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3화
백성들은 전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엽균은 거창한 이치를 들먹이는 게 예전 그대로였다. 차이라면 전에는 잘못된 일에 그 이치를 적용했지만 이제는 올바른 일에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엽승덕은 얼굴이 화끈거렸고 무릎을 꿇고 있는 바닥이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지금으로선 계속 무릎을 꿇고 있기도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애매했다.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엽연채는 작게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사과를 하고 싶으시면 집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께 무릎을 꿇으세요! 이 일로 할아버지는 후야의 작위를 잃고 관직도 삭탈됐어요. 원래 멀쩡한 후부이자 명문가였던 저희 엽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다 아버지 때문이에요!
그러니 아버지가 가장 죄스러워야 할 대상은 엽씨 가문과 엽씨 가문 조상님들 아닌가요? 정말로 사과하고 싶으시다면 엽씨 가문으로 돌아가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할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세요.”
엽연채는 엽승덕이 가장 미안해야 할 사람은 사실 온씨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런 말을 꺼낼 수 없었기에 엽학문을 끌어들여 방패막이로 삼았다. 엽학문은 ‘효’라는 말로 엽승덕을 억누를 수 있는 완벽한 패였다.
일이 이렇게 흐르자 구경꾼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정말로 사과를 하려면 엽씨 가문을 찾아가고 아버지를 찾아가야지, 이곳에 와서 자기 딸에게 무릎을 꿇어 뭐 하겠는가?
엽승덕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자신이 엽연채에게 무릎을 꿇는 건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니 백성들은 자식에게 무릎을 꿇은 친아버지를 동정할 테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 엽학문에게 무릎을 꿇으면 엽학문이 그를 용서하지 않아도 이는 당연한 일에 불과했다. 하염없이 꿇고 있다가 설령 두 다리가 부러진다고 해도 백성들은 자신을 조금도 동정하지 않을 것이었다.
한편, 진씨는 일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 화가 났지만 겉으로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렇게 오셨으니 셋째 네가 사돈과 함께 친정에 갔다 오거라.”
난처해하던 엽승덕은 이 말을 듣더니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였다! 엽연채가 저와 함께 엽씨 가문으로 돌아가면 어쩌면 집에서 머무를 수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반박했다.
“어머님, 그건 안 될 말씀이죠. 저희 아버지는 진심으로 성의를 담아 사과를 하시려는 거 아닙니까?”
그녀는 그리 말하며 천천히 계단으로 올라가 진씨 옆에 서더니 몸을 돌려 엽승덕을 내려다봤다.
엽승덕은 표정이 확 굳어졌고 순간 엽연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진심으로 사과하려는 게지.”
“네, 그럼 됐어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제 진서후 부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따라가게 되면 할아버지는 제가 권세로 할아버지를 억누르려 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입으로는 용서해 달라고 해도 그건 진심이 아닌 게 되는 거죠! 어쩌면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앓아누우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아버지 혼자 돌아가서 무릎을 꿇어야 성의를 보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오라버니도 있지 않습니까?”
“가요! 집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으신다면서요? 여기서 이렇게 소란을 피워서 뭘 어쩌고 싶으신 거예요?”
엽균은 미간을 찌푸리며 엽승덕을 잡아당겼다.
“사실 아버지는 사과하고 싶으신 게 아닌 거죠? 밖에서 가난하게 지내는 게 두려우니 기어이 연채를 끌고 같이 집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용서하게 만들려는 거잖아요! 아버지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 노야로 지내고 싶으신 거죠?”
백성들은 모두 표정이 굳어졌고 순간적으로 이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됐다. 엽균의 말 한마디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 준 것이다. 그들은 모두 멸시하는 얼굴로 엽승덕을 쏘아봤다.
엽승덕이 한 말이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사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 전처럼 부귀하게 지내고 싶은 것이었다.
“안 가실 거예요?”
독촉하는 엽균의 목소리에서 언짢음이 묻어났다.
엽승덕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도가 폭로되자 이곳에 남아 있을 면목이 없었다. 그는 엽균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결국 꼴사나운 모습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더니 돌아서서 대문으로 들어갔다.
진씨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주묘서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탐탁지 않은지 진씨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머니, 저 여인은 원래 말을 잘하잖아요. 이런 더러운 일에 저희도 마음 쓰지 말아요. 제가 태자 측비가 되면 당당하게 저 여인을 제 앞에 무릎 꿇릴 거예요! 저희는 계획을 세울 필요도 계책을 내놓을 필요도 없어요. 제가 무릎 꿇으라고 하면 저 여인은 감히 거역할 수 없을 거예요! 전 황실 사람이니까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득의양양한 기색을 보였고 진씨는 그제야 낯빛이 좀 누그러지더니 미소를 지으며 동조했다.
“네 말이 맞다.”
그녀는 주묘서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고 사람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대문은 천천히 닫혔다.
백성들은 문이 닫히는 걸 보더니 그제야 흩어졌고 걸어가면서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엽연채 일행과 집 안으로 들어간 엽미채는 다시 마차 위로 올랐다.
“경인아, 미채를 집에 좀 데려다주렴.”
“예.”
경인이 대답한 뒤 작은 말채찍을 내려치자 크고 화려한 마차가 달달 소리를 내며 시끌벅적한 거리를 지나갔다.
한편, 엽균은 엽승덕을 끌어당겨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고 잠시 후 그들은 엽씨 가문에 도착했다.
마차가 대문 앞에 멈춰 서자 엽균은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엽승덕에게 말했다.
“집에 도착했어요! 진심을 다해 제대로 사죄를 드리고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으세요.”
엽승덕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는 욕만 얻어먹고 아무도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 이런 일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엽승덕은 할 수 없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쿵’ 소리를 내며 대문 밖에서 무릎을 꿇었다.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누군가가 문 앞에서 무릎을 꿇자 깜짝 놀라더니 얼른 주위로 모여들었다.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전부 이웃이라 대부분 엽승덕을 본 적이 있었고 그가 벌인 일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그를 보게 되자 사람들은 대번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 왜 여기서 무릎을 꿇고 있는 거지? 그 뻔뻔한 외실과 함께 산다고 하지 않았어?”
“그 외실이 저자를 팽개치고 매춘을 하더니 어떤 소금 장수랑 도망을 갔거든! 하하하!”
“어? 그 은정랑이 매춘을 했다고?”
“그래! 나도 그 여인과 해 봤어! 쯧쯧쯧!”
“세상에! 왜 일찍 말해 주지 않았어! 알았으면 나도 그 여인과 한번 해 봤을 텐데!”
“엽승덕이 이제야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건가? 쌤통이다! 정실부인과 친아버지 그리고 조상들을 곤경에 빠뜨린 저런 빌어먹을 놈은 맞아 죽어도 싸지!”
“그래. 맞아 죽어도 싸지! 밖에서 사는 걸 그냥 내버려 두고 사람을 시켜 저자와 그 뻔뻔한 외실을 매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최대한 봐준 건데, 무슨 낯짝으로 돌아와서 용서를 구하는 거야! 정말이지 뻔뻔하기 이를 데가 없구만!”
사람들의 대화를 들은 엽승덕은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고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씨 가문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와 엽씨 가문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의 효과는 완전히 달랐다. 엽승덕은 정말이지 화가 치밀어 올라 죽을 것만 같았다.
* * *
그 시각 안녕당.
엽학문은 엽승덕이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화가 나서 옆에 놓인 탁자를 힘껏 내리쳤다.
“그 고얀 놈이 무슨 낯짝으로 찾아와! 가서 쫓아내거라!”
엽학문은 정말이지 울화통이 터져 엽승덕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엽승덕만 아니었다면 엽균의 다리가 망가지지 않았을 테고 자신과 엽연채의 관계도 이렇게까지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며, 관직과 작위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주운환 덕분에 진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전부 엽승덕 때문에 망치고 만 것이다.
“아버님.”
이때, 손씨와 엽승신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
손씨가 말했다.
“들어보니 큰아주버님께서 밖에서 무릎을 꿇고 계시다고 해요. 에휴, 어쩜 그리 가여울 수가…….”
“아버지…….”
엽승신은 헛기침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간에 저희 엽씨 가문의 적장자입니다!”
전에 엽승신은 엽승덕을 몹시도 역겹게 생각했다. 엽승덕이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외실과 도망가 버리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그런데 엽이채가 장씨 가문으로 시집을 간 뒤에 상상했던 것만큼 잘나가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장씨 가문에서의 처지가 날로 곤란해졌다.
그에 반해 엽연채는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장원의 부인에서 후야의 부인이 되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난번에는 엽연채를 향해 ‘남편을 성공시키는 여인’라는 말까지 나오자 장씨 가문에서 엽이채의 입지는 더욱더 좁아졌다. 맹씨는 점점 더 엽이채를 못마땅해했고 장박원은 첩실을 몇 명 더 들였는데 그중 두 명이 회임을 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손씨와 엽승신은 엽연채를 죽도록 증오했다. 그러나 엽연채는 이제 후 부인이 되었고, 또 자신들과 함께 사는 것도 아니니 도저히 그녀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엽승덕 일이 튀어나온 것이다.
손씨와 엽승신은 엽승덕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엽씨 가문 적장자가 되기를 바랐다. 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도 엽연채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으니까 말이다.
엽승덕이 역겨운 짓거리를 그렇게나 많이 했고 온씨에게 그런 큰 상처를 줬는데도 결국 그가 풍족하게 지내며 엽씨 가문 적장자로 거들먹거린다? 자신들이 엽연채여도 속이 뒤집어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었다.
엽학문은 희끗희끗한 눈썹을 찡그리더니 노성을 팩 내질렀다.
“적장자라니? 우리 엽씨 가문에는 핏줄을 더럽히고 조상님들의 위업을 사생아 놈에게 갖다 바치는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은 없다!”
그가 손씨와 엽승신을 호되게 나무라자 두 사람은 목을 움츠리고는 몸을 덜덜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