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5화
생각을 하다 보니 정선제는 서 공자를 갖고 놀다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주묘서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만약 측비 자리에 오르는 사람이 주씨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당연히 모든 일을 주묘서에게 떠넘겨 그녀 혼자 이 일을 감당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 버리면 태자는 주묘서를 측비로 맞이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가만두면 그녀가 후안무치한 사람이란 걸 똑똑히 알면서도 그녀를 측비로 들여야 하는데, 그럼 황실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정 황후는 옅은 한숨을 쉬며 한 가지 방법을 내놓았다.
“이 일은 주씨 가문 대소저가 일으킨 일이니 혼인 상대를 주씨 가문 둘째 소저로 바꾸는 겁니다!”
정선제도 주묘서가 원망스럽고 그녀에게 분이 한껏 치밀었지만 음침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짐에게 타협하라는 말이오?”
서씨 가문이 이렇게 큰 소란을 피운 건 3할은 절망 때문이고 3할은 황실을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서며, 나머지는 주묘서의 평판을 망가뜨려 죽어도 그녀가 뜻대로 태자부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는 단박에 서씨 가문 사람들의 의중을 꿰뚫었다. 타협한다면 황제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이 보잘것없는 서씨 가문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겠는가.
정 황후는 깜짝 놀라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아닙니다. 신첩이 말실수를 했습니다…….”
정선제는 차가운 목소리로 일렀다.
“혼례식까지 얼마 남지 않았소. 측비이기는 하나 그래도 성대하게 치러야 할 것이오. 두 사람은 이만 나가 보시오.”
“예.”
태자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 황후는 예를 올린 후 태자와 함께 상서방을 나섰다.
* * *
주묘서와 태자의 일은 여전히 도성 안에서 떠들썩하게 퍼지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감옥에 끌려간 서씨 가문 사동에게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동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포졸에게서 필사적으로 벗어났는데, 도망을 가지 않고 관아 입구에 머리를 들이박고 죽었고 누군가가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목격담을 전해 들은 백성 중에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요릿집과 공연장에는 또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그 사동은 처음부터 죽을 각오를 하고 주씨 가문으로 달려가 그 이야기를 했던 거네. 정말 충복이 따로 없군.”
“그럼 서씨 가문 사동이 한 말은 전부 진실이란 거네!”
“그렇지! 아니면 죽음으로 자신의 뜻을 밝힐 필요가 있겠어? 얼마나 화가 치밀었으면 그랬겠어!”
“서 공자가 얼마나 슬픔에 겨워했는지 알고도 남겠어. 그 주묘서에게… 에휴!”
“정말이지 개만도 못한 것들이야! 쯧쯧!”
‘개만도 못한 것들’은 바로 태자와 주묘서였다.
이때, ‘쿵쿵쿵’ 하고 큰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포졸 몇 명이 안으로 뛰어 들어와 탁자와 의자들을 뒤집어엎으며 난동을 피웠다.
“방금 전에 누가 개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했느냐? 누가 그 말을 했어?”
선두에 서 있는 포졸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대장, 저 사람입니다!”
뒤에 있던 한 포졸이 창가에 있는 한 영감을 가리켰다.
“끌고 가거라!”
그러자 그 영감은 낯빛이 하얗게 질리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억울하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영감은 포졸들에게 끌려갔다.
포졸들이 그를 본보기로 삼자 요릿집의 손님들은 놀라서 다들 핏기가 싹 가셨다. 어떤 이들은 황급히 그곳을 떠났고 또 어떤 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들 여전히 개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태자와 주묘서를 업신여겼다.
관아에서 사람이 나와 백성들을 탄압하자 사람들은 감히 입을 놀릴 수가 없었다. 이어 포졸들은 서씨 가문을 수색했고, 뜻밖에도 서 공자의 방에서 한 무더기의 서신을 발견하게 됐다.
그들은 서 공자가 적과 내통해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한 서노의 세작이며 오랫동안 서노에 정보를 제공했다고 공표했다. 이 일을 집안 여종에게 들키자 이 사실이 이미 밖으로 누설됐다고 생각해 형벌이 두려워 자결한 것이고, 서씨 가문 일가는 서 공자의 죽음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거라고 했다.
어쨌든 서씨 가문의 비극은 황제가 주묘서와 태자의 혼사를 정해 주는 바람에 생긴 일이 아니며 태자와 주묘서의 일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적과 내통해 나라를 팔아먹다니? 일개 수재인 서 공자가 뭘 팔아먹었다는 말인가?
설령 서 대인이 적과 내통했다고 해도 그 또한 국자제주에 불과한데 그가 뭘 팔아먹었겠는가? 대제가 만든 『책론策論』과 『강학講學』을 팔아먹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시험지라도 빼돌렸단 말인가?
사건을 덮으려는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걸 다들 눈치챘으니 내심 우스웠지만, 한 집안을 멸문케 한 이 추잡한 혼사에 대해 더는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모두 속으로만 태자와 주묘서를 개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욕해 댔다.
* * *
그 시각 어계루.
강태공이 낚시를 하는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병풍 뒤로 양왕이 창문 아래에 놓인 박달나무 탑상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고, 그 한쪽에 앉아 흰 돌을 쥔 주운환이 오오五五에 바둑돌을 놓았다.
양왕이 조롱 섞인 눈빛으로 주운환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뗐다.
“운환아, 네 누이동생이 정말 인물이더구나.”
주운환은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빙산의 일각이옵니다.”
양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번에 주묘서의 파괴력이 얼마나 컸는가! 그동안 주운환은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이때, 언서가 병풍을 돌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하, 그 일이 결론 났습니다.”
이어 언서는 서씨 가문이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하……!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팔아먹었다니! 간자란 말이냐? 기껏 내놓은 이유가 고작 그것이더냐?”
양왕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착 가라앉아 있었고, 어둡고 흐릿한 눈동자는 순간 지옥에서 온 것 같은 살기를 띠었다.
주운환은 입술을 오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왕이 분명 소씨 가문을 떠올리고 있을 줄 너무나 잘 알았다.
소씨 가문은 양왕의 외가였다. 매국노로 몰려 소씨 가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온 가족이 참수당했으며, 소 황후는 소 미인으로 강등돼 동주의 황릉으로 유배됐다.
양왕은 동주에서 태어났는데 듣기로는 당시 소 황후는 노복 한 명 데려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아 그녀 곁에는 운하 공주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양왕이 태어날 때조차 운하 공주가 그를 받았다고 한다.
“가자!”
기분이 엉망이 된 양왕은 바둑판을 쓸어 버리더니 휙 그곳을 떠났다.
어떤 일들은 잊어버려서는 안 되지만 돌이켜 보고 싶지도 않은 법이었다. 양왕에게는 동주에서의 과거가 그랬다. 그리워하면서도 마음이 아파서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양왕부로 돌아온 양왕이 말에서 내리자 사동 하나가 곧장 그에게로 다가섰다.
어둡고 차가운 표정의 양왕은 손에 들고 있던 말채찍을 사동에게 홱 던져 버리고는 성큼성큼 문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평정소축으로 향한 그는 다시 시내 쪽으로 걸어갔다가 결국 어호漁湖로 갔다. 저 멀리 분홍색 형체가 호수 위에 설치된 다리 위에 서 있었다.
그러자 양왕은 코웃음을 치더니 그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빵빵하게 불면 공명등孔明燈처럼 하늘로 날아갈 수 있는 거야?”
종이봉투를 들고 있는 조앵기는 봉지 안으로 바람을 불어 넣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네, 맞아요.”
소완이 답했다.
“후우, 후우!”
조앵기가 연달아 몇 번 바람을 불어넣자 종이봉투는 빵빵해졌고 그녀는 흐뭇해하며 얇은 줄로 종이봉투를 묶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양왕이 조앵기 쪽으로 다가오더니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꽉 움켜쥐었다. 종이봉투는 ‘펑’ 소리를 내며 터져 버리고 말았다.
조앵기는 깜짝 놀라 숨이 막혔고 보니 양왕은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자신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그녀는 어둡고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훤칠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하더니 이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때, 누군가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마, 그만 노시고 어서 돌아가시죠. 전하께서 화내실 거예요.”
조앵기가 고개를 돌려 보니 검은 옷을 입은 위 마마가 언덕 위에 서서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앵기는 할 수 없이 치마를 들고 다리를 따라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 * *
서씨 가문 다섯 식구가 갑자기 목을 매달아 죽은 사건이 마침내 종결되었다.
주묘서와 진씨가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자 정 마마가 말했다.
“드디어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습니다.”
주묘서는 낯빛이 창백했고 눈 아랫부분이 아주 검게 그늘져 보였다. 그래도 이 말을 듣더니 옅은 미소를 띠었다.
요 이틀 동안 그녀는 잠만 잤다 하면 목매 죽은 서씨 가문 귀신들이 원수를 갚으러 오는 꿈을 꿨다. 어디 그뿐인가. 혼사가 어그러질까 봐 내내 불안해하며 가슴을 졸였다.
다행히 이제 서씨 가문이 적과 내통했다는 죄를 덮어쓰게 되면서 자신의 혼사는 보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주묘서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마님, 첩자 두 장을 받았습니다.”
이때, 녹지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첩자 두 장을 진씨에게 건네주었다.
진씨는 첩자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주묘서에게 알려 주었다.
“한 장은 태자 전하께서 보내신 거고 다른 한 장은… 궁첩이구나.”
주묘서가 태자의 첩자를 낚아채 보니 일은 이미 해결되었으니 안심하라는 위로의 말이 적혀 있었다.
주묘서는 기뻤고 감동스러웠다. 태자 전하가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 주니 어찌 안 그럴 수 있을까.
“이 궁첩에…….”
진씨는 손에 든, 봉황 모양 금박을 붙인 궁첩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 마마께서 너와 묘화 그리고… 엽씨에게 입궁하라고 하시는구나.”
엽연채를 언급하자 진씨는 절로 짜증이 났다.
“황후 마마께서 절 보려고 하신다고요?”
주묘서는 흥분되고 또 긴장됐다. 조만간 자신의 시어머니가 될 황후가 자신을 만나자고 하니 주묘서는 기쁘면서도 두려운 마음도 조금 들었다. 그러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왜 묘화와 그 여인까지 보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생각해 보니 그 일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정 마마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이번 일이 어찌 흘러갔는지는 다들 속으로 훤히 알고 있습니다. 황후 마마께서는 아마 기분이 좀 언짢아서 아가씨를 보려고 하시는 걸 겁니다. 하지만 한 사람만 궁으로 들이면 너무 티가 나니 몇 명 더 불러 동행하게 하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