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95화 (495/858)

제495화

시녀들이 탁자를 다 차리자 육 측비가 웃는 낯으로 관심사를 돌렸다.

“어서들 오세요. 가을 단풍으로 시를 지어 보아요.”

신양 공주와 노왕비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린 여자애도 아니고 참.’

삶은 자질구레하고 범속한 것들로 가득한데 아직도 시를 짓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다들 그래도 그녀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 주며 밋밋한 시 한두 수를 지었다. 그런 후에는 이곳 풍경과는 지극히 동떨어진 일을 벌였다. 바로 마조馬吊를 하는 것이었다.

시를 짓던 두 탁자는 금세 마조를 하는 탁자로 변해 버렸다.

노왕비는 마조 패를 만지며 즐거운 얼굴을 했다.

“그래도 역시 이게 재미있네요.”

“맞아요.”

신양 공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엽연채와 제민만 열기를 띠고 있는 마조 탁자에 앉지 않았다. 엽연채는 한창 흥이 올라 있는 여덟 명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실쭉거렸다.

“좀 지나면 우리도 저렇게 변하겠지. 그러니 지금은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즐겨야겠어! 밖으로 나가 볼까?”

엽연채는 제민을 끌고 어호를 떠나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그런데 시녀가 줄곧 두 사람을 따르고 있었다. 엽연채는 제민에게 시녀를 떼어 놓으라고 하고 본인은 조앵기를 찾으러 갔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청석판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녀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이곳저곳을 지나 양왕부의 시냇가에 자리한 그때 그 화원에 도착했다.

주위에는 초목이 무성했고, 곳곳에는 가을에 피는 꽃이 만발했다. 그리고 전처럼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물소리를 따라 걸어가 보니 저 멀리 꽤 널찍한 시내가 보였고 분홍색 사람 형체가 시냇가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전에 조앵기가 이곳에 있는 걸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운에 맡기고 한번 와 본 건데 뜻밖에도 그녀가 정말 이곳에 있었다.

엽연채가 걸어가 보니 조앵기는 작은 솔로 거북이 한 마리를 닦고 있었다.

“앵기야.”

엽연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조앵기는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엽연채의 모습이 보이자 깜짝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연채야……!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엽연채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거북이를 씻겨 주고 있었어.”

조앵기는 코를 훌쩍이더니 그 거북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얘가 늘 물에서 떨어져서 지내. 그래서 자주 이곳으로 데려와 물에 담가 놓곤 해.”

“어……?”

엽연채는 그 거북이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이건 남생이야…….”

그러자 조앵기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무슨 차이가 있어?”

조앵기가 생각하기에 거북이는 물에서 살아야만 하는 동물이었다.

“가급적 물에 자주 담가 놓지 않는 게 제일 좋아.”

엽연채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참, 오늘 우리 집 연회에는 왜 참석하지 않은 거야?”

그녀의 질문에 조앵기의 조그만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수람 안에 가득 차 있던 낙자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가슴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져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조앵기는 엽연채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연채야…….”

“무슨 일 있는 거야?”

엽연채가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난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 연채야, 네가 날 데려가 주면 안 돼?”

조앵기는 그리 부탁하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네 곁에서 널 모시는 여종이 되어도 좋아……. 그것도 안 되면 날 팔아 버려도 괜찮아…….”

엽연채는 당연히 깜짝 놀랐다.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거야?”

조앵기는 그녀를 놓아주더니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제 낙자를 만들 수 있으니 나도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어…….”

그녀가 봤던 화본들에서 낙자를 팔면 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먹을 것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엽연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전하!”

엽연채의 입에서 ‘전하’라는 말이 나오자 조앵기는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는데 그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조앵기는 고개를 떨군 채 감히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전하.”

엽연채가 그를 향해 예를 올렸으나 양왕의 차디찬 시선은 조앵기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그를 등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새하얗고 가느다란 목의 일부분이 겉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한 걸음씩 그녀에게로 걸어가더니 커다란 손을 뻗어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잡고는 냉소를 지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느냐?”

조앵기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손이 피부에 닿자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조앵기는 몸을 돌려 그의 손을 떼어냈다. 양왕의 잘생긴 얼굴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매력적인 눈은 완벽한 곡선을 그리며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두 눈에선 매혹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분위기가 묻어났고 눈동자에선 어둡고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양왕은 붉은 입술을 살짝 위로 올리며 조롱기와 비정함이 섞여 있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묻지 않느냐?”

양왕은 못마땅하여 ‘어허’ 소리를 냈고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음랭해졌다.

“여기에… 앉아 있었는데 우연히 연채와 만나게 됐어요…….”

그녀는 방금 전에 했던 말은 감히 일언반구도 꺼내지 못했다.

엽연채는 양왕 때문에 기겁한 조앵기가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나섰다.

“전하, 왕비 마마께서는 방금 전에 저와 함께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그저 저와 함께 밖에 나가 놀고 싶다고 하신 것뿐입니다.”

겁을 먹은 조앵기는 엽연채의 뒤로 숨으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왕이 유심히 조앵기를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허락했다.

“그럼 가 보거라!”

조앵기는 그 말에 깜짝 놀랐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저… 정말 그래도 돼요?”

그녀는 놀라면서도 또 기뻐했다. 행복이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이야?

“그래.”

양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앵기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려 더욱더 그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앞으로 나와 엽연채를 잡아당겼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사옵니다.”

그러고는 조앵기를 데리고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두 사람은 잰걸음으로 그 화원을 나왔다.

양왕은 분홍색 옷을 입은 조앵기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생각하더니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다른 집으로 도망가 여종이 되고 싶다고? 심지어 팔려도 된다고? 하하!’

양왕은 붉은 입술을 위로 올리며 비정한 미소를 지었고 그의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하게 변했다.

‘내 것은 오직 나만이 버릴 수 있다! 지금껏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단 하나도 없었다!’

한편, 조앵기는 엽연채를 끌고 밖으로 뛰어나와 잠시 생각을 하더니 평정소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엽연채를 데리고 귀비의에 앉더니 허리받이 밑에서 실을 꺼낸 다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널 주려고 만든 걸… 전하가 화로에 던져 버렸어. 지금 다시 하나 만들어 줄게.”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전하가 널 때려?”

조앵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릴 땐, 그땐 날 때렸었어. 발로 차서 침상에서 떨어뜨리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올림머리도 잡아당겼어. 또 날 밀치기도 했지…….”

그리 말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슬픈 기색을 보였다.

“좀 더 크고 나서는 날 누르고 괴롭히는 걸 좋아했어. 얼마나 아팠는데. 게다가 날 물기까지 했어…….”

조앵기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예전에 함께 잘 때 그는 자신을 몹시도 싫어해서 항상 저를 침상 구석으로 밀며 본인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가 그가 열두 살쯤 되자 그녀를 끌어와 괴롭히기 시작했고 조앵기는 그저 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열다섯 살이 되자 황제가 그에게 궁녀를 붙여 줬는데, 그는 방 안에서 잠시 머물다가 또다시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와 자신을 괴롭혔다.

반년 후, 황제는 다시 그에게 두 명의 시첩侍妾을 붙여 줬다. 그가 다른 사람의 방에 가려고 하자 자신은 그를 껴안고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눈물을 쏟아냈다.

“전하. 다른 사람과 자지 마세요! 저랑만 있어요. 절 어떻게 괴롭히든 전 다 괜찮아요! 절 물어도 좋아요! 절 아프게 해도 울지 않을게요.”

하나 그는 질렸다는 듯 자신을 밀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가 떠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육체적인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심적인 고통이야말로 진정한 고통이었다.

당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쏟았다. 마치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고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가끔은 자신은 이미 그때 죽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 이런 일들이 많아지자 자신도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심지어는 그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 함께 있고 싶지도 않고 그에게 괴롭힘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에게서 멀리 달아나고 싶을 뿐이었다.

하나 양왕부는 평생토록 벗어날 수 없는 새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끝내 도망가고 싶은 마음마저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엽연채를 만나고 나서야 조앵기는 이 세상에 다시 밝은 빛이 쏟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직 엽연채만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려고 했고,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잘해 주었다.

“어렸을 땐 괴롭히는 걸 좋아했는데 크고 나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았어. 그냥 날 노려보고 사납게 굴고 그래…….”

조앵기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이 널찍한 왕부 안에서도 그렇게 커다란 황궁 안에서도 그녀는 외톨이었으니까.

오직 엽연채만이 저와 잘 지내고 있으니 조앵기는 저도 모르게 그녀 앞에서 예전 이야기를 꺼냈다.

엽연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을 때 때린 건 어린아이라 철이 안 들었고 양왕은 성격도 삐뚤어졌으니 싸우길 좋아했기 때문일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젠 다 컸으니 자연히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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