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2화
그 말에 엽승덕은 표정이 굳어졌다.
“너…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냐……!”
“아버지는 참 이상한 분이네요? 왜 허튼소리를 한다고 말씀하세요?”
엽연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건 아버지가 직접 부탁하신 거 아니에요? 할아버지께선 분명히 아버지를 본적지로 보내 반성하게 한다고 하셨어요. 유이야, 안 그렇느냐?”
엽연채가 맑고 아름다운 눈으로 유이를 쓱 쳐다봤다.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유이가 얼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맞습니다! 큰나리, 왜 저희와 안 가시려는 겁니까? 정말 참회하고 싶으신 거 맞으세요? 잘못을 인정하고 싶으신 거냐고요.”
“그러니까 말이야!”
추길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설마 정말로 밖에서 떠도는 이야기처럼 잘못을 인정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 실은 집으로 돌아가 부잣집 나리로 지내고 싶으신 건가요?”
정곡을 찔린 엽승덕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가시죠. 큰나리!”
유이는 그리 말하며 하인들을 시켜 그를 잡아끌었다.
“아아아……! 난 안 갈 거다! 안 간다고!”
엽승덕은 안간힘을 다해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그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마차에 태워졌다.
백성들은 쏜살같이 달려가는 마차를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와하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게 무슨 일이래?”
“무슨 일이겠어, 사과가 거짓이었던 거지. 집으로 돌아가 나리가 되고 싶었던 게 본심이었던 거야.”
“집안에선 저 사람의 사과를 받아 줬고 고향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고향집은 가난하니 저 사람은 도성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게지.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버틴 거 아니겠어?”
“에이, 퉷. 그게 사과야? 저렇게 뻔뻔한 사람은 내 처음 본다!”
백성들은 그를 한바탕 비웃고는 자리를 떠났고, 엽연채도 콧방귀를 뀌더니 집으로 들어갔다.
* * *
엽승덕을 마차 안으로 밀어 넣은 후 유이는 그에게 작은 보따리 하나를 던져 주었다. 그러고는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며 도성을 떠났다.
엽씨 가문 본적지는 이주에 있었다. 도성에서 이주까지는 육로와 수로를 합쳐 꼬박 한 달가량이 걸리는 거리였다.
한 달 후, 엽승덕은 마침내 고향에 도착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엽씨 가문 저택은 여전히 마을 안에 있었는데, 엽씨 가문이 흥한 뒤에 지은 저택인지라 사진원식으로 규모가 크기는 했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은 엽씨 가문 노비의 아들인데, 그는 엽승덕이 일을 저지르고 쫓겨나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빈정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유이는 그에게 엽승덕에게 하루 세끼를 주고 매달 삼백 문文의 용돈을 따로 주면 된다고 했다.
엽승덕은 마침내 먹고 입는 걸 걱정하지 않게 됐지만, 매일같이 기름기 하나 없는 멀건 국만 먹게 됐고 낡은 옷을 입게 되었다. 그는 자기 인생이 도성에 사는 하인들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엽연채와 온씨가 호화롭고 부귀한 생활을 하고 있는 데 반해 자신은 개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것만 떠올리면 엽승덕은 고통스럽고 괴롭기 이를 데 없었으며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
‘왜 이렇게 변해 버렸다는 말인가?’
자신은 분명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후부의 세자였다. 그런데 지금 고향으로 보내져 온갖 멸시를 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런 작은 마을의 우악스러운 사내들과 촌뜨기들한테 말이다.
‘맞아도 싼 것들 같으니라고!’
엽승덕은 주인의 신분으로 집안을 관리하는 하인들을 혼쭐내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되레 하인들에게 제압을 당해 매질을 당했다.
그 이후로 하인들은 더 이상 엽승덕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하루에 두 번 기름기 없는 음식만 제공했고, 옷도 빨아 주지 않았으며, 청소도 해 주지 않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엽승덕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한 달에 겨우 삼백 문의 용돈이나 받는 처지였다. 이래 가지고서 어느 세월에 도성으로 돌아가는 데 충분한 여비를 마련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홀몸으로 길을 나섰다가 비적이라도 만나면 어찌한단 말인가? 도중에 죽으면 어쩐단 말인가? 어찌어찌 도성으로 돌아간다 해도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내지면 또 어찌한단 말인가?
엽승덕은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절망에 빠져 날마다 술로 괴로움을 달랬다.
삼백 문은 써 볼 것도 없는 돈이라 흥청망청 쓰고 나니 보름도 안 됐는데 수중에 벌써 삼십 문밖에 남지 않았다. 엽승덕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마을의 하급 기루에 가서 기녀 한 명을 골라 욕구나 풀기로 했다.
얼빠진 얼굴로 기루에 들어간 그는 안내를 받아 침상 하나만 수용할 수 있는 작고 허름한 칸막이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귀신이라도 본 양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동시에 외쳤다.
“당신이 어떻게!”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은정랑이었다.
엽승덕은 은정랑을 보자마자 핏발이 설 정도로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천박한 여편네! 이익! 오늘 내 손에 죽어 봐라!”
그는 그리 외치며 은정랑에게 돌진했다.
“꺄아악!”
은정랑은 그에게 목이 졸려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 비명소리가 어찌나 처절했는지 잠시 후 엽학문을 안내해 준 노마마와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노마마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손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 천박한 년! 상스럽고 뻔뻔한 년!”
엽승덕은 은정랑을 붙잡고 찰싹찰싹 소리가 나게 그녀의 뺨을 두 대 올려붙였다.
“아유, 거친 분이셨군요.”
노마마는 대수롭잖듯 하하 웃더니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하나 손님 좀 살살하셔야 합니다. 이 천한 년을 때리시는 건 얼마든지 괜찮지만 너무 세게 때리면 손님이 다치실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년의 팔다리는 부러뜨리지 마세요. 안 그러면 돈을 물어내셔야 합니다! 이년은 제 밥줄입니다!”
“이 천한 년!”
엽승덕은 은정랑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서 고개를 돌려 기생 어미에게 물었다.
“이년이 당신네 사람인가?”
“물론입죠! 저희 사람이 아니면 왜 여기에 있겠습니까?”
“하하하! 이 천한 년. 이런 곳으로 빠지다니. 가장 질 떨어지는, 거지조차 상대해야 하는 가장 추잡한 곳으로 빠지다니. 하하하. 우스워 죽겠구나. 무슨 소금 장수와 떠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엽승덕은 광기 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정말이지 우스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럼 천천히 하세요.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노마마는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고, 친절하게 사람들까지 쫓아 줬다.
“다들 이만 가 봐. 그냥 손버릇 나쁜 사람이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노마마가 떠난 후 엽승덕은 은정랑을 마구 때렸다.
“이 천박한 년.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너만 아니었으면 난 여전히 후부의 적자였을 거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다. 이 뻔뻔하고 천박한 것! 아주 꼴 좋구나! 너 같은 건 이런 최후를 맞는 게 당연하다!”
은정랑은 아파서 엉엉 울었다. 몸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고 정말로 뼛속 깊이 후회가 됐다.
당시 등 나리가 부유한 소금 장수라고 생각했고 계속해서 부잣집 마님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진 마마도 보증을 서니 등씨의 신분을 철석같이 믿었다. 또 다른 엽승덕을 발견했다 생각해 주저 없이 그를 따라 떠났다.
그런데 도성을 나오자마자 등 나리가 본색을 드러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알고 보니 그는 소금 장수도 아니고 돈도 없으며 그저 사기꾼에 불과했다.
등 나리에게 얻어맞은 은정랑은 마차 안에 갇혔고 보따리까지 빼앗겼다. 그런데 그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한 사람이 뛰어왔다. 바로 진 마마였다.
진 마마가 그녀의 보따리를 풀어 보니 안에는 금잠과 팔찌, 옥패 등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은정랑이 한동안 매춘을 해서 모은 삼백 냥가량의 돈도 들어 있었다. 합해서 무려 육칠백 냥가량이 들어 있던 것이다.
이를 본 진 마마와 등 나리는 두 눈을 반짝였고 진 마마는 투명도가 아주 높은 벽옥 팔찌를 만지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이 창부는 좋은 걸 모아 두는 습관이 있다고. 엽씨 가문에서 쫓겨날 때 당연히 뭘 챙겼을 줄 알았지.”
진 마마는 과연 은정랑을 6년이나 모셨던 심복답게 그녀의 습관과 성정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엽씨 가문에서 쫓겨난 후, 은정랑은 엽승덕이 몸에 차던 옥패 등은 저당 잡혀 돈으로 바꿨고 본인과 허서가 몸에 차고 있던 장신구 등은 전부 몰래 숨겨 놓았다. 엽승덕이 변변치 못한 식사를 해도 은정랑은 그것들을 꺼내 놓기 아까워했다.
이제 이 물건들을 챙겨서 가져가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모든 재산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옛 심복 손에 떨어지게 될 거라고 어디 생각이나 했겠는가.
“헤헤헤. 저 여인한테 쓴 돈이 이제 다 회수됐네. 거기다 한몫 톡톡히 챙겼고.”
등 나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도 참 대단한 사람이야. 나보고 저 여인을 유혹하라고 하다니.”
“호호.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진 마마는 호호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저 여인과 6년을 함께했는데 저 여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모르겠어? 전에 엽승덕이 저 여인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자네가 충분히 학습하기만 하면 저 여인은 자기가 또 한 사내를 유혹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쯧쯧.”
“또 유혹했다고? 에이, 퉷!”
등 나리는 은정랑에게 침을 뱉으며 비웃었다.
“너 같은 여인들을 내가 어디 한두 명 본 줄 알아! 넌 그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야. 어쩌다가 엽승덕 같은 얼빠진 놈을 만나게 된 것뿐이지. 정말로 세상 사내들이 다 엽승덕처럼 나사가 빠졌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들은 은정랑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고 부끄럽고 화가 나 그들을 물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물어 죽일 틈도 없이 두 사람은 그녀를 처리해 버렸다.
돈을 빼앗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둘은 그녀와 허서를 질 떨어지는 기루에 팔기까지 했다.
그 기루는 원래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나중에는 영업을 하지 않게 되었고, 그들을 이곳저곳에 팔더니 결국 두 사람은 이주까지 오게 되었다.
은정랑은 증오심이 불타올랐지만 반항할 힘이 없었고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하루하루를 지옥 속에서 보내며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학대와 괴롭힘을 실컷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전부 사람이 아니었다.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가난뱅이에 못생긴 사내들이었고 심지어 더럽고 역겹기 그지없는 거지도 있었다.
‘난 분명 부잣집 마님이 되어야 하는 팔자인데 이제는…….’
은정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괴로움에 눈물을 흘렸다.
여하간에 세상에서 가장 굴욕적인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엽승덕까지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이 실컷 조롱했던 엽승덕 앞에 이런 꼴로 나타나게 된 것이야말로 그녀에게는 가장 큰 굴욕이었다.
은정랑은 후회가 밀려왔고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