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1화
엽학문은 체면이 깎일 대로 깎였다는 생각만 들었다. 게다가 엽연채가 이런 말투로 몰아세우는 걸 보니 그녀는 자신의 할아비가 안중에도 없는 게 분명했다.
엽학문은 화가 나면서도 조금 두려웠다. 어쨌든 엽연채는 주운환의 아내이니 말이다. 엽학문은 말을 조금 더듬으며 잡아뗐다.
“나, 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 애가 온씨와 재결합해서는 안 된다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걔가 온씨와 정말로 재결합을 한다고 해도 그건 부부간의 일이다. 난 그 불효자가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조상님들의 위업을 무너뜨리려고 한 그 짐승만도 못한 것을 내 어찌 용서하여 집안으로 들일 수 있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니 아주 다행입니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늦었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용건을 전하자마자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엽학문은 분을 못 이겨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장 잘 아는 묘씨는 그가 손씨의 말에 설득됐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다. 묘씨는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제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날 나리가 큰애를 집으로 들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연채가 나리와 끝장을 보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자 엽학문이 싸늘한 눈빛으로 묘씨를 쏘아봤다.
“어서 이 일을 깔끔하게 해결하시죠.”
그러거나 말거나 묘씨는 냉랭한 목소리로 닦달할 뿐이었다.
“지금 깔끔하게 해결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소!”
엽학문이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게다가 저 빌어먹을 계집애는… 지 어미에게 추근대는 사람이 있으면 지가 직접 해결하면 될 일이지, 친정으로 달려와 이렇게 떠들어대서 뭐 어쩌자는 건지.”
“연채는 지금 나리께 자기 집 쓰레기는 자기가 직접 치우라고 말하는 겁니다. 설마 다른 사람보고 나리를 대신해 치우라는 겁니까?”
묘씨가 찬웃음을 짓자 엽학문은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오?”
“엽승덕을 잡아와 고향으로 보내 버리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묘씨가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더하자 엽학문은 정말이지 화가 나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엽학문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씩씩거리며 밖에다 소리를 질렀다.
“유이야! 유이야! 이놈은 어딜 간 것이냐?”
첨향은 이 시간에는 유이가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엽학문이 노발대발할까 봐 심히 걱정이 되어 얼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러곤 잠시 후 유이와 함께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유이는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비뚤어진 연모軟帽를 손으로 받치면서 헐떡이는 소리로 물었다.
“나리, 무슨 일로 소인을 찾으셨습니까?”
“가서 큰애를 잡아 이주利州로 보내거라!”
엽학문은 콧방귀를 뀌었고 유이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으나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는 그리 말하고는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한편, 안녕당 근처의 정자에 있던 여설은 유이가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낯빛이 싹 변하더니 황급히 손씨의 처소로 돌아갔다.
“마님, 나리. 큰일 났습니다. 주인나리께서 큰나리를 고향으로 보내시려고 합니다.”
손씨와 엽승신은 응접실에 앉아서 엽이채 일을 상의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더니 낯빛이 확 변했다.
“뭐라? 엽연채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그 악독한 게 이채를 그리 비참하게 만들더니 이젠 또 이런 소란을 피우는구나……!”
손씨와 엽승신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들은 이미 처참하게 패배했고 그저 엽승덕이 이 판을 만회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씨와 엽승신의 속은 불만으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엽승신이 싸늘한 목소리로 분부를 내렸다.
“어서 형님에게 가거라. 가서 엽연채가 형님을 도성에서 쫓아내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당장 주씨 가문으로 달려가시라고 알려 드리거라!”
“예.”
여설은 대답하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그 시각 송화 골목.
엽승덕은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거울 속의 사내는 복福 자 문양이 들어간 둥근 깃이 달린 금포를 입고 있었다. 중년에 이른 나이였지만 여전히 부드럽고 기품이 흐르는 외양이었다. 엽이채의 돈을 받은 후 한동안 관리를 하고 나니 그는 예전의 풍채를 어느 정도 되찾았다.
엽이채는 며칠 전에 또 그에게 새 옷을 사 줬는데 출혈이 꽤나 컸다고 볼 수 있었다.
엽승덕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생활을 보내게 되자 엽씨 가문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일념이 더욱더 강해졌다.
‘나는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쾅쾅쾅!
이때,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승덕은 어리둥절했으나 방에서 나와 얼른 문을 열어 줬다.
“엽연채가 나리를 도성 밖으로 쫓아내려고 해요. 그러니 나리, 어서 주씨 가문으로 가세요.”
여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재우쳤다.
“마차는 맞은편에 있는 작은 골목에 세워져 있어요. 큰나리, 어서 가세요.”
낯빛이 홱 변한 엽승덕은 엽승신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작은 골목을 나오자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이미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엽승덕은 안색이 또다시 확 변하더니 서둘러 거리를 향해 달려갔다.
사내들은 모두 엽씨 가문 하인들로, 선두에 선 사내는 유이였다. 유이는 한눈에 엽승덕을 알아보고는 도망가는 그의 뒤를 얼른 쫓았다.
엽승덕은 사람들 사이로 요리조리 뛰더니 간신히 맞은편에 있는 골목에 도착했다. 그는 마차로 뛰어올라 말고삐를 쥐고는 힘껏 잡아당겼다.
작은 마차가 큰길을 쏜살같이 내달리자 행인들은 화들짝 놀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길 양쪽으로 비켜섰다.
엽승덕은 필사적으로 말을 몰았고 일각쯤 지나자 마침내 장승가에 도착했다.
마차를 주씨 가문 대문 앞에 멈춰 세우자마자 엽승덕은 말고삐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너무 허둥거린 탓에 마차에서 내리다가 그만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가 길 위에서 데굴거리자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깜짝 놀라 잇달아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엽승덕은 ‘쿵’ 소리를 내며 주씨 가문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 어떻게 이런 악독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냐고!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난 이미 받아야 할 벌을 받았고 이곳에서 네게 무릎을 꿇고 사과도 했다! 네가 내 사과를 받아 주지 않을 수는 있지만 네가 뭔데 날 도성 밖으로 쫓아낸다는 말이냐? 네가 황제 폐하라도 된 줄 아느냐? 이 도성이 네 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고 얼른 주위로 몰려들더니 엽승덕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이 사람 진서후 부인의 아버지인 엽승덕 아니야? 며칠 전에도 이곳에서 무릎을 꿇었잖아.”
“이게 무슨 일이래? 설마 진서후 부인이 저 사람을 도성 밖으로 쫓아내려는 거야? 너무 모질게 구는 거 아냐? 거들떠보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친아버지인데 도성에서 쫓아내는 건 너무하지.”
“게다가 그 사람이 뭔데 이렇게 하는 거야? 도성은 주씨 가문 것이 아니잖아. 도성은 황제 폐하의 것이지! 어찌 됐든 간에 엽승덕도 우리 대제의 백성이고 도성 사람인데 그 사람이 뭔데 엽승덕을 쫓아내고 싶다고 쫓아 버리는 거야?”
“도성을 나가서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거야! 어찌 됐든 간에 엽씨 가문도 이곳에 있잖아. 저 사람이 병이 나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사람들이 도와줄 수 있는데 말이야.”
밖에서 백성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자 궁명헌에서 화본을 보고 있던 엽연채가 미소를 짓더니 서책을 내려놓았다.
“가자. 그 사람을 만나 봐야겠구나.”
그녀는 이미 사람을 시켜 엽승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이곳으로 달려온다는 걸 어찌 모르고 있었겠는가?
그녀는 엽승덕을 흠씬 밟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이곳에 달려와 소란을 피우도록 일부러 내버려 둔 것이었다.
주씨 가문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엽연채가 밖으로 나왔다. 추길과 혜연이 엽연채의 뒤를 따라 나왔는데 두 사람은 엽승덕을 보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추길은 앞으로 한 발짝 나오더니 백성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다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겁니까? 우리 셋째 마님이 언제 저 사람을 쫓아내려고 했어요?”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사람들을 쓱 쳐다보니 유이가 하인 몇 명을 데리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자리에 선 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생각했다.
‘저 유이라는 놈은 역시 할아버지의 심복답구나!’
그녀는 엽학문이 사실 속으로는 엽승덕이 남아 있기를, 엽승덕이 어머니에게 마수를 뻗쳐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기를 바라는 줄 훤히 꿰고 있었다. 엽학문이 어머니를 이용해 자신을 손안에 넣고 주무르고 싶어 하는 줄 어찌 모를까.
지금 엽학문은 다만 수세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엽승덕을 고향으로 보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엽승덕이 최후의 반항을 하며 이쪽을 애먹일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주인의 속내를 빤히 아는 유이는 함부로 나서지 않고 가만히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고.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더니 유이를 가리키며 알은체했다.
“자네는 할아버지를 곁에서 모시는 사동이 아닌가?”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엽승덕을 내려다봤다.
“아버지, 아버지를 도성 밖으로 쫓아내려는 사람은 저쪽인데 저를 찾아오면 뭐 합니까?”
유이는 몸을 떨더니 얼른 미소를 지으며 뛰어나와 엽승덕을 잡아끌었다.
“큰나리, 뭐 하시는 겁니까? 어서 가시지요.”
그러자 엽승덕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버럭 호통을 쳤다.
“다들 작당하여 날 도성 밖으로 쫓아내려고 하는구나! 난 안 갈 거다! 안 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우습네요. 아버지가 스스로 가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어째서 다른 사람이 강요하는 게 되어 버렸죠? 지난번에 엽씨 가문 문밖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나요?”
“맞아!”
구경꾼들은 그 말에 호기심을 보이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어쨌다고? 너희들이 뭔데 날 도성 밖으로 내쫓는다는 말이냐?”
엽승덕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아버지를 도성 밖으로 쫓아낸다고 했어요?”
엽연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며칠 전에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셨잖아요. 제가 오늘 아침에 친정에 갔더니 할아버지께서 어쨌든 핏줄이니 무 자르듯이 관계를 완전히 끊어 낼 수는 없다고 하셨어요. 탕아가 마음을 고쳐먹고 바른길로 돌아오려고 하니 그럼 본적지로 돌려보내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청명절과 중양절에는 조상님들의 산소에 가서 향불을 피우고 절을 올리게 해 사죄케 할 생각이시라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