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81화 (481/858)

제481화

“연채야.”

제민이 다시 의문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이 판을 빨리 끝내고 사슴 고기나 좀 구워 먹을까? 그런 다음에 천등天燈을 날리는 건 어때?”

“좋지.”

엽연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단풍나무 아래에 앉아 바둑을 두기 시작했고 속력을 높여 두니 이각이 지나자 대국은 끝이 났다. 제민은 기지개를 켜다가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조앵기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어린아이와 흙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는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바로 제민이 사 온 어멈의 손자였다.

조앵기는 흙 인형의 손을 만들고 있었는데 ‘팍’ 소리가 나더니 그만 손이 부서져 버렸다.

“네 작은 손을 부숴 버릴 거야! 그런 후에는 네 작은 다리도 부숴 버릴 거야! 깔깔깔.”

제민은 그 모습을 쳐다보며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저 흙 인형이 누군데 저래?”

엽연채는 입꼬리를 실쭉거리며 대꾸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양왕 전하일 거야.”

이 대답에 제민은 몸을 떨었다.

엽연채는 조앵기 쪽으로 걸어가더니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칭찬했다.

“와. 이 흙 인형 정말 예쁘게 잘 빚었다.”

“그래?”

조앵기는 대단히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흙 인형은 잘 빚을 수 있는데 다른 건 어째서 못 하는 거예요?”

제민도 그쪽으로 걸어오더니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제 말 잘 들어요. 마마 같은 사람은 어느 날 전하께서 폐위되시면 굶어 죽기만 기다려야 할 거예요!”

조앵기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 답답한 모습에 제민은 벌컥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연채를 보면 뭐 해요? 연채도 마마를 거둬 주지 않을 거예요! 지금부터라도 많이 배워요.”

제민은 언짢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조앵기를 다그쳤다.

“다음번에 연채가 이사 갈 때는 또 빈손으로 오면 안 돼요. 지난번에 배웠던 낙자를 열 개쯤 만들어 와요.”

“그래, 그래. 앵기 네가 직접 만든 낙자를 선물로 주면 최고겠는데!”

엽연채도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하자 조앵기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알겠다며 고갯짓했다.

“그럴게.”

“자, 이제 우리 사슴 고기 먹으러 가자. 그거 먹고 돌아가면 돼.”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권하자 조앵기는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민은 사람을 시켜 그녀를 데리고 가 손을 씻게 했다.

가을은 밤이 길고 낮이 짧아 유시 일각이 되자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제민은 원래 술시戌時(오후 7~9시)에 천등을 날릴 계획이었는데 조앵기가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유시酉時(오후 5시~7시)에 날리기로 시간을 당겼다.

정원 안에는 등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엽연채와 제민, 조앵기가 하나를, 엽미채와 주묘화가 하나를 준비했다.

엽연채는 붓을 가져오더니 천등의 한쪽 면에 글자를 썼다. 그에 조앵기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연채야, 뭐 하는 거야?”

엽연채는 글자를 빼곡히 적으며 이렇게 말했다.

“소원을 적고 있어! 너도 적어 봐!”

조앵기는 크게 기뻐하며 얼른 붓을 들더니 천등의 다른 쪽 면에 서서 골똘히 생각을 했다.

제민은 또 다른 면에 글자를 썼다. 그녀는 간단히 이 한마디만 적었다.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길.」

단숨에 적고 나서 고개를 돌려 왼쪽을 보니 엽연채도 글자를 다 적은 후였다. 그녀의 소원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호방한 기상과 우아한 흥취를 품고 있으니, 푸른 하늘 위로 날아올라 휘영청 밝은 달을 따러 가자.」

이번에는 오른쪽을 보니 조앵기는 아직도 글자를 적고 있었다. 그녀는 소망을 써 내려가며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제민이 그녀를 재촉했다.

“어서 적어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힝…….”

조앵기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글자를 빼곡히 적어 넣었다.

제민이 살펴보니 그녀는 소원을 그야말로 한가득 써 두었다.

「연채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요. 매 끼니에 토자포를 먹고 싶어요! 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

이 외에도 소원이 수두룩하게 나열돼 있는 모습에 기가 찬 제민이 줄을 잘라 버리자 천등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어!”

쓰고 싶은 소원이 아직도 한참 남은 조앵기는 못내 아쉬워했다.

“나 아직 다 못 적었는데…….”

제민은 언짢은 목소리로 톡 쏘았다.

“마마처럼 욕심 많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조앵기는 서글퍼졌다.

엽연채는 실망으로 가득 찬 그녀의 얼굴을 보며 탄식을 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소원을 한가득 적어 봤자 뭐 하겠는가. 정말로 모든 게 이루어지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이건 그저 바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앵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엽연채는 조앵기에게 소원을 적는다고 반드시 이뤄지는 건 아니라며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기대로 가득 찬 그녀의 얼굴과 다 적지 못해 불만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밀어 넣었다.

천등을 날리자마자 위 마마는 조앵기를 채근해 그곳을 떠났고 엽연채와 주묘화, 엽미채는 제민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엽연채 등이 제민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린 여종 한 명이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셋째 마님.”

고개를 돌린 엽연채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이 어린 여종은 다름 아닌 서과원에서 막일을 하는 향아였다. 엽연채는 비지땀을 줄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머,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온 거니?”

향아는 창백한 낯빛으로 말했다.

“추길 언니가 저보고 집에 급한 일이 생겼으니 어서 마님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했어요!”

엽연채는 어리둥절했으나 고개를 돌려 제민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나 먼저 가 볼게.”

“응!”

제민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채야, 너도 함께 가자. 나와 묘화 아가씨를 먼저 내려 준 다음에 경인이에게 널 데려다주라고 할게.”

“네.”

엽연채의 말에 엽미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그들은 수화문으로 나와 마차에 오른 후 곧장 주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

반각쯤 지나자 마차는 장승가에 도착했다. 밖은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여럿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셋째 마님…….”

경인이 얼마 못 가 마차를 멈춰 세우더니 갑자기 엽연채를 불렀다.

“왜 여기서 멈춘 거예요?”

주묘화는 의아해하며 창문에 달린 발을 걷어 올렸다.

“어……!”

엽연채는 이미 반대편에 달린 발을 걷어 올린 후였다. 이곳은 주씨 가문 정문이었는데 더는 나아가기 어려울 만큼 구경꾼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무슨 구경거리가 생겼는지 다들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어머, 마침내 셋째 마님께서 돌아오셨네요.”

밖에서 누군가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 제일 싫어하는 녹지였다.

“셋째 마님, 돌아오셨군요!”

추길이 마차 쪽으로 황급히 다가왔다.

이미 마차에서 내린 혜연은 조그만 걸상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손을 뻗었고 엽연채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엽미채와 주묘화도 잇달아 마차에서 내렸다.

대문 앞은 사람들로 바글거렸고 일부는 엽연채가 돌아온 걸 알아차렸는지 귓속말로 무어라 속닥대기 시작했다. 엽연채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문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더니 알아서 길을 비켜 줬다. 그렇게 그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비쩍 마른 중년 사내가 주씨 가문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검은색 낡은 무명옷을 입고 있었지만 옷은 깨끗한 편이었고 머리 또한 천으로 한 올도 빠짐없이 깔끔하게 묶어 올린 모습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인 채 후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사람을 보더니 엽연채의 맑고 아름다운 얼굴이 어두워졌고 엽미채는 낯빛이 확 변했다. 많이 마르기는 했어도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엽미채는 조금 하얗게 변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

엽연채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눈앞의 사내는 다름 아닌 엽승덕이었다.

지난번에 엽승덕과 은정랑이 공당에서 매질을 당한 후, 은정랑은 엽승덕에게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매춘’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하더니 마침내 엽승덕을 버리고 소금 장수를 따라가 버렸다.

그때, 엽연채 등은 그 꼴을 보면서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그 후 주운환의 일 때문에 엽승덕 이 인간쓰레기는 잊고 있었는데,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다시 이곳으로 달려와 이런 짓을 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이 지경이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이곳으로 달려와 소란을 피우는 것일 테지!’

“미채야…….”

엽승덕은 엽미채를 보고 기뻐하더니 다시 엽연채를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고는 자책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내가 잘못했다……. 내가 은정랑 그 빌어먹을 여편네한테 미혹됐었다. 내 너에게 사과를 하려고 이렇게 찾아왔다. 사죄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어…….”

엽승덕은 고개를 숙이고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으나 엽연채는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

“에휴, 탕아가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돈이 암만 많아도 불가능한 일이지! 잘못을 알고 고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주위를 둘러싸고 구경을 하던 백성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더욱더 엽승덕을 동정했다.

“작은새언니, 보세요. 새언니 아버지가 지금 새언니에게 사과를 하고 계시잖아요.”

이때, 누군가의 비웃음 섞인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사람들을 사이를 지나 이쪽으로 전해졌다.

보니 주씨 가문 대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주묘서와 진씨는 대문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주묘서는 추국秋菊 문양이 들어간 앞섶이 교차하는 유군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반투명한 비단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엽연채를 조롱하며 부채를 살살 흔들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길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엽연채의 고운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고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미간을 째푸렸다.

육십 대로 보이는 한 늙은이가 이렇게 말했다.

“후 부인, 보시오. 아버지가 부인에게 사과를 하고 계시잖소!”

엽연채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세상일은 언제나 이렇게 이상하게 돌아갔다. 좋은 사람은 매일 선한 일을 하다가 어느 날 한 번 악한 일을 저지르면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외면당했다. 그런데 나쁜 사람은 매일같이 역겨운 짓거리를 하다가도 어느 날 사과 한 번만 하면 사람들은 그의 행동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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