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5화
한편, 맞은편의 작은 골목에는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채 위에 앉아 있던 경인이 고개를 돌려 엽미채에게 말했다.
“셋째 아가씨, 어서 돌아가시죠.”
“그래.”
엽미채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엽승덕과 마주치게 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엽승덕이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집안사람들에게 사정을 좀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면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전에도 외출 좀 하려고 하면 엽승덕이 몇 번씩이나 앞을 가로막아 은화 몇 냥을 던져 주고 도망갔어야 했다.
경인은 엽미채를 집으로 데려다준 뒤 마차를 몰고 주씨 가문으로 돌아왔다. 귀가한 그는 곧바로 엽승덕의 상황을 엽연채에게 보고했다.
정원의 파초나무 아래에서 화본을 보고 있던 엽연채는 이야기를 전해 듣더니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뻔뻔하기 이를 데 없네요.”
추길이 냉랭한 목소리로 흉을 보는데, 주운환이 대문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추길은 얼른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나리, 돌아오셨군요.”
엽연채도 대단히 기뻐하며 화본을 내려놓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운환을 반겼다.
“부군.”
“네.”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을 보자 주운환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을바람이 점점 더 세게 불어 춥습니다. 별일 없으면 밖에 앉아 있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에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밖에 앉아 있는 건 주운환이 집에 돌아왔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보기 위해서였다.
어째서인지 자신은 요즘 매일같이 주운환이 집에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매일 그가 집에 돌아올 때가 자신이 가장 즐거워하는 순간으로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기쁘기 한량없었다.
“왜 대답 안 합니까?”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 안에 꽉 끌어안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
엽연채는 조그만 머리를 그의 가슴 앞에 대고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쿡쿡 찌르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여기서 부군을 보고 있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한 주운환은 마음이 훈훈하고 따뜻해졌다.
“그럼 이 방향에 커다란 창문을 하나 만들어야겠군요.”
“괜찮아요.”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새집이 보수가 끝나면 곧 그곳으로 이사 갈 거잖아요. 굳이 여기서 또 공사를 할 필요는 없어요. 괜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 거예요.”
그러자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
“정륭가 쪽에는 이런 창문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제가…….”
엽연채는 고개를 들더니 그를 쳐다보며 눈웃음을 쳤다.
“사람을 시켜 바꾸라고 했어요.”
주운환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시원하게 소리 내 웃었다.
“하하, 내 부인은 어쩜 이리 똑똑한지.”
“전 항상 똑똑했어요!”
엽연채도 결국 그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추길과 혜연은 닭살 돋는 두 부부의 애정행각을 지켜보고 있었다. 추길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리와 마님은 하루 종일 찰싹 붙어 계시네.”
“적응하면 괜찮을 거야.”
“그래, 그럼 난 물을 길으러 갈게.”
혜연의 무덤덤한 대꾸에 추길은 옅은 한숨을 쉬더니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따뜻한 물을 가져온 추길이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부부는 창문 아래에 놓인 태사의에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찻상 위에는 벽옥 다기가 놓여 있고 엽연채는 차를 우리고 있었다.
추길이 놋쇠 대야를 들고 다가서며 말했다.
“나리, 어서 세수하세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옆에 있는 물이 든 대야를 세검가자洗臉架子 위에 올려놓은 후 잘 개킨 수건을 주운환에게 건넸다.
“싫다.”
주운환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턱을 괸 채 엽연채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 아내가 내게 바둑을 가르쳐 준 지 한참이 지났으니 우린 바둑부터 한 판 둘 것이야.”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밖에 바람이 세게 불어 얼굴이 온통 먼지투성이에요.”
주운환이 자기 얼굴을 쓱쓱 문질러 보니 먼지는 묻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엽연채는 추길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은 다음 손수건을 물에 적셨다.
“자, 닦아요.”
주운환은 엽연채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은 다음 대야에 집어 던졌다. 그러자 물이 살짝 튀어 추길의 옷이 조금 젖었다.
“가서 옷도 갈아입어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그를 밀어 침실로 들여보냈다.
추길이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는 주운환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겉옷을 벗겨 주고 있었다. 추길은 놋쇠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가 물을 쏟았다.
추길은 파초나무 근처에 있는 수풀에 세숫물을 쏟은 다음,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주운환이 벗은 옷을 챙겨 뒤뜰로 향했다.
추길이 빨래를 하고 있는데 혜연이 걸어오더니 말을 붙였다.
“어? 왜 지금 빠는 거야? 내일까지 모았다가 빨지.”
“바람이 세게 불길래. 지금 널어놓으면 내일이면 다 마를 거야.”
추길은 그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였다.
“참, 오늘 큰도련님이 돌아오신 걸 보니 마님께서도 돌아오셨겠네. 우리 마님을 뵈러 가자!”
“그래! 좋은 생각이야!”
“가자!”
추길은 한다고 하면 당장 밀어붙이는 성격이라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나무 대야 안에 집어넣은 후 혜연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차간으로 들어가자 나한상 위의 탁자 위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고, 엽연채와 주운환은 양쪽에 앉아 대국 중이었다.
추길과 혜연이 기쁜 얼굴로 달려왔다.
“마님, 오늘 마님 어머님도 돌아오셨겠죠?”
“그럼! 그 어리석은 오라버니가 돌아온 걸 보니 어머니도 분명 돌아오셨을 거야.”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너희들에게 말하려던 참이다. 내일 어머니를 뵈러 가자.”
주운환은 장모님이 돌아왔다는 말에 얼른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일 퇴청한 후 나도 함께 갑시다.”
엽연채는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아, 어서 가서 경인이를 어머니 댁으로 보내렴. 내일 어머니를 뵈러 가겠다고 전하라고 해.”
혜연은 얼른 알겠다고 대답한 뒤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 * *
이튿날 정오 즈음, 주운환이 퇴청하자 부부는 선물을 들고 함께 장명가로 향했다.
그 시각 추씨 가문.
채 마마는 일찌감치 수화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고 화려한 마차가 안으로 들어오고 마차를 몰고 있는 사람이 경인인 걸 보더니 그녀는 얼른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님, 아씨와 사위가 오셨습니다!”
방 안에 있던 온씨는 그 소리에 들고 있던 책을 얼른 내려놓고 머리를 매만진 후 함박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수화문을 넘어서니 미끈한 몸매의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열여덟 살 정도 됐을까. 앳된 얼굴의 그는 구름 문양이 들어간 검은색 금포를 차려입었는데, 옷의 가장자리 부분에 진홍색 장식이 들어가 있고 거기에 회녹색 연구뇌문連勾雷紋(소용돌이가 이어져 있는 것과 유사한 문양)이 들어간 황금 허리띠를 두르고 있어 존귀하고 비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고개를 살짝 들고 검은 머리카락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훤칠한 몸매에선 우아한 분위기가 풍기면서도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서 있는 듯한 늠름한 기상이 넘쳐흘렀다. 화려하고 부티 나는 분위기와 수려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온씨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곧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의 커다란 손 위에 올려졌고, 이어 투명하게 반짝이는 진주가 달려 있고 연꽃 문양이 수놓아진 신발 한 짝이 밖으로 나오더니 오밀조밀한 꽃문양이 수놓아진 수무군水霧裙이 아래로 드리워졌다.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한 소녀가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온씨가 있는 쪽을 쳐다보고는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눈이 부시게 찬란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더없이 아리따운 모습이었다.
온씨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두 눈이 시큰거리며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딸이 득의만면한 표정을 짓고 있고 뛰어난 인재인 주운환이 그녀를 이리도 살뜰히 보살피니, 온씨는 가슴속에서 뭔가가 천천히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딸은 아주 행복하다!’
“장모님.”
주운환은 온씨를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렴!”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엽연채는 앞으로 다가가 온씨의 팔짱을 꼈고, 모녀는 수화문으로 들어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 왜 이렇게 갑자기 돌아오신 거예요? 저에게도 미리 알려 주시지 않고.”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지.”
온씨는 손가락으로 엽연채의 코끝을 살짝 튕겼다.
그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본채의 낭하에 서 있는 엽균의 모습이 엽연채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엽연채 일행을 보더니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먼저 다가왔다.
“연채야, 매부.”
“형님.”
주운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엽균은 엽연채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이라 주운환은 아직까지 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엽균을 난처하게 만들면 온씨의 마음이 좋지 않을 테니 예의를 갖추었다.
“오라버니.”
엽연채도 인사를 건넸다. 속으로는 콧방귀를 뀌며 ‘어제 드디어 사람다운 일을 했지.’ 하고 생각했다.
“다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온씨는 그런대로 잘 지내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서차간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온씨는 엽연채와 탑상에, 주운환과 엽균은 하좌의 권의에 앉았다. 그러자 채 마마가 얼른 다가와 차를 권했다.
온씨는 주운환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이며 사과했다.
“정말 미안하네. 자네가 도성으로 돌아와 후야에 봉해지는 그런 중요한 순간에 내가 자리하지 못했으니.”
“그때 장모님은 편찮으시지 않았습니까. 저 때문에 어머님의 병이 위중해졌다면 제가 죄를 짓는 거지요.”
주운환이 정중하게 그녀를 달랬다.
엽연채는 두 사람이 어색하긴 해도 대화를 이어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잠시 후, 정오가 되자 채 마마가 얼른 여종들에게 밥상을 차리게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온씨는 엽연채의 생활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성정이 활달한 추길을 불렀다.
“요즘 주씨 가문에서 어떻게 지내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