌀쌀하긴 하지만 오늘은 햇빛이 유독 강해 나무 그늘 아래서 걷고 있으니 시원한 정도였다.

“시누이가 한 명 더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 애는 안 불러도 돼?”

조앵기의 말에 엽연채가 이리 대꾸했다.

“그 앤 밥을 천천히 먹어. 그리고 다 먹으면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으면 되지. 우린 미시에 돌아가면 되고.”

그에 조앵기가 생글거리며 말을 받았다.

“우리 저 앞 낙하호落霞湖에 가자. 거긴 원앙새도 많고 주위에 계수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거든. 가서 계화를 따자.”

“그래!”

엽연채는 문득 작년 일이 떠올랐다. 자신이 태자부에 자주 왔던 것도 꽃과 관련이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나중에 내가 말린 꽃을 만들어 향낭 안에 넣고 꿰매 줄 테니 넌 낙자를 하나 더 만들어 그 위에다 달아.”

“우와, 좋아!”

조앵기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매일매일 몸에 차고 다녀야지, 히히.”

두 사람이 수양버들 녹음이 우거진 오솔길을 나오자 널찍한 호수가 눈에 들어왔고, 정말로 저 멀리 호수 위를 헤엄치는 원앙들이 보였다. 그리고 호숫가에는 계수나무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었는데 추풍이 불자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다.

엽연채와 조앵기는 촘촘히 심어진 계수나무 앞에 앉아 계화꽃을 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향낭 안에 다 넣을 수 없을 정도로 계화를 많이 땄다. 슬슬 돌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따라오시는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엽연채는 어리둥절했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멀리 여인 둘이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누런 색깔의 전지 문양이 들어간 배자 차림에 옆으로 기운 평범한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부드럽고 얌전해 보였는데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어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겼다. 바로 강심설이었다.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 형님에게 전부터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이 너무 그늘져 있고 질투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어째서 여기 있는 걸까?’

엽연채는 강심설과 함께 있는 여인을 쳐다봤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상대편 여인은 호박색 고급 비단으로 만든 짧은 웃옷과 삼면에 금사로 수를 놓은 푸른 빛깔의 마면군을 입고 있었다. 숱이 많은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감아올려 고상함과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번도계翻刀髻(머리를 하나로 모아서 올린 모양)를 했고, 부드럽게 생긴 얼굴에선 우아함이 느껴졌다.

“어? 저 사람은 갈란 군주 아냐?”

조앵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엽연채는 눈알을 굴리더니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정선제의 손녀이자 불운하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평왕이 남긴 유일한 딸 갈란 군주였다.

갈란 군주는 지난번 주씨 가문에서 베푼 축하연에 참석했었고, 엽연채는 궁에서 베푼 연회에서도 그녀를 몇 번이나 봤지만 지금껏 깊은 교류를 가지지는 못했다.

“왜 따라오시는 겁니까?”

강심설이 또 같은 말을 꺼냈다. 그러자 갈란 군주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올림머리를 살짝 만지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안부를 묻고 싶은 것뿐이네. 비양은 잘 지내고 있는가?”

강심설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 더 물어보실 게 있으세요?”

“난… 안부가 궁금할 뿐이네.”

갈란 군주는 버들잎 모양의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사람과 나는 서로 정혼한 사이가 아니었던가. 결국 인연이 닿지 않아 부부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은 날 잊지 못했네. 날 잊었다면 자네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겠지.”

이 말은 대번에 강심설의 아픈 곳을 찔렀고 화가 난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시 최고 명문가인 주씨 가문의 세자였던 주비양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결과, 주비양은 정선제가 가장 총애하는 손녀인 갈란 군주와 정혼했다.

주씨 가문은 줄곧 황자들 간의 싸움에 끼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황실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갈란 군주는 달랐다. 평왕이 요절하면서 슬하에는 갈란 군주 한 명만 남았으니 그쪽은 황자들 간의 싸움에 낄 수가 없었다. 황제가 혼사를 맺어 줄 때 주씨 가문도 그런 연유에서 동의했다.

도성에서 가장 사랑받는 세자와 황제가 가장 아끼는 손녀가 정혼을 했으니 얼마나 잘 어울리는 짝이었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주씨 가문이 한순간에 몰락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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