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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497화 (497/858)

제497화

운연거는 좌우에 모두 처소가 딸려 있었다. 왼쪽의 처소는 녹죽거綠竹居라고 불렸는데 주운환이 주씨 가문에서 지낼 때 잠시 머물렀던 처소와 같은 이름이었다. 이곳은 주운환이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 쓰도록 준비해 둔 서재였다.

엽연채는 방 안에 켜진 등불을 보더니 주운환이 돌아왔음을 알고는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부군!”

뒤에 있던 추길이 냉큼 그녀를 말렸다.

“쉿, 목소리를 낮추세요. 셋째 나리께서 주무시고 계신 것 같아요.”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뿐사뿐 안으로 들어가 보니 따뜻한 불빛이 가득했다. 서차간으로 걸어가 보니 해당화 절지 문양이 들어간 기다란 자단목 탑상에 주운환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비 온 뒤 막 갠 듯한 푸른 빛깔의 도포를 입고 있는 그는 얼굴을 안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긴 머리칼이 베개 위에 흩어져 있었고, 그의 얼굴에도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꽤 많이 붙어 얼굴을 절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달린 벽옥 장신구는 그가 살짝 몸을 굽히자 아래로 흘러내렸다.

엽연채가 살금살금 그에게로 다가가 자리에 앉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늦었군요.”

“어? 깨어 있었어요?”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주운환이 얼굴을 돌렸다. 그는 졸음이 채 가시지 않아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녀를 쳐다봤는데, 풀어진 듯한 그의 몽롱한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는 엽연채의 손을 잡아끌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엽연채는 ‘아유, 참!’ 하고는 까르르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기대었다.

“부군?”

“예?”

주운환이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어 있는 그녀의 조그만 머리를 어루만지며 되물었다.

“왜 부릅니까?”

“그냥요. 그냥 불러보면 안 돼요?”

“됩니다.”

주운환은 나지막이 미소를 짓고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또다시 입맞춤을 했다.

“읍…….”

엽연채는 손을 뻗어 그를 밀었다.

“입맞춤 좀 하면 안 됩니까?”

주운환의 이 말에 엽연채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돼요. 어? 저기 따뜻한 물이 있네요?”

한눈에 봐도 그가 세수를 할 수 있게 준비해 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엽연채는 그의 손길을 뒤로하고 그쪽으로 걸어가 단지 안의 따뜻한 물을 전부 옆에 있는 놋쇠 대야에 부었다. 그러곤 세검가자洗臉架子 위에 놓인 수건을 꺼내 물에 적신 다음 꽉 짜서 그에게 건넸다.

“여기요.”

“부인이 닦아 주십시오.”

주운환은 눈을 거슴츠레 뜬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하는 수 없이 수건을 그의 얼굴에 덮고는 힘껏 문질렀다.

“웁……! 숨이…….”

주운환은 그녀가 얼굴을 다 닦아 주자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안고 간지럽히려고 했다. 엽연채는 한바탕 웃더니 뾰로통하게 물었다.

“숨 막혔어요?”

“아뇨.”

주운환은 두 손으로 그녀의 조그만 머리를 잡고 말했다.

“내 아내는 어찌 이리 부드럽고 다정한지.”

그제야 엽연채는 만족스러운 기색을 띠더니 밖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추길아. 물을 쏟아 버리거라.”

추길은 뻣뻣하게 굳어 안으로 들어오더니 놋쇠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건 자신이 길어 온 물인데 남 좋은 일만 실컷 하지 않았는가. 그녀는 물이 든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가 물을 쏟아 버린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와 시립했다.

엽연채는 주운환의 품에 비스듬히 기대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참, 요즘 부군이 바빠서 집안 하인들을 볼 시간이 없었죠. 지금 모두 불러와 첫인사 선물로 홍포紅包를 나눠 줘요.”

“그래.”

주운환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움켜잡고 있었고 그의 신경은 온통 손에 쏠려 있었다.

“난 하인들에 대해 잘 모르니 부인이 알아서 하십시오.”

과거 주씨 가문은 가난해 하인들이 많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하인들 대부분은 진씨 모녀가 부렸다.

주종과는 집안에서 부리는 통방通房과 밖에 데리고 나가는 사동 하나가 전부였고, 주운환의 곁에는 여양, 여한 형제뿐이었다.

집안에서는 원래 주운환에게 사동을 한 명만 붙여 주려고 했지만, 여양과 여한은 친형제인지라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둘 다 주운환과 함께하겠다 고집을 피웠기에 그들은 한 사람 몫의 품삯만 받고 일했었다.

“추길아, 가서 하인들을 전부 불러와 뜰에 대기시키렴.”

“예.”

추길은 엽연채에게 대답하고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밖은 불려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해졌고 일부는 뜰에 서 있을 수가 없어 낭하나 문밖에 서 있었다.

주운환은 엽연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 낭하에 섰다. 혜연과 추길은 엽연채보다 한 걸음 뒤에 섰고 여양과 여한은 주운환보다 한 걸음 뒤에 섰다.

엽연채가 입을 열었다.

“집이 크기는 하나 주인은 우리 두 사람밖에 없어 배치된 하인들이 많지 않아요. 이 두 사람은 등씨 아저씨와 등씨 아주머니인데 이 집안의 집사예요.”

주운환이 고개를 들어 보니 오십 대쯤 된 듯한 부부가 보였다. 부부는 얼른 주운환과 엽연채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주방 어멈 다섯 명과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 다섯 명이에요. 또 밖에서 화초를 가꾸고 처소를 청소하는 여종들이 스무 명 있고요.

문을 지키는 머슴이 여덟 명인데 이들은 경인이가 관리할 거예요. 그리고 집을 지키는 사람이 서른 명인데 이들은 여한 형제가 관리할 거고……. 또 저희 처소에서 일하는 여종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은 좀 있다가 보기로 하죠.”

“내 부인이 정말 잘 생각해 놨군요.”

주운환은 미소를 지었지만, 엽연채는 입을 삐죽 내밀며 그를 째려봤다. 그가 남들 앞에서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절로 걱정이 들었다!

“주인을 봤으면 인사를 드려야죠.”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하자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얼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후야와 마님을 뵈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위에 서 있는 엽연채와 주운환을 쳐다보더니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두 사람이 너무도 젊었기 때문이다. 보통 이 나이대 사람들은 시어머니에게 시집살이를 당하거나 공명을 얻기 위해 시험을 치거나 아버지의 인맥에 기대 올라가려고 몸부림을 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주운환은 이제 겨우 열여덟의 나이인데 이미 모든 중신들이 되고 싶어 하는 위치에 올랐다.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림으로써 작위를 받았고 황제의 총애 역시 받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주운환은 시선을 살짝 위로 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자신의 직무와 책임을 다하고 공연히 소란을 피우지 말거라. 내 손에 죽은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고, 난 아직 젊다는 사실 역시 잊지 않도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몸을 덜덜 떨더니 등을 곧추세웠다.

방금 전 하인들 중 일부는 주인이 어리다며 속으로 그를 깔보았고 그가 자신들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운환이 이렇게 경고하자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방금 전 덕과 재주를 겸비한 수려한 외모의 그를 보고는 속 빈 강정이라 자질구레한 집안일은 잘 모를 거라며 얕보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 어린 후야가 공, 그중에서도 전공으로 집안을 세운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응성에서 적을 벨 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젊고 혈기왕성하니, 까딱해서 노여움을 샀다가 그가 충동적으로 칼이라도 휘두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엽연채는 아래에 있는 하인들이 그의 말에 겁을 먹고 하나같이 낯빛이 종잇장이 된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차마 소리 내어 웃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냉담하게 아래를 향해 말했다.

“상을 주거라!”

혜연과 추길이 함께 쟁반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쟁반 위에는 복福 자를 수놓은 조그만 진홍색 비단 복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조그만 비단 주머니를 하인들에게 하나하나 나눠 줬고 모든 사람이 비단 주머니를 건네받자 엽연채는 그들을 각자의 처소로 돌려보냈다.

“이제 해산하거라.”

하인들은 감사 인사를 건넨 후 다들 자리를 떴다.

그중 일부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비단 주머니를 열어 봤는데 안에는 무려 은화 두 냥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기뻐하며 한입으로 엽연채가 통이 크다고 그녀를 칭찬했다.

이제 뜰에 남은 사람들은 운연거의 하인들뿐이었다. 그들은 두 줄로 나눠 아래에 서 있었다.

“이 사람들은 전부 처소에서 우리를 모시는 하인들입니다. 부군도 얼굴을 익히세요. 전부 제가 엽씨 가문에 있을 때 부리던 하인들인데 그간 별장에서 지내다가 이제 불러온 거예요. 교 마마만 부군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고요.”

아래에 서 있는 교 마마는 감격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주운환의 유모로, 그가 큰 후에는 주방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그가 평생 출세하는 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운환이 분발하여 전공을 세우고 분가까지 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제 엽연채가 저를 이곳으로 데려왔으니 마침내 고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추길과 혜연은 일등一等 여종이에요.”

엽연채는 이리 말한 후 아래에 한 줄로 선 여종들 넷을 쳐다보며 소개했다.

“이 사람들이 이등二等 여종이고요. 왼쪽부터 청유, 백수, 매화, 소월이에요.”

“왜 이름을 다 다르게 지은 거예요?”

주운환이 미소 띤 얼굴로 묻자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이렇게 짓는 게 좋아서요.”

보통은 여종들의 이름을 지을 때 일정한 규칙에 따랐다. 춘하추동이나 동서남북을 써서 지었는데 규칙이 있어서 기억하기 좋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러한 이름을 쓰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조금 조잡해 보이긴 했다.

그래서 엽연채는 남들과는 다르게 짓고 싶었다. 어렸을 땐 이렇게 지으면 꽤나 고상하고 멋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주운환은 조금 난처해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좋군요. 하나하나 고상하고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내 부인은 어떻게 이름도 이리 잘 지을까?”

엽연채는 그가 일부러 자신을 칭찬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아주 흐뭇했다.

“이 밑으로 청소를 하는 어린 여종 둘과 막일을 하는 어멈 둘이 있어요.”

“네, 부인이 알아서 하시지요.”

주운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추길은 아래에 있는 여종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려 한 명을 더 언급했다.

“원래는 노주라고 하는 이등 여종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그런데 별장에서 불러오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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