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3화
엽승덕은 은정랑을 실컷 괴롭히고 나자 마음속에 담고 있던 화가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 엽승덕은 매달 돈을 좀 쓰며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를 괴롭힐수록 오히려 엽승덕의 원망은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녀를 괴롭힐 때마다 과거가 사무치게 후회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옆에 있는 줄 뻔히 알면서 그녀를 괴롭히지 않는 것 또한 그에겐 괴로움이었다.
그 후 엽승덕은 허서도 이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질 떨어지는 기루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파는데 허서도 그런대로 반반하게 생긴 얼굴 아닌가. 엽승덕은 허서도 함께 괴롭혔다.
* * *
엽승덕의 상황은 금세 도성으로 전해졌다.
엽연채는 서차간에서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서책을 보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더니 어안이 벙벙했다.
“이거 참……. 인연이 있으면 천 리 밖에서도 만날 수 있다더니 그것들이 만나게 되었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서로를 너무나 열렬하게 사랑했기에 아마 하늘도 감동하여 그 두 사람의 홍실을 삼밧줄로 바꿔 주셨나 봅니다!”
혜연은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 더 했다.
“세 식구가 영원토록 함께하자는 아름다운 소망을 마침내 이루게 되었네요.”
“쓰레기 같은 사내와 천박한 여인은 영원히 함께해야죠. 이게 바로 하늘의 계획인 거예요!”
추길도 콧방귀를 뀌며 거들었다.
엽연채는 하품을 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참, 며칠 후면 우리가 이사 기념 연회를 베푸는데 집집에 첩자는 다 보냈니?”
“예, 보냈습니다.”
추길이 말했다.
엽연채는 또 조앵기가 생각났다.
“그 앤 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네.”
“누구 말씀이세요?”
추길이 미간을 찌푸렸다.
“양왕비 마마 말이야.”
혜연이 따뜻한 물이 담긴 놋쇠 대야를 들고 들어오며 대신 알려 주었다.
“양왕비 마마?”
추길은 요즘 엽연채와 외출하는 일이 극히 적었고 보통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번 제민의 이사 기념 연회에도 추길 대신 혜연이 엽연채를 따라갔다.
추길은 엽연채와 양왕비가 잘 어울려 논다고 혜연한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추길은 그 생각을 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뭣 하러 양왕비 같은 사람과 교분을 쌓는단 말인가? 차라리 육 측비와 잘 지내는 편이 낫지!’
* * *
그 시각 양왕부.
화려하고 진귀하게 꾸며져 있는 평정소축의 서차간에는 따뜻하고 훈훈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시월 말이라 날씨는 점점 더 추워졌다. 조앵기는 서차간에서 토끼 문양이 들어간 박달나무 귀비의에 엎드려 있었는데, 등 위에는 금가루로 장식된 털이 풍성한 우단羽緞으로 만든 소매 없는 외투를 덮고 있었다. 외투의 가장자리에는 토끼털 장식이 달려 있었다.
한쪽에는 온갖 꽃문양이 들어간, 은도금한 화로가 놓여 있어 방 안은 따스한 온기로 가득했다.
조앵기는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움직여 낙자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침내 동작을 멈추더니 완성된 낙자를 집어 들어 쳐다봤다. 나비 모양의 붉은색 낙자였다.
조앵기는 낙자를 쳐다보며 흐뭇해했다.
“또 하나 완성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나비 모양의 낙자를 한쪽에 놓인 수람繡籃 안에 넣었다. 수람 안에는 무려 이런 낙자가 이삼십 개 정도 들어 있었다.
낙자로 가득 찬 수람을 보고 있으니 조앵기는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
원래는 엽연채가 축하 선물을 받고 싶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만들기 시작한 건데, 뜻밖에도 만들면 만들수록 손에 익어 낙자를 만드는 게 아주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감는 방법을 바꾸면 다른 모양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조앵기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고 큰 성취감을 느꼈다.
이때, 밖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조앵기는 얼른 낙자가 들어 있는 수람을 소매 없는 외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밖에 걸린 유리 주렴이 걷히자 이무기 문양이 들어간 짙은 자줏빛의 화려한 의복을 입은 양왕이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몸에는 쌀쌀한 가을 기운이 묻어 있었다.
조앵기는 슬며시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전하.”
양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포를 걷어 올리며 한쪽에 놓인 권의에 앉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매일 이곳에 처박혀 뭘 하는 것이냐?”
조앵기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리며 말했다.
“누워 있었어요…….”
양왕의 날카로운 눈이 조앵기의 조그만 얼굴로 향하자 그녀는 켕기는 게 있는 듯 고개를 숙였다.
양왕은 손을 뻗어 그녀가 입고 있는 외투 안을 뒤적이더니 결국 그 조그만 수람을 끄집어냈다. 그러자 수람 안을 가득 채운 낙자가 눈에 들어왔다.
조앵기는 깜짝 놀랐고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실토했다.
“낙자를 만들며 놀고 있었어요.”
“재미있느냐?”
양왕은 붉은 입술을 쓱 올렸다.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조앵기는 그리 말하며 용기를 내어 수람을 가져오더니 나비 모양, 매화 모양, 버들잎 모양의 낙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세 가지 모양으로 만들 수 있어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양왕의 매력적인 얼굴이 싸늘해졌다.
“이것들은 뭣 하러 만드는 것이냐?”
조앵기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며칠 후에 연채가 이사를 가는데 연채가 저보고 꼭 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걸 선물로 주려고요.”
조앵기는 그리 말하며 그를 쳐다봤다.
양왕은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그 조그만 수람을 팩 집어 던졌고, 수람은 조그만 화로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덩굴로 만든 그 수람은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 내 낙자가!”
조앵기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그쪽으로 냅다 달려들어 수람을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양왕이 그녀의 손을 확 낚아채더니 그녀를 탑상 위로 내동댕이쳤다.
“으……!”
조앵기는 아파서 신음소리를 내더니 다시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보니 화롯불이 이미 그 작은 수람을 삼켜 버린 후였다. 조앵기는 넋이 나가 버렸고 고개를 들어 보니 양왕의 매정한 눈빛이 제게 향해 있었다.
조앵기는 어안이 벙벙했고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내가 네 어떤 점이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줄 아느냐?”
양왕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열심히 노력하면 내게 어울리는 짝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러자 조앵기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전…….”
그녀가 아직 말을 다 잇지도 않았는데 양왕은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조앵기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또 화로에서 아직 타고 있는 수람을 쳐다보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는 그저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깍지를 끼고 낙자가 타고 있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자신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궁으로 들어왔을 때 자신은 네 살도 채 안 됐지만, 빈부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미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아직도 어렸을 때 여러 명의 자매가 있었고 먹을 것조차도 풍족하지 않았으며 집은 아주 작고 허름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집인지, 어떤 환경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처음 입궁했을 때 진귀하고 아름다운 궁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그 느낌은 아직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입궁한 뒤로 자신은 예쁜 옷을 입게 됐고 좋은 음식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 그를 봤을 때 그는 정말이지 어여쁘게 생긴, 조그만 오라비였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탑상에 앉아 있던 그는 불쾌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살벌하게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마가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전하께 액막이를 해 드리는 분입니다. 또 두 분은 부부이니 한 침상에서 주무셔야 합니다. 그래야 부부처럼 보이고 전하의 액운을 때우는 데 더욱 효과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어릴 때부터 그와 함께 잠을 잤다.
하지만 저녁에 마마가 자신을 안고 와 침상에 내려놓은 후 밖으로 나가자마자 그는 바로 저를 발로 차서 침상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불쾌감과 분노가 섞인 표정을 지으며 가시가 잔뜩 돋친 투로 말했다.
“썩 꺼지거라. 난 너와 자지 않을 거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은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며 마마를 찾았다.
“마마! 마마!”
밖에 있던 마마는 안으로 뛰어 들어와 그 모습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는 침상 위에 있는 도침陶枕(도자기로 만든 베개)을 집어 바닥에 던지며 분노했다.
“꺼지거라!”
그 마마는 감히 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자신은 막막한 나머지 더욱 펑펑 울었다.
“울지 말거라!”
하지만 그가 버럭 화를 낸 다음에는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그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흘겨보고는 자리에 누웠다.
그가 자신이 탑상에서 자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니 자신은 서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밖에 있는 환관과 마마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그때부터 이곳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열등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침상에서 달게 잠을 잤고 어린 자신은 그곳에 서서 추위와 무력감을 느꼈다.
마침 그때는 섣달이라 바깥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방 안에 화로가 있기는 했지만, 한편에 가만 서 있으려니 추워서 덜덜 떨었고 잠이 쏟아졌다. 그래도 구석에 서서 감히 꼼짝도 하지 못했고 그렇게 이튿날 이른 아침까지 서 있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자신들은 봉의궁으로 끌려갔다.
정선제는 그를 혼냈고,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발로 차서 침상 밑으로 떨어뜨리지 않았다.
어릴 때 자신은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잘해 주는 사람이면 다 친하게 지내려고 했다.
한번은 정 황후가 저를 봉의궁으로 불러 맛있는 음식을 주며 양왕은 평소에 어떤 음식을 즐겨 먹느냐고 물었다. 당증매괴고糖蒸玫瑰糕를 즐겨 먹는다고 말해 주니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당증매괴고를 가져가 그에게 먹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그 떡을 반기기는커녕 자신에게 염탐꾼이라고 욕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은 염탐꾼이 무슨 말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좋지 않은 단어라는 걸 직감하였다. 그 후론 정 황후가 주는 물건을 감히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