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80화 (480/858)

제480화

주묘서의 물음에 춘산이 대답했다.

“오늘 제민이 이사 가는 날이라 두 분은 그곳에 가시는 거예요! 며칠 전에 추길이 와서 물어봤는데 당연히 제가 거절했습니다. 아가씨는 지금 태자 전하를 위해 수를 놓고 있느라 바쁘신데 그런 따분한 자리에 참석할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혼례식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으니 당연히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되죠.”

주묘서는 입꼬리를 빼쭉거리더니 득의양양한 기색을 잔뜩 드러내며 코웃음을 쳤다.

“묘화는 아직도 작은새언니를 따라다니네……. 쯧쯧.”

그러자 녹지가 미소를 지으며 비위를 맞췄다.

“저렇게 밖으로 휘젓고 다니면 좋은 혼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전에 아가씨도 무려 일 년이나 밖으로 돌아다니셨는데 어떤 사내들이 꼬였습니까? 하나는 별 가치도 없는 탐화였고 다른 하나는 명 짧은 사내였습니다. 그때 아가씨가 응하지 않으셔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아무튼 아가씨는 길운을 타고나신 분입니다. 하늘이 정해 주신 운명인 거죠! 일전의 두 혼사가 성사되지 않은 건 다 아가씨께서 태자부로 시집갈 운명이었기 때문이죠. 높은 분이 되실 운명이었던 거예요.”

“지금 아가씨를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춘산이 냉큼 거들고 나섰다. 주묘서는 대답 없이 입꼬리만 올렸지만 속으로는 무척 의기양양해했다.

* * *

엽연채와 주묘화는 마차에 올라 제민의 저택으로 향했다.

마차는 일각을 달리더니 마침내 삼진원식 저택으로 들어갔고, 수화문에 멈춰 서자 그들을 본 여종이 얼른 뛰어나왔다.

추길이 등받이가 없는 네모나고 작은 걸상을 내려놨고,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엽연채와 주묘화는 자신들을 맞이하러 오는 제민의 모습을 보았다.

“왔구나.”

“내가 일 등으로 왔지?”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으나 제민은 뜻밖에도 아니라고 대꾸했다.

“아니. 영교가 일 등이야.”

“아, 맞다. 고모 집이 여기서 가까웠지. 골목 하나만 돌면 바로 나오잖아.”

“원래 이곳을 고른 건 너랑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제민은 엽연채의 손을 잡으며 말을 더했다.

“너희 부군이 그렇게 대단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 후야에 봉해져 정륭가에 있는 그 큰 저택을 받았으니 내가 널 찾아가기가 더 힘들어졌어. 다행히도 영교가 이 근처에 사니 시간 나면 영교 집에나 놀러 가야지.”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일행과 함께 수화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안으로 들어서니 널찍한 뜰, 다섯 칸의 커다란 본채와 양쪽으로 늘어선 각각 여섯 칸의 곁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도좌가, 뒤쪽으로는 후조방이 있었는데 모두 아주 정교한 모습이었다.

엽연채는 이미 이 집을 본 적이 있었다.

제민이 집을 보수할 때 그녀에게 적잖이 조언을 해 줬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제민은 농가 출신이니 이런 부잣집의 구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저택의 보수뿐만 아니라 엽연채는 쓸 만한 하인들을 고르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물론 제민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구하지는 않았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가진 어멈 두 명과 젊은 여종 두 명, 어린 여종 세 명, 열두 살쯤 된 사내아이 두 명을 샀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이라곤 제민 한 명뿐이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들이 본채로 들어가 보니 배나무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엽영교와 엽미채는 원탁 옆에 앉아 있었는데 엽연채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연채야, 왔구나.”

잠시 후, 제민이 초대한 소저들도 속속 도착했다.

원남옥, 상관운 그리고 스무 명쯤 되는 규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여종은 그들을 정원으로 안내했는데, 주위에는 국화가 가득 심어져 있었다. 규수들이 국화를 소재로 시를 지어 서로 비교하느라 아주 떠들썩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엽영교는 임신한 몸이기에 밖에서 노는 대신 제민, 엽연채와 함께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엽영교는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운을 뗐다.

“그럭저럭 잘 넘겼네. 상대하기 어렵지 않은 사람들이야.”

그러자 제민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여기 이분이 계시는데 상대하기 어려울 게 뭐가 있어. 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 적이 없어. 몇몇은 내가 초대한 사람들한테 들러붙어 함께 온 거야.”

그녀는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자 엽영교도 ‘픽’ 입바람을 불었다. 제민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손님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엽연채와 가까워지고 싶어 이곳에 온 것이었다.

“연채야! 연채야!”

이때, 기쁨이 묻어나는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했고 제민은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말했다.

“저 친구도 왔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작고 귀여운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흰색 웃옷에 오밀조밀한 연분홍빛 꽃잎 문양이 들어간 붉은색 제흉유군을 입은 그녀는 가슴 앞에 달린 띠를 휘날리며 치마를 들고 콩콩콩 뛰어왔다. 가냘파 보이는 얼굴로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연채야!”

조앵기는 까르르 웃으며 치마를 들고 달려왔다. 엽연채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 옆에 앉더니 팔짱을 끼고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연채야!”

“여긴 어떻게 왔어요?”

제민이 물으며 검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조앵기는 제민이 눈을 부릅뜨자 입을 삐죽 내밀더니 엽연채 뒤로 숨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올 수 있게 됐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엽연채는 조앵기가 연회에 왔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그러자 엽미채가 엽영교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어린 소저는 누구예요?”

“양왕비셔.”

엽영교가 가볍게 대꾸했다.

엽미채는 깜짝 놀라더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조앵기를 훑어봤다.

‘이 사람이 바로 말로만 듣던 그 양왕비?’

그런데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아, 맞다. 어떤 선물을 가져왔어요?”

제민이 갑자기 조앵기를 쳐다보며 이리 묻자 조앵기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선물?”

“네, 선물이요!”

제민은 두 눈에 힘을 주며 강조했다.

“제 집들이인데 설마 빈손으로 온 거예요?”

그 말에 조앵기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선물을 가져와야 하는 거야?’

밖으로 나와 놀 수 있게 되자 그저 기쁘기만 했지 어디 선물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겠는가? 그녀는 집안의 경조사를 챙길 필요가 전혀 없었고 외출한다고 해도 그저 양왕만 따라다니면 됐다.

제민은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조금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것조차 모르다니 대체 어떻게 자란 거예요?”

어떻게 자랐냐는 그 질문에 조앵기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전부 다 안 좋은 기억뿐이었다. 어릴 때 양왕은 저를 아주 심하게 괴롭혔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을 놓아주었다.

“됐어, 그만해. 깜빡한 거겠지.”

엽연채는 엽영교와 엽미채 등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조앵기의 체면을 깎으면 그녀의 마음이 불편할 거라는 생각에 얼른 그녀를 위해 나섰다.

“제민아, 늦었으니 밥상을 차리라고 하자!”

제민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종들을 불러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손님들은 한 명 한 명 집으로 돌아갔다.

엽영교는 임신한 몸이라 일찌감치 그곳을 떠났고, 엽미채와 주묘화는 낭하에 서서 그곳에 걸려 있는 새장 안의 앵무새를 구경했다.

제민은 뒤뜰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조그만 토끼도 몇 마리 키우고 있었다.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토끼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 아주 귀여웠다. 조앵기는 땅에 쪼그리고 앉아 토끼들에게 당근을 먹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엽연채와 제민은 한쪽에 자라나 있는 단풍나무 아래에서 대국 중이었다. 추풍이 살짝 불어와 붉게 타오르는 듯한 단풍나무의 잎사귀들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자 그 자체로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었다.

“왕비 마마, 이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때, 위 마마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전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앵기는 깜작 놀라더니 저도 모르게 토끼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위 마마, 이제 겨우 미시未時(오후 1시~3시)밖에 안 됐네. 아주 늦은 것도 아닌데 서둘러 돌아갈 것 없지 않은가.”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위 마마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하께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곧장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오래 머물러 있지 말라고 하셨어요. 안 그러면 또 쓸데없는 일을 벌이실 거라고 하셨죠.”

조앵기는 그 말에 풀 죽은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미 조앵기 쪽으로 걸어온 엽연채가 그녀를 잡아당기며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왕비 마마께서는 늦게 오셔서 오자마자 점심 식사를 하셨고 앉아 있으신 지는 한 시진도 되지 않았네. 주변에는 우리 몇 사람밖에 없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을 거네.”

위 마마는 조앵기가 엽연채, 제민과 함께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표정을 한층 찡그리며 더욱더 냉랭한 목소리로 독촉했다.

“마마, 안 가실 건가요? 전하께서 역정을 내실 겁니다.”

조앵기는 조그만 몸을 부르르 떨었고, 작고 보드라운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이곳을 떠나려는 찰나, 엽연채가 얼른 그녀를 멈춰 세우더니 위 마마에게 재차 말했다.

“나도 위 마마가 그저 자신의 소임과 책임을 다하는 줄 알고 있네. 하지만… 전하께서 내 부군의 체면을 봐서 내 부탁을 좀 들어주시면 좋겠네.”

그 말에 위 마마는 인상을 썼다. 그러나 주운환이 언급되자 그녀는 마음이 좀 약해졌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엽연채가 예법에 밝아 보이자 불안이 얼마간 가셔 사정을 봐주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유시酉時(오후 5시~7시) 일각에는 꼭 가셔야 합니다.”

그 말에 조앵기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위 마마, 고맙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위 마마에게 인사했다.

“위 마마, 저쪽으로 가서 차를 들게!”

제민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위 마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제민과 위 마마의 모습이 의문義門 밖으로 사라지자 조앵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엽연채를 확 끌어안았다.

“역시 나한테 제일 잘해 주는 사람은 연채 너야.”

엽연채는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조앵기는 다시 쪼그리고 앉아 당근 하나를 집어 토끼에게 먹여 줬다.

그녀 옆에 따라 앉은 엽연채는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팔 부위에 남아 있는 멍 자국과 또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 옷깃 안쪽으로 커다란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엽연채는 깜짝 놀라 물었다.

“앵기야. 괜찮은 거야?”

조앵기는 자신의 목 주변을 확인하는 그녀를 보더니 손을 뻗어 그곳을 가리고는 코를 훌쩍거렸다.

“조만간 전하의 손에 요절이 날 거야…….”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연채 너를 보러 올 수 있다면… 다음번에도 그럴 거야.”

고개를 든 조앵기는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엽연채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조앵기는 자신을 팔아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말인가? 이 희생을 작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크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녀와 양왕은 여러 해를 같이 지낸 부부였다.

하지만 처량하고 비참한 그녀의 모습을 보면 희생이 크다고 보는 게 맞을 성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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