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2화
엽연채의 표정이 여전히 냉담하기만 하자 한 할멈이 엽승덕의 역성을 들고 나섰다.
“에휴……. 어쨌든 친아버지잖소! 사람이 이렇게 자기 잘못을 알고 사과를 하는데 어서 일으켜 세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않고 뭐 하는 거요?”
그러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추길이 냉랭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죄송하다는 말로 다 되면 관아는 왜 필요해요? 그럼 할머니에게 칼부림을 하고도 사과만 하면 되는 거예요?”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모두 폭발하고 말았다.
방금 전 그 할멈이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빽 질렀다.
“너처럼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어쨌든 저 부인을 낳아 주고 길러 준 친아버지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하는 법이다! 뉘우치고 고치기만 하면 되지! 이제 개과천선했는데 친아버지가 자식에게 무릎까지 꿇을 필요가 있느냐? 이건 그야말로 죄를 짓는 일이다!”
“세상에 자기 자식을 생각하지 않는 부모는 없는 법이지…….”
백성들은 더욱 흥이 올랐다.
엽승덕은 방금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게 그저 너무도 굴욕적이라는 생각뿐이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자기편에 서서 이야기를 해 주자 창피함이 좀 가시는 듯했다. 그는 얼른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연채야.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이 아비를 용서해 주는 거다……. 이 아비가… 그 빌어먹을 여편네한테 미혹되었던 것뿐이야…….
난 이제 집에서 쫓겨나 먹을 것도 지낼 곳도 없다. 매일 책상을 어깨에 메고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서신을 써 주는데… 고작 동화 몇 문을 버는 게 전부라 소 없는 찐빵을 사 먹기에도 부족해…….
하지만 난 감내하고 있어. 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니 말이다! 네가 날 봉양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네가 이 아비를 용서해 주길 바랄 뿐이야…….”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엽승덕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들은 깨끗하게 빨아 두긴 했으나 헝겊 조각으로 여기저기 기운 그의 낡은 옷을 보다가 다시 엽연채의 비단옷을 봤다. 확실히 이건 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작은새언니, 어서 아버지를 용서해 드리세요.”
대문 계단 위에 서 있던 주묘서는 연민 어린 눈빛으로 엽승덕을 내려다봤다.
“에휴, 사돈어른도 참 가련한 분이시네요. 작은새언니는 이제 후 부인이 되었고 후부와 많은 토지도 받았는데… 친부인 사돈어른은 배불리 먹지도 따뜻하게 입지도 못하시고 밖에 나가 노점상까지 펼치셔야 한다니요.
그렇게 고생하셔도 매일 버는 동화 몇 문으로는 소 없는 찐빵도 못 사서 배도 채우지 못하시는군요. 동화 몇 문은 작은새언니가 먹는 간식 한입 값도 못 되는데.”
잠자코 침묵하던 진씨의 눈빛은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엽연채에게 엽승덕을 부축해 집으로 들어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엽승덕이 이곳에 오래 무릎을 꿇고 있을수록 엽연채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미움을 받게 될 텐데, 자신이 무엇 하러 나서겠는가.
진씨는 그저 미간을 구기며 이렇게 훈계했다.
“셋째야, 자식이면 마땅히 부모를 봉양해야지. 너 같은 불효녀가 어디 있니!”
“맞습니다, 맞아요!”
백성들은 한입으로 맞장구를 쳤다.
진씨와 주묘서는 속이 다 후련했다. 백성들이 자신들 편에 서 주는 건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전에는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욕을 얻어먹었는데, 이제서야 마침내 흐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엽연채는 엽승덕을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정말 좋은 계책이었다. 그가 전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잘못만 인정하고 친부라는 신분과 ‘효’를 이용하여 무릎을 꿇으면 이편을 압박하며 못살게 굴 수 있잖은가.
물론 엽승덕이 이리하는 건 엽연채를 괴롭히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사실 본인도 이렇게 해 봤자 큰 효과가 없을 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평판을 망가뜨리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최종 목적은 엽연채를 압박하여 그녀가 자신을 주씨 가문으로 데리고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모두 엽연채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말할 것이고, 자신은 회개했다는 좋은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주씨 가문이나 주운환의 세를 이용해 엽씨 가문으로 돌아가 다시 호의호식하는 엽씨 가문 노야로 지낼 수 있으리라.
“이만하면 됐다. 셋째야, 어서 사돈어른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 뭐 하느냐?”
진씨는 속으로 후련함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정색한 채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평소에 네가 이 시어머니에게 한 행동은… 그렇다 쳐도 이분은 네 친아버지이시다. 너를 낳아 기른 분인데 어떻게 대로에서 무릎을 꿇게 만들 수가 있느냐! 어서 집으로 모시고 들어가 잘 보살펴 드리거라.”
“그 말이 맞습니다!”
백성들은 일제히 고개를 주억였다. 특히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자식과 손주들이 불효하는 것이라 유독 더 흥분했다.
“후야는 그토록 효심이 지극한 분이신데 후부인은 불효를 저지르다니! 본인은 이렇게 능라주단을 걸치고 다니면서 아버지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소! 자녀가 부모를 봉양하는 건 만고불변의 이치요. 안 그러면 벼락을 맞을 것이오!”
엽연채가 매서운 눈빛을 번뜩이며 뭐라고 맞서려는 찰나, 뜻밖에도 멀리서 누군가가 화가 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엽연채는 순간 멍해졌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보니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주 잘생기고 미끈한 몸매를 가졌지만 안타깝게도 걸을 때마다 다리를 좀 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엽균이었다.
엽연채는 엽균을 보더니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엽균은 다리를 고치러 도성 밖으로 나갔었는데, 언제 돌아왔단 말인가?
“큰오라버니.”
엽미채는 엽균을 보더니 쭈뼛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백성들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다들 지금 나타난 사내가 엽연채의 친오라비이자 엽승덕의 친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균아…….”
엽승덕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입을 오므렸으나 순간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를 짜내던 그는 겨우 이렇게만 말했다.
“이제… 괜찮은 거니?”
“아버지 덕분에 죽지는 않았어요.”
엽균은 냉담한 눈빛으로 그를 쓱 쳐다봤다.
“여기서 체면 구기시지 말고 어서 가세요.”
‘아들에게 체면 구긴다는 말을 듣다니!’
원래 체면을 목숨처럼 여기는 엽승덕은 수치심이 폭발했고, 낯빛이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에휴. 사돈총각,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진씨가 이때다 싶어 냉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사돈이 잘못한 건 맞지만 그래도 지금 사과하시지 않았는가.”
“보세요. 사돈어른이 지금 얼마나 가여운지…….”
주묘서도 연민 그득한 얼굴로 협공에 나섰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시는데… 자식인 새언니가 봉양해야 마땅하지요.”
주묘서의 말에 엽균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엽승덕을 쳐다보며 이치를 따졌다.
“설령 정말로 봉양을 해야 한다고 해도 아들인 내가 봉양해야 합니다. 설마 출가외인인 누이동생이 시집으로 부모를 데려가 봉양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주위를 둘러싼 백성들은 순간 멍해졌다. 맞다. 엽연채는 출가외인이니 정말로 봉양을 한다고 해도 아들인 엽균이 해야 마땅했다.
“난, 난 그저 사과를 하러 온 거다!”
엽승덕의 얼굴빛이 벌게졌다 퍼레지기를 반복했다.
“사돈이 사과를 하러 오셔서 무릎까지 꿇었는데 아직도 용서해 주지 않다니요.”
주묘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건 불효예요!”
엽균은 그런 주묘서는 상대하지도 않고 그저 엽승덕을 쳐다보며 입을 뗐다.
“그 여인을 위해 아버지는 어머니의 혼수품을 훔치셨죠. 그때 부윤이 아버지에게 곤장형을 내리자 제가 아버지를 대신해 서른 대를 맞았습니다. 엉덩이가 박살이 났었죠. 이 정도면 충분히 효도한 거 아닌가요?”
“그런 옛일은…….”
엽승덕은 낯빛이 싹 변했고 다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런데 구경꾼들 중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은 이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그 사생아 놈이 아버지의 친아들이며 적장자라고 우기시면서 제 상속권을 빼앗아 가셨어요! 제가 아버지의 친아들인데 말이죠!
어디 거기에서 그쳤나요? 제가 허서 그 사생아 놈을 돕지 않았다면 그놈은 진작에 얻어맞아 불구가 됐을 거예요. 결국 그쪽에서 따지러 왔는데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허서를 보호하기 위해 절 방패막이로 삼아 제 다리를 부러뜨리셨죠! 그때 제 친아버지인 아버지는 절 위해 단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으셨고요.”
엽균이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이 말을 하는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뒤 전 도성 밖으로 버려졌는데 이후에도 아버지는 한 번도 절 보러 오지 않으셨죠.”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하나같이 탄식을 했다.
엽승덕을 책망하는 말이 엽연채 입에서 나왔다면 사람들은 그저 엽연채가 책임을 회피하는 불효녀라고 닦아세웠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엽연채는 과거야 어쨌든 지금은 후 부인이 되어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며 잘 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엽승덕을 책망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엽균이었다.
엽균은 지금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준수한 청년이 불구가 된 걸 보며 연민을 느꼈고, 엽승덕이 저질렀던 모든 일이 다시 떠올랐다.
엽승덕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과 분위기가 변화했다는 걸 감지했다. 조급한 마음에 반박을 하려 했으나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얼굴을 가린 채 ‘흑흑’ 눈물을 흘리며 아까 한 말만 또 반복했다.
“내… 내가 잘못했다! 너희들에게 정말로 미안하구나! 정말 사과를 하고 싶단다……. 내가 잘못한 걸 알고 있기에 이렇게 찾아와 사과를 건네는 거다!”
“좋습니다. 지금 와서 사과를 하고 싶다면 하셔야지요!”
엽균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집으로 돌아가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으세요! 여기서 누이동생에게 무릎을 꿇어서 뭐 하시게요? 아버지가 가장 미안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은 바로 할아버지이고 엽씨 가문이에요!
아버지가 계략을 꾸며 할아버지를 완전히 속인 바람에 하마터면 그 사생아 놈을 엽씨 가문 핏줄로 인정해 집으로 들일 뻔했습니다! 핏줄이 더럽혀질 뻔했던 거죠! 이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에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엽씨 가문 조상님들께 떳떳하실 수 있으신가요?”
엽승덕은 분해서인지 초조해서인지 여하튼 몸을 덜덜 떨며 얼른 입을 뗐다.
“내, 내가 어리석었다……. 다행히도 그렇게까지 번지지는 않았지. 그래서 사과를 하러 온 것이다.”
“사과를 하신다고요? 사과를 해도 여기서 누이동생에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죠! 딸에게 무릎을 꿇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설마 여기 모인 백성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못 들으신 겁니까? 다들 누이동생이 불효하고 있다고 욕하고 있습니다. 연채가 사람들에게 욕을 먹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