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6화
주묘서와 진씨는 안색이 변했다.
서 공자가 죽은 이유를 주묘서보다 더 정확하게 아는 이는 없었다. 그동안 그녀는 혼사가 엎어지지는 않을까 계속 걱정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그녀를 도와 이 일을 덮어 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지금 황후가 찾는다니, 주묘서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어쨌든, 이제 그 일은 무마되었습니다. 윗분들이 그 일이 무마되도록 도와주신 걸 보니 여전히 아가씨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입궁하여 제대로 사죄드리면 괜찮을 겁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황실의 예법을 확실히 익히는 겁니다.”
정 마마의 말에 진씨와 주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가장 좋은 방법은 셋째 마님이 아가씨를 도와 좋은 말을 좀 해 주시는 거고요.”
이번에는 진씨와 주묘서의 낯빛이 조금 변했지만 이를 악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녹엽아, 가서 이 궁첩을 궁명헌으로 전달하며 셋째 마님께 내일 이른 아침에 입궁해야 한다고 알려 드리거라.”
정 마마의 말에 녹엽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뒤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서과원으로 향하는 녹엽은 길을 걸어가며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쉬었다. 황폐했던 정자는 이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주운환이 공을 세우고 돌아온 후로 여종들은 끊임없이 주운환 부부에게 알랑거렸는데, 이제 또 주묘서가 측비로 책봉되면서 감히 주운환의 눈에 들려고 할 수만도 없었다.
잠시 후, 녹엽이 궁명헌에 도착해 보니 추길과 혜연이 걸레를 들고 난간을 닦고 있었다. 가을은 날씨는 선선하나 바람이 세게 불면 금세 먼지가 쌓여 수시로 닦아 줘야 하는 계절이었다.
“녹엽 언니.”
혜연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일상원 사람들 중 부드러운 사람은 녹엽뿐이라 그녀는 이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셋째 마님께 궁첩을 전해 드리러 왔어.”
녹엽은 그리 말하며 정원을 지나갔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가니 엽연채는 나한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화본을 보고 있었다.
“셋째 마님.”
녹엽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손에 든 궁첩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황후 마마께서 셋째 마님과 큰아가씨에게 입궁하라고 하셨습니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알겠다.”
하기야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황후가 주묘서를 보지 않는다면 그녀는 태자의 친어머니가 아닐 것이다.
녹엽은 첩자를 내려놓은 후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날씨가 아주 선선해 엽연채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화본을 보다가 따분해졌는지 머지않아 잠이 들었다. 그러자 추길이 안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준 후 밖으로 나갔다. 그때 마침 주운환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추길은 얼른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
“나리, 돌아오셨군요!”
“그래.”
주운환은 무덤덤하게 대답하고는 처소를 향해 걸어갔다.
“마님께서는 잠드셨어요. 나리,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그리 알리며 주운환의 뒤를 쫓아갔다.
처소로 들어간 주운환은 침실이 아닌 서차간으로 향했다. 주렴을 걷어 보니 엽연채가 그곳에 엎드려서 곤히 자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양팔 위에 올리고 새하얀 얼굴을 반쯤 드러낸 채였다.
주운환은 그쪽으로 걸어가 탑상 위에 앉은 뒤 몸을 숙여 자신의 코로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러자 엽연채는 ‘우움’ 하더니 얼굴을 돌려 그에게 뒤통수를 보였다.
“이렇게 자면 안 피곤합니까?”
주운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살포시 안아 들더니 침실로 향했다. 그녀를 침상 위에 내려놓자 이미 깨어 있던 엽연채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하품을 하며 타박했다.
“시끄러워서 깼잖아요.”
“마침 잘 깼습니다. 가져온 떡이 있으니 함께 먹지요.”
주운환은 그녀를 끌어당기며 일으켰다.
“요즘 들어 자주 누워 있던데 그럼 더 피곤하지 않습니까?”
“추곤증 때문에 그래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조그만 몸을 일으키더니 주운환의 품속에 파고들어 비비적거렸다. 아주 아늑하고 편안했다.
“더 잘래요.”
주운환은 어리광을 부리는 엽연채를 애정이 흘러넘치는 눈으로 바라봤다. 아담한 체구의 그녀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자 그도 흡족한 기분이 들었고 끌어안은 두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너무 많이 주무셨습니다.”
이때, 혜연이 놋쇠 대야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대야 안에는 세수하는 데 쓰는 따뜻한 물이 들어 있었다.
“마님, 어서 세수하시고 정신을 차리세요. 좀 있으면 저녁 드셔야죠.”
추길이 혜연 뒤를 쫓아왔다.
“나리, 옷 안 갈아입으세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옷장을 열었다.
“너희는 이만 나가 보거라.”
주운환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르고는 눈을 내리깔고 엽연채를 지켜봤다. 그녀가 자신의 품 안에서 뭉그적대며 일어나려고 하지 않자 그도 마음이 약해졌다.
혜연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추길은 이제 막 옷장을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주운환이 옷을 갈아입지 않겠다고 하자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이더니 혜연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파초나무 아래에 놓인 돌 의자에 앉았다.
“요 며칠 마님이 나른해하며 주무시려고만 하는데 혹시… 좋은 소식인 거 아닐까?”
목소리를 죽여 이리 말하는 추길의 얼굴에는 희색이 돌았다. 그러나 혜연은 그녀를 흘겨보며 면박만 주었다.
“나리께서 돌아오신 지 보름 정도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빠를 리가 있겠어?”
추길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렇게 저를 변명했다.
“마음이 조급해서 그러지.”
“급할 게 뭐 있니?”
혜연은 한 번 더 추길을 흘겼지만 그녀도 내심으로는 은근히 기대가 됐다.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을 거야.”
이 말에 추길은 멋쩍은 듯 고개를 숙였다.
한편, 엽연채는 주운환의 몸에 기대어 있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운환이 그녀를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
엽연채는 주운환의 어깨에 기댄 채 그를 향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러고 있으면 안 힘들어요?”
“힘들지 않습니다.”
주운환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부인을 보면 안고 싶고 만지고 싶고 입맞춤도 하고 싶은 것을 어찌합니까.”
그는 그리 대꾸하며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엽연채는 까르르 웃더니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를 힐끗 쳐다봤다. 그녀는 애정이 가득 찬 눈으로 추파를 던져 상대의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엽연채는 몸을 돌려 그의 넓은 품에 다시 기댔고 한껏 편안해져 눈을 가늘게 떴다. 실은 자신도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다니, 이제야 알게 되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조용히 기대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주운환은 일찍 조정에 나갔다.
엽연채도 씻고 단장을 한 뒤 동쪽 측문으로 가 보니 주묘서와 주묘화, 진씨가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엽연채는 그쪽으로 걸어가 오늘 주묘서의 차림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전부터 주묘서는 늘 공을 들여 치장을 했다. 물론 오늘도 한껏 신경을 썼지만 격식을 갖춰 꾸몄기 때문에 전처럼 그렇게 튀는 모습은 아니었다.
주묘서는 전지纏枝와 작고 흰 꽃문양이 들어간 연청색 배자 차림으로, 머리는 틀어 올렸고 그 위에 비취로 장식되고 술이 달린 나비 모양 장신구를 꽂고 있었다. 이렇게 꾸며 놓으니 세련미가 돋보이고 단정하며 우아해 보였다.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주묘서와 진씨가 정말로 이번 만남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치장에 심혈을 기울인 게 한눈에도 읽혔다. 아무래도 전처럼 서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라 시어머니를 보러 가는 것이니 단아하게 차려입을수록 좋았다.
“작은새언니, 오셨군요.”
주묘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간소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하얀빛을 띠는 노란색 적삼에 갖가지 꽃문양이 들어간 연녹색 하의를 입고 있었다.
주묘화는 엽연채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진씨 때문에 감히 너무 살갑게는 굴 수가 없었다.
전에도 감히 그럴 수 없었는데 이젠 주묘서가 태자 측비로 선택되기까지 했다. 서씨 가문 때문에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측비 자리는 여전히 공고하니, 주묘화는 더더욱 엽연채에게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작은새언니도 왔으니 이제 가죠.”
주묘서는 아래턱을 치켜들며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백합 문양이 들어간 비단 손수건을 손에 쥐고 등을 꼿꼿이 펴고 있으니 좀 단정해 보였다.
자신은 태자 측비가 될 사람이다. 귀인이 될 사람이며 높은 지위에 오를 사람이다. 주묘서는 엽연채를 여전히 미워했지만, 정 마마가 이런 때에는 더욱더 단정하고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당부했기에 그에 따르려고 했다.
“그럼 가요!”
엽연채는 주묘서가 얼른 태자부로 들어가 그곳에 피해를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주묘서가 저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세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천천히 대문을 나서더니 곧장 궁으로 향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차는 마침내 궁문으로 들어서더니 동화문에 멈춰 섰다.
사 마마가 이미 그곳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엽연채가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진서후 부인과 주씨 가문 두 분 소저를 뵈옵니다.”
“사 마마,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되네.”
엽연채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주묘서는 사 마마가 엽연채만 따로 부르고 저와 주묘화는 함께 엮어서 부르자 기분이 좀 언짢았다.
“세 분, 가마에 오르시지요.”
사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알겠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묘서, 주묘화와 함께 각각 연교軟轎에 올랐다. 꼬박 일각이 지나서야 연교가 멈춰 섰다.
연교에서 내린 세 사람은 귀하고 화려한 전당으로 안내를 받았다. 위쪽에 높이 걸려 있는 편액에는 ‘봉의궁’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세 사람이 서차간으로 들어가 보니 상서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용과 봉황 문양이 새겨진 기다란 박달나무 탑상에 정 황후가 자리했고, 하좌에는 한 소녀가 앉아 있었는데 바로 월안 공주였다.
정 황후는 그들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먼저 알은체를 했다.
“방금 전에 월안이와 자네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왔구먼.”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그러자 주묘서와 주묘화도 얼른 같은 인사말을 건네며 예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