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8화
태자는 주운환과 인사를 나눈 후 곧장 봉의궁으로 향했다.
대전으로 들어가 보니 용과 봉황 문양이 새겨진 기다란 탑상 위에 정 황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왔는가?”
“어마마마.”
태자는 예를 올린 후 하좌에 놓인 권의에 앉았다.
“어마마마, 오늘 주묘서를 보셨습니까?”
“외모는 괜찮은데 성격이 좀 조급해 보이더군. 원래 같았으면 태자의 측비로는 어림도 없었을 소저지만, 이젠 진서후를 포섭해야 하니 그 정도는 넘어가야겠지.”
“진서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태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오늘 소자가 진서후에게 말을 고르러 가자고 했는데 그자가 거절했습니다.”
정 황후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잘된 일이야.”
“잘된 일이요?”
태자는 순간 얼떨떨해 되물었다.
“당연히 좋은 일이지. 내 태자에게 여러 번 말하지 않았는가? 어떤 것들은 태자가 직접 가져와서는 안 된다고. 폐하께서 주셔야만 가질 수 있다고 말이네!
폐하께서 주묘서와 태자를 맺어 주신 건 진서후가 태자를 보필하길 바라시기 때문이네. 그렇다곤 하나 태자가 조바심을 내며 진서후와 관계를 맺으려고 하면 안 돼. 진서후는 여전히 폐하께 충심을 가져야 하네. 그래야 폐하께서 기뻐하실 것이야! 그리고 그래야… 태자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네!”
뜨끔했던 태자는 이내 두 눈을 살짝 반짝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어마마마는 현명하십니다.”
“진서후도 영리한 사람이지.”
정 황후는 그리 말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폐하는… 아무래도 연로하시고 진서후는 젊으니 당연히 그자는 태자와 손을 잡으려고 할 것일세. 보게, 최근 벌어진 서씨 가문 일에 대해 그자가 무슨 말을 한 적 있는가?”
태자는 두 눈을 가볍게 깜빡이더니 하하 웃었다.
“당시 항간에는 소자와 주묘서 때문에 서씨 가문이… 멸문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었지요.”
이 말을 꺼낸 태자는 낯빛이 어두워졌다.
정 황후가 말했다.
“하지만 진서후는 무관심한 태도로 그 소문을 신경 쓰지 않았지. 태자의 혼사에 문제가 생기는 걸 원치 않았던 게 분명하네.”
태자는 미소를 지었다. 충신을 원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부자 사이라고 해도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사람을 원하는 법이다.
현재 주운환은 주묘서가 태자부로 시집가는 것에 대해 어떠한 의견도 나타내지 않았지만, 서씨 가문 일이 벌어졌을 때 꿈쩍도 안 한 걸 보니 사실 그도 저와 사돈 관계를 맺길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운환은 표면적으로는 황제에게 충성하지만 실지론 자신에게 충성하고 싶은 자로 볼 수 있었다.
“우린 서두를 것 없네. 대세는 우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 말이네. 우린 그저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면 되네. 그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니 모험할 필요가 없네.”
“예!”
정 황후의 당부에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주묘서를 측비로 얻은 건 잘한 일 같습니다.”
“서씨 가문 일을 덮긴 했지만… 백성들은 표리부동하니 당분간은 언행에 신중을 기하게.”
태자는 정 황후와 이야기를 더 나눈 후 그곳을 떠났다.
* * *
그 시각 일상원.
진씨는 조금 넋 나간 얼굴로 낙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주묘서 생각뿐이었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그때 밖에서 녹엽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씨는 기뻐하며 손에 든 낙자를 탑상 위에 내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묘서가 주렴을 걷어 올리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진씨는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을 보더니 이번 방문이 순조로웠음을 눈치채고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어서 오너라!”
주묘서는 진씨 옆에 앉더니 황궁에서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전했다.
“황후 마마께서 처음에는 가볍게 충고를 하셨는데 나중에는 제게 어머니의 안부를 물으셨어요. 그러면서 앞으로 어머니에게 짬이 생기면 입궁하여 마마의 말벗이 되어 주라고 하셨어요.”
“마님, 황후 마마께서 큰아가씨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정 마마가 거들자 주묘서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했다. 지금 태자가 자신을 좋아하고 아낄 뿐만 아니라 황후조차도 제게 흡족해하지 않는가!
“그런데…….”
주묘서는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오늘 입궁했을 때 황후 마마께서 저보다 그 여인을 더 살갑게 대하셨어요.”
“셋째 나리께서 그렇게 큰 공을 세우셨으니 황후 마마께서 셋째 마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당연한 겁니다.”
“흥, 내가 태자부에 시집가고 나면 그 여인이 얼마나 날뛰는지 볼 것이야!”
정 마마의 말에 주묘서는 코웃음을 쳤다. 자신은 곧 고귀한 태자 측비가 된다. 황실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출가입니다. 아가씨는 다음 달에 태자부에 들어가게 되니 그때까지는 외출하지 말고 잠자코 집에 계세요.”
정 마마의 조언에 주묘서는 조그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서씨 가문 일은 어찌 됐든 끝이 난 셈이었다. 위쪽에서 억누르니 백성들도 감히 뭐라고 말은 못 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태자와 주묘서를 개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욕을 해 댔다.
물론 주씨 집안은 주묘서가 태자부로 시집을 가니 관련된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온 집 안에 들뜨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 * *
그 시각 궁명헌.
제민이 여종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와 보니 엽연채가 나른한 모습으로 정원의 파초나무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바람도 센데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제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엽연채는 하품을 하더니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추곤증이 있나 봐.”
제민은 조금 어이없어했다.
“그렇게 졸려? 연채야, 나 모레에 드디어 이사 가. 너한테 첩자를 전해 주려고 왔어.”
제민은 그리 말하며 엽연채에게 연한 자주색 첩자를 건넸다. 첩자를 건네받은 엽연채는 이렇게 물었다.
“누구 누구 초대했어?”
“난 사내 없이 혼자 사니까 친한 소저들만 몇 명 초대했어.”
제민은 바둑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후로 현주가 되어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귀족들은 대부분 이런 고상한 취미를 좋아하기 때문에 일부 귀족들은 그녀를 집으로 초대해 어린 소저들과 바둑을 두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몇몇 귀족 소저들을 사귀게 되었다.
“네가 오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서로 오겠다고 할 거야. 그럼 이사 기념 연회가 썰렁할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지.”
제민의 재치 있는 말에 엽연채는 허허 웃고는 조앵기를 언급했다.
“참, 앵기에게도 보냈어?”
“어제 보냈어. 집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라자!”
제민은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엽연채는 지난번 주운환을 위한 환영회 때 조앵기가 참석하지 않았던 걸 떠올리더니 옅은 한숨을 쉬었다.
제민은 잠깐 앉아 있다가 그곳을 떠났고 얼마 안 있어 저녁 무렵이 되자 주운환이 돌아왔다.
엽연채는 그를 보더니 얼른 달려가 팔짱을 끼며 안으로 이끌었다.
“부군. 이틀 뒤에 민이가 이사를 해요.”
“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야 합니까?”
“안 와도 돼요. 민이네 집에는 사내가 없어서 남손님들은 초대하지 않아요. 친한 소저들만 불러 즐겁게 밥 한 끼 할 거예요. 민이가 양왕부에도 첩자를 보냈는데 양왕 전하께서 왕비 마마의 출타를 허락하실지 모르겠네요.”
주운환이 검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대답했다.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부군이 말씀 좀 드려 줘요. 양왕 전하께서 마마의 외출을 허락하시게 말이죠.”
엽연채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주운환은 엽연채가 얼굴을 들고 반짝거리는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마음이 약해졌지만,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부인, 눈치채지 못했습니까? 전하께서는 왕비 마마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벗을 사귀는 건 더더욱 싫어하시고 말이지요.”
엽연채는 입술을 오므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비 마마는 황후 마마께서 양왕 전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붙여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전하는 그분을 싫어하시죠.”
주운환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 엽연채는 깜짝 놀랐다.
당시 양왕이 도성으로 돌아온다 했을 때, 누구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됐겠는가? 당연히 정 황후와 태자였다. 그래서 양왕과 누이는 도성으로 돌아오다가 습격을 당한 거고, 그 결과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중상을 입게 되었다.
양왕과 정 황후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사이였다. 정 황후는 양왕에게 있어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를 죽인 원수이니 당연히 양왕은 그녀에게 품은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그런데 양왕비는 하필 정 황후가 그에게 골라 준 배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왕비를 그에게 붙여 준 목적 또한 불순했다. 바로 그녀가 왕비의 자리를 차지하게 해 그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명문가 규수를 아내로 맞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황제가 윤허한 바이기도 했다.
정 황후와 황제가 함께 손을 잡고 양왕을 곤경에 빠뜨렸으니, 양왕이 조앵기를 좋아하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 * *
모레는 제민이 집들이를 하는 날로, 조앵기는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궁에서 주운환의 환영회가 열렸던 날 엽연채가 자신에게 ‘열흘 후에 제민이 집들이를 할 거예요.’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래서 조앵기는 그날부터 매일 날짜를 세고 있었다.
오늘까지 날짜를 세어 보니 모레가 바로 제민의 집들이가 있는 날이었고, 조앵기의 마음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조앵기는 점점 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이날 그녀는 거북이를 안고 귀비의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제민이 정말로 집들이를 한다고 해도 어떻게 자신에게 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앵기는 데굴데굴 굴러 몸을 일으키더니 낙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얼른 침실로 뛰어 들어가 침상 밑에서 조그만 바구니 하나를 끄집어냈다. 바구니 안에는 백자 그릇 하나가 보였는데, 그 안에는 맑은 물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거북이를 그 안에 넣은 뒤 다시 침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조앵기는 밖으로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