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84화 (484/858)

제484화

손씨가 창백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 확실히 큰아주버님께서 과하시기는 했습니다…….”

엽학문은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손씨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과하기만 했던 게 아니죠. 그야말로 짐승만도 못했습니다! 저희 엽씨 가문을 이렇게 몰락하게 만들다니요! 저희 엽씨 가문 조상님들의 위업을 무너뜨렸죠! 지금 저희 가문이 어떤 꼴이 됐습니까……. 사람들이 전부 저희 가문을 비웃고 있습니다…….”

“됐다. 그만하거라.”

엽학문은 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고 화가 나서 치가 다 떨렸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주버님이 공을 세워 속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손씨는 그 정도로 멈출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 보세요. 지금 연채는 후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저희는 여전히 몰락한 상태예요! 연채는 집안을 도울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다 연채가 저희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죠.”

엽학문은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그는 진작부터 엽연채가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는데 지금 손씨가 이 이야기를 꺼내자 분노가 한층 더 거세졌다.

“사이가 좋지 않다니!”

묘씨는 말썽을 못 일으켜 안달이 난 손씨를 속으로 욕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연채의 친오라비가 아직 집에 있는데 그 아이가 어찌 집안을 돕지 않겠느냐?”

“친오라비요? 하하. 아이고 배꼽이야. 어머님, 균이가 전에 연채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생각도 안 하시나 봐요?

연채는 단 한 번도 균이를 용서한 적이 없어요! 그저 형님의 얼굴을 봐서 균이를 적대시하지 않는 겁니다. 균이가 집에 남아 있다고 해도 연채는 집안에 냉담할 겁니다. 연채는 여전히 엽씨 가문을 짓밟고 싶어서 안달일 텐데, 어머님은 연채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 말에 엽학문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지금 연채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바로 형님이에요. 그러니!”

손씨는 두 눈을 살짝 반짝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큰아주버님을 집으로 데려오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큰아주버님도 개과천선하셨어요. 탕아가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천금으로도 못 할 일이죠!

이제 형님에게만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형님이 집으로 돌아온다면 큰아가씨와 엽씨 가문의 관계는 다시 친밀해질 겁니다. 그때 형님이 말 몇 마디만 해 준다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엽학문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온씨와 엽승덕이 재결합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반면 묘씨는 낯빛이 싹 변했다.

“지금도 충분히 도와주고 있지 않느냐? 넌 그 애가 뭘 더 어떻게 도와주길 바라는 것이냐? 영교만 봐도 연채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떤 집안으로 시집을 갔을지 모른다.”

그러자 손씨의 낯빛이 변했다.

“그 혼사는… 진씨 가문에서 먼저 마음에 들어 한 겁니다. 연채는 그저 기회를 봐서 거들어 주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연채는 원래부터 영교 아가씨와 사이가 좋았는데 도와주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게다가… 그래 봤자 탐화 아닙니까?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그래 봤자 육품 소관에 불과합니다.”

“탐화를 깔보는 것이냐? 그럼 박원이는 시험을 봐서 어떤 결과를 얻었느냐?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공부를 한 건 다 공명을 얻기 위함이 아니더냐?”

묘씨는 냉소를 짓더니 이렇게 반박했다.

“많은 고관들이 과거 시험 출신인데 너는 이를 업신여기는 것이냐? 그럼 넌 어서 장씨 가문으로 돌아가 장박원에게 시험을 보지 말라고 하지 그러느냐!”

손씨는 묘씨가 장박원을 언급하자 순간 말문이 막혔고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게다가 지금 어머니인 나조차 영교가 시집을 잘 갔다고 생각하는데, 넌 이렇게 생트집을 잡아야겠느냐?”

묘씨는 그리 말하며 엽학문을 쳐다봤다.

“나리, 안 그렇습니까?”

엽학문은 그저 냉담하게 ‘그렇소.’ 하고 대꾸할 뿐이었다. 엽학문은 저 또한 학문을 익힌 사람인지라 수학하는 자를 아주 높이 평가했고, 또 본인은 이갑 진사 출신에 불과하기 때문에 장원이나 탐화를 특히나 선망했다. 엽영교가 탐화에게 시집간 건 정말로 대단하고 체면이 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벼슬길을 포기한 상태고 복직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손씨의 말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동요하면서 묘씨의 말에 시큰둥하게 대답한 것이었다.

묘씨가 이어서 말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채도 시집을 잘 가지 않았느냐? 연채에게 밀릴 것도 없지. 그 댁도 정3품 대신의 집안이니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도 장씨 가문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시지. 그런데 어째서 이채가 집안을 돕게 하지는 않는 거냐?”

손씨의 표정이 더욱 가라앉았다.

“장씨 가문은…….”

그녀는 지금 장씨 가문에서 엽이채의 처지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런 부끄러운 일을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겠는가? 그저 입을 벌린 채 속으로 화를 삭일 따름이었다.

그에 묘씨가 웃으며 조목조목 이치를 따졌다.

“지금 장씨 가문에서 이채의 처지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 연채의 처지는 좋은 것 같으냐? 어쨌든 간에 이채는 여전히 적장손 며느리이고 적장자도 낳았다. 그에 반해 주운환과 적모는 아무래도 장박원과 맹씨처럼 친밀하지 않다.”

“처지 같은 건 둘째 치고… 그…….”

손씨는 묘씨의 말에 맞설 도리가 없어 이야기를 다르게 돌릴 수밖에 없었다.

“주씨 가문은 지금 황제 폐하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으니 당연히 장씨 가문과는 비교를 못 합니다. 그런데도 연채는 아버님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친정집이 다시 후부의 작위를 되찾을 방법은 생각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손씨의 이 말이 엽학문에 가슴에 확 와 닿았다. 그러나 묘씨가 화가 난 목소리로 손씨를 크게 나무랐다.

“지금은 잘나가지만 전에는 얼마나 힘들었느냐. 이채는 처지가 나빠졌지만 전에는 얼마나 떵떵거리며 지냈고! 회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얼마나 사랑을 듬뿍 받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리께서 좌천되었을 때 그 앤 어째서 몸을 사린 것이냐? 황제 폐하 앞에서 힘 좀 써서 나리의 계급을 올려 달라고 장찬에게 부탁한 적이나 있느냐!”

그 말에 엽학문은 싸늘한 눈빛으로 손씨와 엽승신을 쓱 쳐다봤다. 자신이 좌천됐을 때 분명 엽이채는 장씨 가문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도 그녀는 제 안위만 걱정하며 이쪽 일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손씨와 엽승신은 대번에 낯빛이 창백해졌다. 손씨는 머쓱해하면서도 핑계를 댔다.

“아무래도… 두 다리 건너야 하니 이채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채가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면 박원이를 시켜 힘을 쓰면 되지 않았느냐! 박원이가 장찬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게 했으면 분명 먹혔을 게다!”

묘씨가 웃는 낯으로 계속 정곡을 찔러 대자 손씨는 어두운 얼굴로 또다시 구실을 찾았다.

“친정에 너무 마음을 쏟으면… 박원이가 언짢게 생각할까 봐 그런 겁니다! 그럼 부부간의 감정을 해쳤을 겁니다.”

“어머. 이채가 그렇게 생각했던 거구나! 부부간의 감정을 해칠까 봐 친정을 도울 엄두를 못 낸 거였어!”

묘씨는 허허하더니 버들잎 모양의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세웠다.

“지금 넌 연채에게 친정을 도우라고 자꾸 그러는데, 그럼 운환이가 언짢게 생각하여 부부간의 감정을 해치지는 않을까 그 걱정은 안 되는 것이냐?”

드디어 손씨도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너는 온종일 쓸데없는 말만 장황하게 늘어놓고 자기도 못 하는 일을 남한테 하라며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구나! 항상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자비로워!”

묘씨는 냉소를 지었다. 엽영교가 시집을 잘 갔으니 이젠 자신도 크게 걱정하지 않고 이렇게 손씨에게 쏘아 댈 수 있었다.

묘씨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엽학문은 엽승덕이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해도 체면 때문에 차마 그리할 수가 없었다. 엽승덕을 용서한다면 자신은 온종일 엽연채에게 해를 입힐 생각만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었다.

엽승신은 싸늘한 눈빛으로 손씨를 쏘아보더니 호통을 쳤다.

“이 망할 여편네! 하루 종일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지.”

그러고는 묘씨를 향해 공수하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나섰다.

“어머니, 이 사람이 그저 불평 몇 마디 한 겁니다. 게다가 이 사람이 어찌 생각하든 간에 저희가 말하려던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갔는데 지금 형님이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저희가 상의하려던 건 형님의 사과를 받아들일지 여부였습니다. 어쨌든 형님은 저희 핏줄이니…….”

엽승신은 엽학문이 이미 자신들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지만 단지 체면 때문에 차마 그리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엽승신이 판을 깔아 주자 엽학문은 축 늘어진 얼굴을 파르르 떨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엽학문이 동의하려던 찰나, 갑자기 묘씨가 목청을 드높이며 그의 말을 끊었다.

“연채가 큰애를 용서할 생각이었다면 방금 전에 주씨 가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큰애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겠죠. 연채는 용서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큰애를 역겹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나리는 큰애를 집안으로 들이시려는 겁니까?”

그 말에 엽학문은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엽승덕이 온씨와 재결합할 수 있을지 여부도 아직 미지수였다. 만약 재결합이 성사되지 않으면 엽연채는 친정을 죽도록 원망할 것이었다.

화가 난 엽학문은 손씨를 노려보더니 다시 써늘한 눈빛으로 엽승신을 흘겼다.

“아직도 여기 서서 뭐 하는 것이냐? 어서 가서 그 불효자를 쫓아내거라!”

엽승신은 표정이 굳어졌으나 하는 수 없이 불만스러운 모습으로 그곳을 떠났다. 손씨도 더는 머물러 있을 면목이 없어 엽승신을 따라 함께 밖으로 향했다.

안녕당을 나오자 엽승신은 매서운 눈빛으로 손씨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도 참. 말 하나 제대로 못 하오?”

손씨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엽승신은 집사를 찾아가 엽승덕을 쫓아내라고 지시했다.

어쨌든 자신은 엽승덕의 친동생이니 직접 나가서 엽승덕을 쫓아내면 사람들은 분명 혈육 간의 정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욕할 것이었다.

엽씨 가문 대문 밖에는 이미 사람들이 몰려들어 엽승덕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인파 속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엽승덕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때, 덜커덩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리더니 오십 대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는 엽승덕을 쳐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리, 어째서 주인나리를 이리 괴롭히시는 겁니까? 주인나리는 나리의 이름을 들으시더니 화가 나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으시다면 이곳에서 멀리 떠나세요. 괜히 주인나리의 성질을 돋우지 마시고요.”

집사는 그리 말하고는 ‘쾅’ 소리를 내며 대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백성들의 비웃음 소리가 더욱 커졌다.

엽승덕은 이곳에 더 머무를 수 있는 염치가 없어, 풀 죽은 모습으로 급히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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