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9화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노란색 배자를 입은 엽이채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엽이채가 맹씨에게 예를 올렸다.
“어머님.”
맹씨는 냉랭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소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
엽이채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곤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는 걸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둘러댔다.
“낙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무섭게 ‘쨍그랑’ 소리가 났다. 맹씨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엽이채의 발아래로 냅다 집어 던진 것이었다. 엽이채는 깜짝 놀라 얼른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맹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낙자를 만들고 있었다고? 그럼 낙자를 만들면서 사람을 해칠 모의를 하고 있었나 보구나?”
그 말에 엽이채는 소스라치더니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맹씨는 냉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방금 전에 네 언니가 왔었다. 네 언니는 네가 엽승덕에게 돈을 주며 온씨에게 들러붙으라고 하는 걸 봤다고 하더구나.”
엽이채는 낯빛이 확 변했다.
‘그걸 들켜 버렸다니! 그것도 엽연채에게!’
또 엽연채였다.
‘그 악독한 계집애가 내 집안까지 손을 뻗쳤다니!’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언니와 저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언니가 이간질을 한 겁니다.”
엽이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더니 이내 눈물을 떨구었다.
“그만하거라!”
걸핏하면 눈물을 글썽이는 건 소첩들이나 하는 행동이었다. 맹씨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엽이채를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방금 전에 여월이가 널 부르러 갔을 때 네가 약을 써서 누군가를 모해하겠다고 하는 걸 들었다. 그런데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냐!”
엽이채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까 온 여종이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잡아떼려고 했다.
“어머님, 전…….”
이때, 밖에 있던 여종이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엽이채와 맹씨가 고개를 돌려 보니 장박원이 문을 지나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장박원 역시 저 멀리 엽이채가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낯빛이 확 변했다.
지금 장박원이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자기 방으로 돌아가 엽이채를 마주하는 것이었다. 반면, 자신과 엽이채의 혼사를 막으려고 했던 모친과는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엽이채를 보게 될 줄이야.
장박원은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떠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행동하면 엽이채 혹은 마음속의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갔다.
“박원아, 왔구나.”
맹씨는 아들을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
장박원은 무덤덤하게 대답했고 엽이채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하좌의 권의에 앉았다.
아내는 대청 중앙에 무릎을 꿇고 있고 남편은 의자에 앉아 있으니, 당연히 분위기가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부군!”
엽이채는 너무도 민망해 눈물이 잔뜩 고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도움을 구했다.
장박원은 이런 엽이채의 모습을 보자 그저 혐오감만 들었고 짜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테니, 결국 장박원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맹씨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냐고? 네 아내가 또 못된 짓을 벌였다.”
맹씨가 오늘 있었던 일을 장박원에게 이야기해 줬다. 그러자 장박원은 표정이 굳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당에 가서 두 시진 동안 무릎을 꿇은 다음 『금강경』을 50번 필사하거라.”
맹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벌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보니 엽이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에 맹씨는 더욱 화가 났다.
“어서 안 나가고 뭐 하느냐? 팔인대교라도 타고 나갈 생각인 게냐!”
맹씨의 말은 마치 수많은 돌처럼 엽이채에게 날아들어 그녀의 온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놓았다.
엽이채는 쉴 새 없이 몸을 덜덜 떨면서 저도 모르게 또 장박원을 쳐다봤다. 하지만 장박원은 엽이채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얼음물을 흠뻑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고, 온몸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요즘 엽이채는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본인이 버렸던 정혼자는 가장 젊은 후야가 되었고, 본인에게 좋은 혼사를 뺏겼던 엽연채는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후 부인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엽이채는 마음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엽연채가 남편을 성공시키는 여인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엽이채는 집안에서도 온갖 멸시를 당했고, 맹씨도 걸핏하면 트집을 잡았다.
장박원 또한 그녀의 처소를 자주 찾지 않았고 그녀는 그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가 이곳까지 찾아와 위세를 부리자 맹씨는 더욱 자신을 못살게 굴었고 장박원은 자신에게 냉담하게 대했다. 엽이채는 결국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지푸라기마저 놓친 양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엽이채는 ‘아’ 외마디 소리를 내더니 울부짖었다.
“부군, 왜 절 거들떠보지도 않으세요? 절 보호해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이 천박한 것, 이런 상황에서도 박원이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게냐!”
맹씨는 버럭 성을 냈다.
“네가 박원이를 현혹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너같이 재수 없는 물건을 우리 가문으로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맹씨가 자신을 재수 없는 물건이라고 욕하자 엽이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군… 제가 부군을 현혹했어요? 전 부군을 수도 없이 거절했는데 부군이 끊임없이 절 유혹했고 제게 서신을 보내 밖에 나와 놀자고 하셨잖아요. 그러지 않으셨다면 저와 부군이 그런 관계로 발전했을까요? 분명 부군이 먼저 절 아내로 맞이하시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후회하시는 거예요?”
장박원의 낯빛이 확 변했다.
‘지금 나더러 후회하느냐고 물었는가?’
그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모든 일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엽이채가 울며불며 하소연하는 모습과 눈물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짜증이 나고 혐오감이 들었다.
그동안 압박을 받아 온 엽이채가 자신의 감정을 전부 토해 내자 장박원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만하시오! 그때 당신이 도망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당신과 도망을 갔겠소?”
그 말에 엽이채의 뇌리에서 ‘쾅’ 하고 굉음이 울리며,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뭐라?”
맹씨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알고 보니 천한 네년이 박원이를 꼬드겨서 도망을 쳤던 거구나! 너였어, 역시 네가 그런 거였어! 어쩐지! 우리 박원이는 이리도 뛰어난 아이인데 왜 그런 엉뚱한 짓을 했나 했더니 다 천한 네년에게 미혹되어 그랬던 거구나!”
맹씨의 눈에는 잘못한 사람은 오로지 엽이채이고 그녀의 아들은 잘못이 없었다. 아들은 엽이채 때문에 잠시 삐뚤어졌던 것이다.
전에 맹씨는 엽이채가 장박원을 꼬셨다며 끊임없이 불평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장박원은 엽이채를 감싸고돌며 자신이 자발적으로 했다고 말해 도리어 맹씨의 화만 돋웠다.
그런데 오늘 장박원이 마침내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과연 엽이채가 그를 유혹한 것이 분명했다.
맹씨는 여태 꾹꾹 참아 왔던 울분을 거세게 토해 냈다. 마치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하듯 분노를 모두 폭발시켰다.
“이 천한 년! 네가 꼬드기지 않았다면 지금 박원이의 아내는 엽연채였을 것이다. 너같이 재수 없는 것이 아니고!”
그녀는 엽이채에게 달려들더니 엽이채의 머리카락을 틀어잡고 죽어라 잡아당겼다. 엽이채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반박했다.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결코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전 그냥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인데 부군이 필사적으로 저를 데리고 도망간 겁니다!
부군 스스로 엽연채가 제일 역겹다고 했어요! 절 가장 좋아하며 평생토록 절 보호해 주겠다고 했어요……! 부군 입으로 영원히 변심하지 않겠다면서요! 또 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어요! 그 말들은 전부 거짓이었나요?”
마지막 말을 뱉은 엽이채는 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엽이채가 과거 자신이 말했던 맹세를 늘어놓자 장박원은 두 귀를 꽉 틀어막았다. 단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 하나 인정하고 싶지 않대도 모두 사실이었다.
‘그때 어째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말인가…….’
“이 천박한 것. 감히 교활한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냐!”
맹씨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이 천박한 계집애가 아들의 인생을, 앞길을 망쳐 버린 것이었다.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이때, 누군가가 버럭 호통을 쳤다.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육십 대로 보이는 한 노인이 입구에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장찬이었다.
“할아버지…….”
그를 보자 장박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아버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맹씨도 장찬을 보더니 얼른 억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버님, 보십시오! 전에 아버님이 박원이가 잘못했고 나쁘다고 하셨죠! 그 모든 게 엽이채 때문임이 오늘 증명됐습니다! 이 천박한 계집애가 박원이를 유혹한 것입니다! 그래서 박원이가 이 재수 없는 계집애를 아내로 맞이한 겁니다.”
그녀가 그리 말하며 엽이채의 뺨을 두 대 올려붙이자 엽이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졌다.
“다들 그 입 다물거라.”
장찬은 화가 나 표정이 어두워졌고 맹씨를 쏘아보며 말했다.
“너는 집안의 안주인인데 체통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냐?”
그 말에 맹씨는 낯빛이 확 변했고 그제야 ‘흥’ 콧방귀를 뀌고는 엽이채를 홱 밀쳐 냈다.
장찬은 뒷짐을 진 채 한 걸음씩 다가오며 그들을 훑어봤다.
엽이채는 산발을 한 채 바닥에 엎드려 처량하게 눈물을 흘렸고, 맹씨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엽이채를 노려보고 있었다. 엽이채가 무슨 악랄한 죄라도 지은 죄인이라도 되는 양. 그리고 장박원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장찬은 젊은 아낙네처럼 억울한 표정을 짓는 장박원을 쳐다보니 또다시 잘생기고 의젓한 주운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극명하게 비교가 되니 장찬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