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8화
여종이 쟁반 하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위에는 청화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엽연채 옆에 놓인 배나무 찻상 위에 쟁반을 올려놨다.
“원래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맹씨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아무래도 장씨 가문과 이야기를 확실히 해야겠다 싶더군요.”
맹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후 부인이 말하는 이런 일이 뭔가?”
“하.”
엽연채는 고개를 숙이고 비웃음을 짓더니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청화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다시 고개를 든 엽연채는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명백한 조소를 흘렸다.
“그저께 저희 가문에 일이 있었는데, 장 부인께서도 들은 바가 있으실 겁니다.”
맹씨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아’ 소리를 냈다. 알고말고. 그렇게 큰 소란이 일어났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엽승덕 그 인간 말종은 먼저 주씨 가문에 가서 소란을 일으키더니 그로도 부족한지 다시 엽씨 가문을 찾아가 소란을 피웠다. 그때 소식을 접한 자신은 한창 흥미진진해했다.
아주 재미난 구경거리가 펼쳐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엽균이 나타나 상황을 정리해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생각을 하니 맹씨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도 또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 어렴풋이 들은 것 같네. 엽승덕이 주씨 가문으로 찾아가 소란을 피웠다고 하지.”
“장 부인은 모르고 계시는군요.”
엽연채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엽승덕이 저희 가문 앞에서 소란을 피운 후 엽씨 가문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당연히 그 사람을 용서하는 걸 원치 않으셨고요.
그런데 둘째 숙부 내외가 할아버지께 엽승덕을 집안으로 다시 들여야 한다고 바람을 넣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두 분이 저와 엽씨 가문의 관계가 친밀하지 않다고 하셨다네요? 그러니 엽승덕을 집으로 들여 저희 어머니와 재결합하게 만든 뒤 제가 친정을 돕게 해야 한다고 설득하셨답니다.”
이 말을 들은 맹씨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손씨의 방법에 자신도 적극 동의하는 바였고, 엽연채가 이 술수에 말려들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가 자신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고 자신과 손씨는 사돈 관계이니, 결과적으로 자신의 체면이 구겨진 셈이 되었다.
맹씨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무마했다.
“분명 오해가 있었을 거네.”
“오해요?”
엽연채는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검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그때 그 자리에서 그분들이 한 말을 똑똑히 들은 사람이 여럿입니다. 그런데도 오해라는 말씀입니까?”
맹씨의 표정이 확 굳어졌으나 엽연채는 상관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정말 가소로운 말입니다. 제가 언제 친정을 돕지 않았습니까? 제 기억으론 고모가 선을 볼 때 저와 이채가 함께 고모에게 맞선 상대를 소개해 줬습니다. 이채와 제부는 고모에게 반편이를 소개해 줬고 전 고모에게 탐화를 소개해 줬죠. 이건 도움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나 보죠?”
그 일이 언급되자 맹씨의 표정은 또다시 어두워졌다.
“둘째 숙부 내외는 제가 밉고 질투가 나니까 일부러 이러시는 겁니다.”
엽연채가 코웃음을 치자 맹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엽씨 가문 일이네. 손씨 부부가 내 사돈이긴 하나 후 부인의 핏줄은 숙부와 숙모이며 더욱이 엽씨 가문 노야의 아들과 며느리이지. 가족은 그쪽이 가족이네! 일이 있거든 엽씨 가문 사람들끼리 해결하면 될 일이지,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후 부인이 내게 화풀이를 하다니! 허!”
“맞습니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건 원래 저희 친정 일이니 장씨 가문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죠. 그런데 둘째 숙모와 이채는 과연 모녀답게 둘 다 절 눈에 거슬려 하며 기어이 못된 짓을 벌이려고 하더군요!
이채가 남몰래 엽승덕과 손을 잡았습니다. 엽승덕에게 돈을 주며 그 사람이 저희 어머니께 치근대는 걸 돕고 있어요. 이제 말씀해 보시죠. 이 일이 장씨 가문과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게 정말인가?”
맹씨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오해가 있는 것 아닌가?”
맹씨는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심 엽연채에게 재수 없는 일이 생기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뒤에서 못된 짓을 꾸미는 그 검은 마수가 장씨 가문 사람의 것이고 엽연채가 이를 대놓고 지적한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정말이지 이쪽의 체면은 눈곱만큼도 봐주지 않고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격이었다.
맹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부정했다.
“분명 오해가 있을 걸세.”
“오해가 아닙니다!”
엽연채가 싸늘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날 엽승덕이 소란을 일으킨 후 제가 사람을 시켜 그 사람의 뒤를 쫓게 했습니다. 그런데 엽이채가 그 사람에게 돈을 주는 모습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그 사람에게 있는 힘을 다해 제 어머니에게 매달리라고 말하더군요. 오랫동안 매달리게 되면 어머니의 평판에 흠집이 갈 테니 재결합하기 싫어도 그리해야 할 거라고 했습니다! 매달리는 게 안 먹히면 약을 쓰면 되고, 그럼 일이 성사되지 않을 수가 없다고도 했죠.”
“그 망할 것이!”
듣다 못한 장만만이 냉랭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만만아!”
맹씨는 낯빛이 확 변했다. 장만만이 이렇게 욕을 하면 엽이채가 이 일을 했다고 인정하는 셈 아니겠는가? 물론 자신도 엽이채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만 이 일은 장씨 가문의 평판과 관계된 일이었다.
“이 일은…….”
맹씨는 말을 더 꺼내려고 했다.
“장 부인.”
그런데 엽연채가 검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이곳은 공당이 아니니 증거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은 필요 없습니다. 전 그저 제가 아는 걸 말하러 온 것뿐입니다. 믿기지 않으면 믿지 마세요. 제가 이간질하고 있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맹씨는 부끄러우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다만…….”
엽연채는 아리따운 얼굴로 매섭고 날카로운 표정을 지으며 강조했다.
“장 부인께서 집안사람들을 잘 단속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손으로 넘어오지 않게 말이죠. 저희 후야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 말에 맹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건 노골적인 협박 아닌가. 그녀는 화가 나 몸을 부들부들 떨며 엽연채를 죽어라 노려봤다.
엽연채는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미소를 짓더니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그런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조금도 물러서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그 속내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 난 지금 권세로 당신을 누르려는 거야. 당신의 체면 따윈 봐주지 않고 협박하는 건데, 뭐 어쩔래?’
자신이 장씨 가문에 빌붙어 먹고사는 사람도 아닌데 꿀릴 게 뭐가 있겠는가. 자신은 대놓고 이 일을 밝히고 엽이채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며, 면전에서 그들에게 경고하러 온 참이었다. 당연히 맹씨에게 엽이채를 손봐 주라는 뜻이 담겨 있기도 했다.
이렇게 한들 뭐 어떠한가. 이런 지위에 올랐고 이런 신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신들이라고 권세로 상대를 억누르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자신과 주운환이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오른 건 사람들이 자신들을 업신여길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또 하고 싶은 건 꾹 참을 필요 없이 하기 위해서였다.
“전 이 말을 하기 위해 왔고, 다 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그리 말하고는 서슴없이 자리를 떨쳤다.
맹씨는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했다.
엽연채는 맹씨와 장만만에게 고개만 까딱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가 떠난 방향을 쏘아보고 있는 맹씨는 낯빛이 어둡고 창백했다.
‘빌어먹을! 박원이와 정혼했을 땐 내 앞에서 아주 조신하게 굴었는데 이젠……! 감히 저따위로 말하다니! 감히 저따위로 오만방자하게 굴다니! 감히 내 체면을 깎다니! 난……!’
맹씨는 험한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당연했다. 엽연채의 남편이 황제가 현재 가장 총애하는, 무려 정2품 후야였다. 그에 반해 장찬의 직위는 그보다 무려 두 단계나 아래였다.
“가서 엽이채 그 망할 것을 불러오너라!”
맹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옆에 있던 여종은 몸을 떨더니 얼른 돌아서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시각, 엽이채는 자신의 처소에서 귀비의에 비스듬히 앉아 류아와 의논을 하고 있었다.
“온씨 그 빌어먹을 여편네가 엽승덕에게 넘어갈 마음이 있다고 해도 엽연채가 전력을 다해 막으려고 할 거다. 그러니 미리 약을 준비해 두는 게 좋겠구나.”
엽이채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 이후를 상상했다.
“그리되면 그 빌어먹을 여편네와 엽승덕이 함께 뒹굴게 될 거다. 그럼 우린 고모가 묘기화의 간통 현장을 잡았던 것처럼 사람을 써서 그 집 안으로 들이닥치게 하면 된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현장을 잡는 거지.
저런, 백성들이 모두 어엿한 진서후의 장모가 얼마나 굶주렸는지 보게 되겠구나! 백주 대낮에 전남편과 함께 뒹굴고 있는 모습을 말이지.”
“좋은 생각이십니다.”
류아도 흥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렇게만 하면 온씨를 너무 봐주는 것 같단 말이지.”
엽이채는 눈알을 굴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거지 한 명을 더 넣어야겠다! 쯧쯧……. 세 명이 함께 뒹굴게 되면 온씨의 평판은 끝장나는 거지. 엽승덕은 온씨와 재결합하고 싶어 하고 온씨는 마지막 남은 평판을 지켜야 하니 자연히 재결합을 택하게 될 거야.
하지만 정말 엽씨 가문으로 돌아간다 해도 숙이고 들어가게 되는 거지. 앞으로 온씨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괴롭힘을 당하게 될 거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큰마님, 주인마님께서 부르십니다.”
여종은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는 바로 그곳을 떠났다.
엽이채는 낯빛이 싹 변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맹씨의 처소로 향했다.
엽이채를 부르러 왔던 그 여종은 한발 먼저 맹씨의 처소로 돌아가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방금 전에 큰마님의 처소에서 큰마님과 류아가 무슨 약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빌어먹을 여편네와 엽승덕이 함께 뒹굴게 만들어 그 여편네를 다시 엽씨 가문으로 돌려보낼 거라고 했습니다. 또 거지 한 명도 써서 그 여편네가 죽을 때까지 괴롭힘을 당하게 만들 거라고요.”
맹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엽연채가 찾아와 경고를 하지 않았다면 이 말을 듣고 엽이채더러 악독하다고 욕하면서도 조금은 설레고 기대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에 엽연채의 세 치 혀로 뺨을 냅다 후려 맞았으니 어디 그럴 수 있겠는가.
지금은 엽이채의 독살스러운 꿍꿍이에 놀라서 넋이 나가 버렸다. 맹씨는 엽이채를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내 주겠다고 이를 갈았다.
‘이 망할 것. 날 망신시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