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0화
“넌 뭐가 억울한 것이냐!”
장찬은 버럭 노성을 질렀다.
“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엽이채 이 천박한 것이 박원이를 유혹한 바람에 박원이가 이 계집애를 아내로 맞이한 겁니다!”
맹씨도 화를 내며 되받아쳤다.
“이 계집애가 유혹하지 않았다면 지금 박원이의 아내는 엽연채일 것이고 박원이가 어디 진사로도 합격하지 못했겠습니까?”
“그 입 다물거라!”
장찬은 싸늘한 눈으로 맹씨를 노려보며 매섭게 꾸짖었다.
“그게 강제로 한다고 될 일이냐? 박원이 본인이 원치 않았다면 아무리 상대가 유혹했다 해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억울하다는 것이냐? 다 네가 스스로 벌인 짓거리다! 엽이채가 좋은 애가 아닌 것은 물론 너 또한 좋은 인간은 아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장박원을 쏘아봤다. 그러자 장박원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맹씨는 조금도 달갑지가 않았다. 자기 아들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그 모든 잘못과 책임을 전부 엽이채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뭐?”
장찬은 냉소를 짓더니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장박원을 쓱 훑어봤다.
“뭐 엽연채를 아내로 맞이했을 거라고? 고작 이런 인품을 가진 못난 네가 그 애의 짝으로 가당키나 하느냐?”
‘엽연채의 짝으로 가당치 않다니?’
맹씨와 장박원은 너무도 민망했고 그 말이 달갑지가 않았다.
“너와 엽이채는 망가진 냄비와 낡아 빠진 뚜껑이다. 하늘이 맺어 준 이상적인 짝이다! 둘 중 누가 더 고귀할 것도 없는데 누가 누굴 싫어한단 말이냐!”
장찬은 자기가 말해 놓고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맹씨를 써늘하게 노리며 경고했다.
“다들 자중하고 있거라! 또다시 소란을 피우면 내 가만두지 않겠다.”
그는 그리 말하며 옷소매를 홱 뿌리치더니 곧장 밖으로 나갔다.
낯빛이 창백한 장박원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도저히 장찬의 말을 인정할 수가 없는 맹씨는 화가 치밀어 올라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엽이채를 쏘아보았다.
“박원이는 그저… 의지가 좀 굳건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네가 유혹하지만 않았다면 어디 이 지경에 이르렀겠느냐!”
그녀는 그리 말하며 또다시 엽이채의 뺨을 두 대 내리쳤다.
“아악!”
엽이채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맹씨를 홱 밀쳤다. 머리는 엉망진창에 입가에선 피까지 흘리는 엽이채가 장박원을 쳐다보니 그는 한쪽에 웅크린 채 해쓱한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더니 흉측한 미소와 함께 소리를 질렀다.
“부군 꼴을 봐요! 이게 다 뭐 하자는 거예요? 이런 사람이… 겨우 이딴 사람이 내가 필사적으로 빼앗아 온 남편이었다는 말이야……? 아, 아아아!”
그리 말하는 그녀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장박원을 높디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3품 고관의 적장손이자 소년수재이며 패기만만한 사내였는데, 뜻밖에도 그런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정말로 우쭐했고 그의 과분한 사랑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결국에는 엽연채를 밀어내고 그를 빼앗아 오는 데도 성공했다. 그때 자신은 더없이 의기양양해했고 그에게 시집갈 수 있게 됐으니 자신은 그야말로 인생의 승리자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자신이 시집온 사내가 고작 이런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 * *
크고 화려한 마차가 장씨 가문을 떠나 시끌벅적한 대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 엽연채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저희가 떠난 뒤 어떻게 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주 소란스러울 게다.”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무덤덤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채 아가씨는 뒤에서 몰래 잔꾀를 부렸지만 저흰 대놓고 당당하게 이야기했죠.”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걘 아직도 자기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나무 그루터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우리가 가만히 서서 당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본인이 가로챈 혼인이니 그 결과도 천천히 즐기라고 하죠!”
혜연이 신랄하게 조소했다.
밖에 있는 경인은 즐겁게 마차를 몰았는데, 동가東街에 이르자 도성 북쪽으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지 않고 엽씨 가문 쪽으로 향했다.
* * *
그 시각 엽씨 가문.
엽학문은 바깥뜰에 있는 서재에서 커다란 배나무 책상 앞에 앉아 글자를 쓰고 있었다. 전에 조정에 나가는 관리였을 때도 충분히 한가했는데 파면되고 나니 더욱 한가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보통 이 나이쯤 된 사람들은 손자의 재롱을 보며 노후를 즐기거나 새나 화초를 기르며 여유와 즐거움을 느꼈다. 하지만 엽학문은 기분이 착잡했다.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파면된 것이니 어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울적한 그는 평소 서재에 틀어박혀 바쁜 척을 했다.
“나리!”
이때, 즐거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그의 곁에서 먹을 갈아 주는 첨향이 안으로 들어왔다.
첨향의 지위는 시중을 들며 먹을 갈아 주는 여종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첩실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다 늙은 영감이 주책이라는 소리를 할까 봐 엽학문이 지금까지 그녀에게 첩실의 지위를 주지 않은 것뿐이었다.
첨향도 그다지 조급해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첩실의 지위가 주어지면 지금처럼 자주 서재에 와서 시중을 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붓글씨를 쓰던 엽학문은 그녀가 들어와도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큰아씨께서 오셨습니다!”
첨향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엽학문은 어리둥절해하며 얼른 붓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리 행동하면 자신이 엽연채를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동작을 딱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흥, 또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겠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붓을 천천히 내려놓더니 그제야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
엽연채가 후 부인이 되자 그의 오래된 많은 친구들이 처음에는 엽학문을 부러워했다. 그런데 누가 입을 놀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엽연채와 그의 사이가 친밀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자 그는 체면이 확 깎였다.
며칠 전에는 손씨와 엽승신도 엽연채가 그가 복직할 수 있도록 돕지 않았다는 말을 했으니, 엽학문은 엽연채에게 더욱 화가 났고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저와 엽연채의 사이가 친밀하지 않다는 사실이 더 확실하게 증명된 셈이니 그는 부끄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가 집에 온 것이다. 엽학문은 여전히 엽연채가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엽연채가 자신을 공경하는 모습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엽학문은 뒷짐을 진 채 서재를 나왔다. 그는 스스로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지만, 막상 발걸음이 무척이나 빨라 금세 안녕당에 도착했다. 첨향은 줄곧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문 입구에 다다른 엽학문은 예전처럼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릴 거고 그가 안으로 들어가면 묘씨와 나씨가 엽연채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생각과는 달리 안은 아주 조용했다. 엽학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뒷짐을 지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엽연채는 그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할아버지.”
“그래.”
엽학문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상석에 앉아 있는 묘씨를 보더니 그쪽으로 걸어가 옆에 앉았다.
“왜 이렇게 조용한 것이냐?”
엽학문이 운을 떼자 엽연채가 대꾸했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라니?”
엽학문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며칠 전에 일어난 일 말입니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보탰다.
“엽승덕이 요 며칠 제 어머니를 찾아가 치근덕거렸다고 합니다.”
그 말에 주름이 가득한 엽학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쳐다보자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제 어머니를 찾아가 치근덕거렸다니, 온씨는 ‘이혼’이라는 큰 하자가 있는 여인이 아니던가. 또 둘은 과거에 부부였는데, 치근덕거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찌 됐든 간에 엽승덕은 자신의 친아들이었다. 엽연채가 그를 무슨 역겨운 인간인 양 말하니 엽학문은 몹시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단속 안 하실 거예요?”
엽연채는 곱고 아름다운 얼굴로 살짝 정색을 했다.
엽학문은 엽연채가 또 자신을 공경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저도 모르게 화가 울컥 치밀어 얼굴을 푸르르 떨며 말했다.
“그 불효자는 진작에 집에서 쫓겨났다. 이미 우리 엽씨 가문 사람이 아닌데 내가 뭘 더 단속한다는 말이냐?”
그러자 엽연채의 얼굴에 살짝 냉기가 돌더니 그녀는 비웃음을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엽승덕이 어머니에게 치근덕거려 어머니와 재결합하게 되면 어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올 생각이세요?”
엽학문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성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런 고얀 것……! 내, 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느냐!”
옆에 있던 첨향이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큰아씨, 어떻게 그리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나리는 아씨의 친할아버지세요. 게다가 하룻밤 부부라도 만리장성을 쌓는 법인데 큰나리와 큰마님이 재결합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닙니까!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실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엽연채가 냉소 띤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일? 그쪽에선 당연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조금도 기쁘지 않거든! 게다가 난 그 일이 일어나게 놔두지 않을 거다. 그러니 할아버지도 일찍 단념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 말에 엽학문은 얼굴을 들 수 없었고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날 손씨가 엽승덕과 온씨의 재결합 이야기를 꺼낸 후로 그도 속으로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비록 그날 엽승덕을 집으로 들이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시켜 엽승덕을 지켜보게 했다. 과연 엽승덕은 온씨를 유혹하고 있었다.
엽학문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했다. 그는 속으로 엽승덕이 정말로 온씨와 재결합하게 되면 그녀를 집으로 데려올 거고 그리되면 또다시 자신들에게 약점을 잡힌 엽연채를 손안에 넣고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불효자가 정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전부인의 마음도 돌리지 못했고 엽연채마저 집안으로 득달같이 쫓아와 자신의 체면을 깎는 말을 쏟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