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8화
그 이야기에 혜연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추길을 타박했다.
“노주는 노비의 딸이잖아. 교외에 있는 그 별장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 애 부모가 그곳에 있는데 뭣 하러 혈육이 헤어지게 해.”
추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노주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아 입을 약간 오므렸다.
“늦었으니 어서 가서 씻죠!”
주운환은 엽연채의 작은 손을 잡았다.
추길은 주운환이 노주의 일에 대해 묻지 않자 속으로 실망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주운환은 이미 엽연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엽연채는 조그만 얼굴을 들고 그를 쳐다봤다.
“피곤할 테니 부군 먼저 씻어요.”
그런데 나지막이 미소를 짓는 주운환은 생각이 좀 다른 모양이었다.
“하인들 수고롭지 않게 우리 같이 씻읍시다.”
그리 말하며 엽연채의 허리를 끌어안자 그녀의 조막만 한 얼굴이 새빨개졌다.
추길은 엽연채가 온종일 주운환에게 붙어 있는 모습을 보자 침울한 기분으로 문을 나섰다. 추길이 밖에 있는 명자나무 아래에 앉고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추길 언니.”
매화가 걸어오더니 옆에 앉으며 노주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 저희끼리 엽씨 가문에서 잘 지냈잖아요. 그러다 나중에 그런 일이 생겼고 저희는 언니와 혜연 언니와는 비교가 안 되니 별장에 갈 수밖에 없었죠. 이제 나리는 입신출세하셨고 이렇게 큰 저택도 생겼는데 설마 한 명 더 들이지 못하겠어요? 왜 노주를 불러오지 않은 걸까요.”
매화는 그리 말하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등 여종은 청유, 백수, 노주, 매화였다. 그런데 엽연채는 노주를 불러오지 않고 원래 삼등 여종이었던 소월을 이등 여종으로 올린 것이었다.
추길은 더욱 속상해져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방금 전에 혜연이가 말하지 않았니? 노주의 부모님이 그곳에서 별장을 관리하니 혈육이 헤어지게 할 수 없다고 했잖아.”
매화는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이렇게 말을 받았다.
“하지만 오씨 아저씨와 오씨 아주머니는 노주를 이곳에 보내 달라고 울고불고했잖아요.”
추길은 더욱 화가 나 그녀를 노려보며 쏘았다.
“그럼 방금 전에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이때, 낭하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니 혜연이 귤을 담은 쟁반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추길과 매화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혜연은 귤을 돌 탁자 위에 올린 후 모두를 불러모았다.
“귤 좀 먹어! 청유, 백수, 소월아, 너희들도 와.”
낭하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여종들은 그 말을 듣더니 얼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들이 함께 자리에 둘러앉자 혜연이 입을 뗐다.
“너희들이 별장으로 보내진 지 일 년 가까이 됐으니 아무래도 규율을 소홀히 여기거나 잊었을 것 같구나. 내가 다시 상기시켜 줄게.
우리는 해야 할 일만 하면 돼. 상전은 상전이다. 어떤 일이든 간에 상전이 그리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상전이 말씀하지 않으면 더 묻지 말아야 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된다. 자기 할 일만 잘하면 돼.”
혜연의 당부에 청유를 포함한 네 명의 여종은 모두 몸을 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 언니 말이 맞아요.”
그런데 추길만은 기분이 점점 더 나빠져 고개를 숙이고 입을 오므리고 있었다.
“그래. 오늘 다들 지쳤을 테니 이거 다 먹으면 돌아가서 쉬렴.”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청유 등은 귤을 먹으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이야깃거리는 전부 그들이 별장에서 지내며 겪은 우스운 일이었다.
귤을 다 먹은 그들은 너무 피곤했기에 먼저 자리를 떴고 뒤에 딸린 후조방으로 돌아가 잠이 들었다.
추길은 본채를 한 번 쳐다봤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방 안의 등은 이미 꺼져 있었다. 또 언제부터인지 방 안에서 자신들이 시중을 들어야 할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생각해 보니 부부가 한 이불을 덮은 후로 그리됐다.
전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신이나 혜연이 가서 등을 껐고 둘 중 한 명이 건넌방에서 자면서 시중을 들었다. 그런데 부부가 한 이불을 덮은 후로는 두 사람은 저녁에 거의 방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주운환은 조정에 나갈 준비를 했다.
전에 주씨 가문에서 지낼 때는 황궁에서 비교적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묘시卯時(오전 5시~7시) 일각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씻고 채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젠 집에서 궁으로 들어가 정사를 논하는 대전까지 고작 이각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주운환은 무려 반 시진이나 늦게 일어났다.
날은 이미 밝은 후였다. 잠에서 깬 엽연채는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눈을 뜨고 얇은 휘장을 걷어 올렸다. 보니 주운환은 이미 옷을 입은 상태였다.
엽연채는 얼른 일어나며 하품을 했다.
“소리에 깬 겁니까?”
주운환이 몸을 돌렸다. 이무기 문양이 들어간 검붉은 조복을 입은 그는 차분하고 중후한 멋이 있었다. 또 조복은 미끈하고 완벽한 그의 몸매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더니 달려가서 비비적거리고 싶은 마음에 침상에서 내려왔다.
“아니에요. 저도 원래 이때쯤에 일어나요.”
그리 말하며 그에게 걸어가 허리띠를 매어 줬다. 그러고는 하얗게 빛나는 조그만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매일 옷 입는 걸 도와주지 못해서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심하게 자책했다.
그들은 합방한 지 1개월쯤 됐는데, 그간 후부에 관한 여러 일을 서둘러 처리하느라 엽연채는 날마다 바쁘고 피곤했다. 그런데 주운환은 새벽 일찍 일어나니 그녀는 그가 조정에 나갈 준비를 하는 걸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었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품 안에 끌어안더니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난 부인이 푹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더 좋습니다. 날마다 당신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애지중지하고 싶군요.”
엽연채는 달콤한 기분이 들었고 헝클어져 있는 그의 머리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직 머리를 안 빗었네요.”
이때, 문이 열리더니 추길과 혜연이 안으로 들어왔다. 혜연의 손에는 놋쇠 대야가 들려 있었는데 둘은 엽연채의 시중을 들려고 들어온 것이었다.
추길은 주운환이 아직 머리를 빗지 않은 걸 보더니 두 눈을 반짝였다.
“셋째 나리. 제가 머리 빗는 걸 도와드릴게요!”
“필요 없다.”
주운환이 바로 거절하자 추길은 입을 오므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마님은 머리를 잘 못 빗으세요.”
주운환은 고개를 돌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안 빗어 줘도 된다.”
그리 말하고는 탁자로 가서 머리끈을 들더니 스스로 긴 머리칼의 절반을 손쉽게 묶었다. 그러고는 금관을 쓴 다음 백옥 동곳으로 고정했다. 그에게서는 자연스레 귀티가 흘렀고 거기에 검붉은 망포를 입고 있으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화려함과 존귀함이 느껴졌다. 이 훌륭한 풍채를 보고 있으니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추길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전에 처음 그를 봤을 땐 주운환이 더없이 수려한 외모를 가졌고 환한 빛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외모만 출중할 뿐 결국 서자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지녀야 하는 모습이라고 느껴졌다. 정상에 서서 남들을 내려다보는 존귀한 모습 말이다.
“어…….”
엽연채는 그가 스스로 머리 모양을 쉬이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순간 인생에 대한 약간의 회의가 들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주운환은 놀라서 어리둥절해하는 그녀를 보자 마음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보드라운 작은 얼굴을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연채는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타고난 거예요!”
엽연채는 뾰로통하게 대꾸하고는 재차 물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그냥 한 겁니다. 여태 어떻게 했다고 생각한 겁니까?”
주운환은 대수롭잖게 대답했으나 엽연채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지금껏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이 그의 머리를 만져 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주운환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내 곁에는 여양과 여한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설마 그 애들이 내 머리를 만져 줬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그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엽연채는 그 장면을 상상해 봤다. 주운환이 구리거울 앞에 앉아 있고 여양이 빗을 들고 뒤에 서서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그의 머리를 빗겨 주는 모습을 말이다. 그러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고 그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기괴한 장면일 것이다.
“이만 가겠습니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갑자기 그녀의 조그만 턱을 잡고 위로 들어 올리더니 격한 입맞춤을 선사했다.
엽연채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화려한 옷을 입은 그는 우아한 풍모를 뽐내며 빠르게 그곳을 떠나가고 있었다.
“부군…….”
엽연채는 창가로 뛰어가 창틀에 기대어 호리호리한 그의 뒷모습이 한 걸음씩 대문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그는 걸어가다가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쓱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엽연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얼른 그를 향해 손짓을 했고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다시 그곳을 떠났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애정 행각에 혜연은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론 셋째 나리께서 출타하신 후에 들어오자!”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방금 전 주운환이 두 사람 앞에서 자신에게 입맞춤을 한 걸 떠올리니 몹시 곤혹스러웠다.
“마님, 어서 씻으세요. 안 그러면 물이 다 식을 거예요.”
혜연은 미소를 지으며 놋쇠 쟁반을 한쪽에 있는 녹나무 세검가자 위에 올려놨다.
엽연채는 그쪽으로 걸어가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한 다음 구리 거울 앞에 앉았다. 추길이 머리를 빗겨 주는 동안, 엽연채는 구리 거울을 쳐다보며 말했다.
“부군이 매일 혼자서 머리를 손질하는 것도 좀 그러니 나도 머리 손질하는 법을 배워야겠어.”
“예.”
혜연은 옷장에서 엽연채의 옷을 꺼내며 미소 띤 얼굴로 동조했다.
“그러시면 마님께서 매일 나리 머리를 만져 드릴 수 있겠네요.”
하지만 엽연채 뒤에 서 있던 추길은 입을 약간 종그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님은 주인이신데 어째서 그런 일을 하시려고요? 사람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내일부터 제가 나리 머리를 만져 드릴게요.”
“됐어.”
엽연채는 기분이 좀 언짢아졌다.
“내가 배워서 부군의 머리를 해 드릴래. 넌 어서 간단하게 트레머리나 해 주거라! 혜연아, 나 머리 다 하면 여기 앉아 보렴. 내가 네 머리를 만져 볼 테니까.”
“예.”
혜연은 그녀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러나 추길은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엽연채가 자기 것에 너무 욕심을 내 다른 사람은 손끝 하나 못 대게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