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4화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미워했다. 평소 그는 그녀의 머리를 때리거나 땋은 머리와 양쪽으로 묶은 올림머리를 잡아당기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그녀의 머리는 그만의 것이었고 다른 사람은 만져서는 안 되었다.
한번은 태자가 제 머리를 만지자 그가 태자를 물속으로 밀어 버렸다. 한겨울이었던 터라 태자는 몸이 꽁꽁 얼어 꼬박 보름 동안 앓아누웠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그를 오냐오냐했다.
반면 그녀는 뭘 하든 다 잘못한 것이고, 그녀에게는 무엇도 허락되지 않았다.
어릴 때 그녀는 황족 여자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한번은 금琴을 잘 연주해서 스승과 친구들 모두 칭찬했고, 스승은 자신에게 새 악보를 주면서 내일 그 곡을 연주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금 줄을 반대로 어긋나게 바꿔 놓아 개망신을 당하게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지금껏 한 번도 자신을 존중한 적이 없었고, 그녀가 그에게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노력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화로 안의 수람은 이미 다 타 버렸고 불빛도 사그라졌다.
조앵기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난 당신을 위해서 그런 게 아냐……. 연채를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괴롭다 하더라도 그저 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조앵기는 이 새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그에게 업신여김당하고 싶지 않았다.
* * *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지자 도성 사람들은 겨울옷을 입어야 했다.
시월 열사흘은 주운환과 엽연채가 진서후부鎭西侯府로 이사하는 기쁜 날이었다.
이사 전에 엽연채는 이미 사람을 시켜 자신의 혼수와 궁명헌에 있는 중요한 물건들을 진서후부로 옮겨 놨다.
주묘서와 진씨는 근처 정자에 앉아서 하인들이 끊임없이 들락날락하며 물건을 옮기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지켜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뭐 대단한 거라고. 그래 봤자 후부에 불과한데.”
“하하.”
주황색 나무 걸상에 앉아 있는 진씨의 눈빛은 멸시로 가득했다. 자기 딸이 며칠 있으면 측비가 되는데 저런 빌어먹을 종자가 이제 더 필요할 리가 있겠는가?
“며칠 있으면 너도 정륭가로 가는구나.”
진씨는 자애로운 얼굴로 주묘서를 쳐다봤다.
주묘서는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지만 우쭐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태자부 또한 정륭가에 있었다. 게다가 후부보다 훨씬 더 으리으리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또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쉽게도 이사한 집에 가 볼 수가 없네요.”
안 그랬으면 모두가 그녀를 부러워하게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출가까지 아직 이레가 남았으니 넌 외출하면 안 된다. 부정을 탈지도 몰라.”
진씨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 * *
이사 당일, 진서후부는 경사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도성에서 이름 있는 조정 신하들은 전부 연회에 참석해 새로 보수한 후부의 곳곳을 둘러봤다. 후부 안에는 정자들이 들쭉날쭉 자리하고 있었고 곳곳에 기이한 화초들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는데 색깔이 선명하고 고왔다. 또 정원도 수없이 많았고 호수는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고 있었다.
진서후부의 이사 기념 연회석도 호숫가에 마련됐다.
엽연채는 여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진씨 등은 부릴 수가 없으니 믿을 사람은 충성심이 지극한 여종들뿐이었다. 다행히도 이 여종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바쁘게 움직이던 엽연채는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물 한 모금 마실 짬이 생겼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러 본채로 돌아가며 물었다.
“참, 양왕부 사람들은 왔니?”
“네, 아까 교 마마가 왔다고 했어요.”
혜연이 뒤에서 답했다.
“육 측비와 진 측비도 왔다고 합니다.”
이 말에 엽연채는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양왕비 마마는 안 온 거야?”
“안 오셨어요.”
혜연이 옅은 한숨을 쉬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아무래도 총애를 받지 못하고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사람들이 말하길 양왕비 마마께서 외출을 하면 양왕 전하께서 창피해하신다고 해요. 그래서 나라에서 베푸는 중요한 연회나 정비가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면 양왕비 마마가 외출하는 걸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해요.”
엽연채는 마음이 조금 아팠다. 그녀는 옅은 한숨을 쉬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참, 양왕부가 이곳에서 멀지 않지?”
“네, 문을 나서서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도착합니다.”
혜연의 대꾸에 엽연채는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 앵기가 못 오면 우리가 놀러 가면 되지!”
혜연은 입꼬리를 빼쭉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렸다.
“마님… 어쨌든 나리께서 양왕 전하와 일을 도모하고 계시잖습니까. 이는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마님이 자주 양왕부를 들락거리시면… 사람들이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무서울 게 뭐가 있니. 허虛로 보여도 사실은 실實이고 실로 보여도 사실은 허다. 허와 실이 섞여 있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겠니! 그저 여인들끼리 교제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 나와 앵기의 사이가 좋은 건 사람들도 이미 모두 알고 있으니 일부러 너무 피하면 오히려 안 좋을 게다.”
엽연채는 거볍게 미소를 지으며 혜연을 안심시켰다.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를 의심한다면 내가 육 측비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안 되지 않겠느냐?”
그녀는 그리 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고 옷을 갈아입은 후 손님들을 맞이하러 다시 갔다.
정오에 식사를 한 뒤에도 손님들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남자 손님들은 주운환을 데리고 가서 응성 전투 이야기를 나눴고, 여자 손님들은 엽연채를 데리고 가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태자비와 노왕비, 육 측비 등은 바람을 쐬려고 만든 호수의 정자 안에 둘러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엽연채는 노왕비의 시녀에게 이끌려 이곳에 도착했다.
태자비는 엽연채를 보자 두 눈이 조금 빨갛게 변했고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 달 전쯤 태자비는 필사적으로 엽연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리고 주씨 가문 사람을 정말로 태자부로 들이게 됐는데, 그녀의 사람이 아닌 새로운 측비가 들어오게 되었다.
또다시 새로운 강적이 생긴 것이다. 태자비는 주씨 가문을 멸문해 버리고 싶었다. 그 마음은 엽연채의 얼굴을 마주하자 더욱더 커졌다.
한편, 엽연채는 시녀에게 이끌려 신양 공주 옆에 앉았고 미소 띤 얼굴로 그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제민은 엽연채가 조앵기를 생각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지난번에 분명 오기로 했는데 결국 그녀 대신 육 측비가 얼굴을 내밀었으니 제민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제민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운을 뗐다.
“호수가 정말 아름다워요.”
“저쪽에 있는 오산烏山에서 물을 끌어온 거예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저택에서 쓰는 물은 전부 그곳에서 끌어오는 거죠.”
신양 공주가 말을 보탰다.
“제가 듣기로 양왕부의 어호漁湖가 도성에서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하던데, 언제쯤 한번 그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유, 풍경이라 할 것도 없어요.”
제민이 자연스럽게 양왕부로 화제를 돌리자 육 측비가 미소를 지으며 사양했다.
“그냥 가을에 풍경이 좀 예쁜 것뿐이에요. 주위에 단풍나무가 일렬로 쭉 심어져 있어 이맘때가 되면 온통 붉게 물들어 색다른 정취가 느껴지죠.”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반짝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내년 칠석에 양왕 전하의 생신 연회가 있을 테니 그때 같이 가 보면 좋겠네요!”
“그럼 단풍은 못 보잖아요?”
그 말에 제민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아유, 참. 단풍 구경이 뭐 어려운 일이라고. 지금 가서 보면 되지요. 지금 딱히 할 일도 없고 또 이곳에서 가깝기도 하니 지금 양왕부로 가서 풍경을 감상하면 되겠네요.”
신양 공주가 육 측비를 쳐다보며 이리 제안했다.
“육 측비, 어떤가?”
“예, 그럼요. 다들 오세요. 저녁은 저희 쪽에서 드시지요.”
육 측비는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엽연채는 미소를 짓더니 제민을 잡아당겼고 사람들은 모두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
기분이 좋지 않은 태자비는 도저히 더는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엽연채와 제민, 신양 공주, 노왕비 그리고 몇몇 종부宗婦들이 함께 양왕부로 향했다.
일각쯤 지나자 일행은 양왕부로 들어섰고, 육 측비는 사람들을 이끌고 어호로 향했다. 그곳은 정말로 붉게 타오르는 듯한 단풍나무로 가득했고, 저 멀리 푸른 물결 위로 거꾸로 선 나무 그림자가 비쳤다. 산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에서 한적한 분위기가 느껴졌고, 사람들은 이 절경에 흠뻑 취해 집에 돌아가는 걸 잊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던 육 측비는 사람을 시켜 붓과 먹을 준비하게 하더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자고 했다. 고상한 모습을 한껏 뽐내려는 심산이었다.
엽연채는 육 측비가 시녀들에게 탁자를 펴라고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보더니 앞으로 다가가 그녀에게 물었다.
“참, 왜 양왕비 마마는 안 보이시는 거죠?”
그 말에 육 측비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리 둘러댔다.
“왕비 마마는 조용한 걸 좋아하셔서 처소에 계실 겁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이 집안의 진짜 안주인인 양왕비를 언급하는 걸 꺼려했고, 양왕비를 기억하는 것 또한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지난번에 제민의 이사 기념 연회에 왕비 마마께서 오셨었고 저희 이사 기념 연회에도 참석하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오늘 오시지 않았네요.”
엽연채가 물고 늘어지자 육 측비는 눈 밑에 그늘이 졌고 속으로 짜증이 났다.
지난번에는 조앵기가 백주 대낮에 서재로 가서 양왕을 꼬셔 겨우 외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정말로 천박한 행동이었다.
‘조앵기는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바깥의 귀부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배워 사람들에게 그녀야말로 명실상부한 양왕비임을 보여 주려는 걸까?’
“하하… 왕비 마마께서는…….”
육 측비는 잠시 멈칫했다. 무슨 핑곗거리를 대야 할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양왕비를 본 지 오래됐군. 사람을 시켜 불러오도록 하죠!”
이때, 주황색 나무 걸상에 앉아 있던 신양 공주가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아죽아, 가서 양왕비를 모셔오너라.”
밖에 있던 아죽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육 측비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당연히 이는 가식적인 미소였다.
잠시 후, 아죽이 돌아와 고했다.
“공주 마마. 방금 전에 평정소축에 갔는데 왕비 마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밖으로 놀러 가신 것 같습니다.”
육 측비는 그제야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