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74화 (474/858)

제474화

한편, 엽연채와 장 마마는 일상원을 나와 함께 공거로 향했다.

매씨는 정원의 탱자나무 아래에 놓인 당의躺椅에 누워 있었고 그녀의 몸에는 두꺼운 담요가 덮여 있었다.

요 며칠 엽연채는 거의 매일같이 매씨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매씨는 몸이 점점 더 무거워져 평소에는 조용히 요양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님.”

엽연채가 배시시 웃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래, 왔구나.”

매씨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엽연채는 그녀 옆에 앉더니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씨는 본디 냉담한 성격에 이야기하는 것도 별로 즐기지 않아 여러 번 물어도 별반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엽연채는 오늘도 혼자서 떠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바로 화본 이야기였다. 엽연채는 자신이 봤던 『원앙결』 줄거리를 전부 매씨에게 들려주었다. 한참 떠들다 보니 자신이 꼭 설화자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이야기를 마친 엽연채는 기분 좋게 공거를 떠났다.

매씨는 폴짝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말할수록 흥이 나나 보던데 화본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하지만 난 정말로 듣고 싶지가 않은데 어찌한단 말이냐?”

장 마마는 얼른 그녀를 다독였다.

“참으시지요.”

매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상원 쪽은 정말 갈수록… 말썽을 피웁니다!”

장 마마는 화제를 바꾸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매씨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말썽을 피우라고 하거라!”

한편, 공거를 나온 엽연채는 즐겁게 궁명헌으로 향했다. 그녀는 뒷짐을 진 채 청석판이 깔린 오솔길을 걸어가며 말했다.

“『원앙결』 이야기를 거의 다 들려 드렸어.”

“그럼 이제 다른 화본 이야기를 해 드리시면 되죠!”

추길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서둘러 마저 다 봐야겠다!”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이며 동조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원앙결』보다 훨씬 재미있어. 나중에 할머님께 이야기해 드리면 분명 더 좋아하실 거야.”

두 사람이 연못을 지나가다 보니 수면 위를 덮고 있는 연꽃은 이미 시들어 있었고 풍경에서 가을의 쓸쓸함이 조금 느껴졌다.

“근데…….”

추길이 미간을 찌푸리며 일상원 쪽을 언급했다.

“그분들이 밖에서 나리를 중상모략하면 나리는 황제 폐하께 태자 전하와 큰아가씨의 혼사를 거둬 달라고 주청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마님은 그분들이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한 겁니까?

일이 커졌다면 일상원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을 거예요. 측비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앞으로 아예 시집을 못 가게 될지도 모르죠. 그런데 지금… 마님이 그분들을 말려 주셨잖아요.”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조그만 돌멩이를 몇 개 집어 시든 연꽃이 떠 있는 연못으로 던졌다. 그러자 돌멩이는 ‘퐁당’ 소리를 내며 고요하던 연못 물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쨌든 황제 폐하의 뜻이니 부군이 폐하께 청을 드린다고 해도 반드시 거둬지는 건 아닐 거야. 천자의 말은 한번 뱉으면 바꿀 수 없는 법이니까. 폐하께서 자신의 뺨을 때리려고 하시겠니?

그리되면 괜히 부군만 구정물을 뒤집어쓰게 될 거야. 폐하께서는 이 일을 덮으려고 이때다 싶어 부군이 구정물을 뒤집어쓰게 만드실 테니까. 이런 구정물은 씻어 내고 싶어도 씻어 낼 수 없잖아.”

추길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역시 마님은 총명하고 지혜로우세요.”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제일 중요한 건 주묘서의 파괴력이 이렇게나 어마어마하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순조롭게 태자부로 시집가서 태자를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그녀의 존재를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게 아니겠는가.

엽연채는 지금 양왕이 걷는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 주운환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대제의 큰 영웅이 되었고, 대제에서 가장 중요한 장수이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지만, 그가 조정에 돌아오자마자 병권은 정선제의 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재 양왕은 정선제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상태였다.

육부 중 세 곳은 태자의 사람이었고 이부吏部와 공부의 상서만 양왕의 사람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정선제의 충신이었다.

그러니 양왕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병권을 손에 쥐는 것이며, 가장 좋은 건 도성 수비를 맡은 병영과 금위군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도성의 투구와 갑옷이니, 이를 해내면 단번에 황제를 퇴위시킬 수도 있었다.

문신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기왕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면 문신들도 최대한 반란에 가담하게 만드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양왕이 제위에 올랐을 때 문신들 대부분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며 저항도 적게 받을 것이다.

또 하나 챙겨야 할 것이 바로 민심이었다.

정선제와 태자의 좋은 평판이 밖에 퍼져 있고 그들이 성실하게 정무를 보고 백성들을 위한다면 거병하여 황위를 손에 넣는다고 해도 결국 백성들의 질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지금 정선제와 태자의 소문이 이렇게 안 좋게 퍼져 있으니 양왕에게는 그야말로 호재였다.

무력으로 황제의 폐위를 강요하는 건 변수가 컸다. 여러 요소 하나하나가 승패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니 문신이든 민심이든 얻을 수 있으면 다 얻는 편이 좋았다.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 모두 얻게 되면 일은 순조롭게 풀릴 것이다.

따라서 주운환은 정선제와 태자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누군가가 내부로 들어가야만 하는데, 그 어렵고도 막중한 임무를 주묘서에게 주는 것이다.

아무튼, 엽연채는 이번에 주묘서를 보며 ‘세상에 이런 사람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씨 일가가 다섯 목숨을 버려 가며 한 사람의 명예와 절조를 더럽히도록 그들을 몰아붙인 걸 보면, 주묘서도 참 전무후무한 인물인 셈이었다.

* * *

엽연채 등이 떠난 후, 일상원은 또다시 암담하고 절망적인 분위기에 휩싸였다.

“흑흑. 어떡하면 좋아요……. 전 이 혼사를 놓칠 수 없어요…….”

주묘서는 진씨의 품으로 파고들어 가슴이 찢어질 듯 구슬프게 울었다. 하지만 진씨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저 이렇게 소리쳤다.

“나리께서는 어디 계시냐? 가서 나리를 뫼셔 오너라.”

“소인이 가겠습니다!”

정 마마는 그리 말하더니 냉큼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정 마마가 주 백야를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에휴……. 또 무슨 소란이요?”

주 백야는 다가오면서 짙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지금 무슨 일인지 물어보시는 거예요?”

진씨는 화가 나 고함을 쳤다.

“요 며칠 그렇게 큰 소란이 일어났는데 나리는 모르고 계셨다는 겁니까?”

“이!”

주 백야도 분이 치밀어 새파란 얼굴로 되받아쳤다.

“다 당신과 묘서가 스스로 만든 소란이 아니오! 멀쩡히 정혼했는데 또……! 에잇! 당신과 묘서를 나무라는 것도 이젠 귀찮소!”

그는 그리 말하고는 옷소매를 확 뿌리치며 돌아섰다.

“묘서와 태자 전하의 혼사가 정해졌을 때는 나리도 아주 기뻐하지 않으셨어요? 설마 그때 묘서가 다른 사내와 정혼했다는 걸 모르셨던 건 아니겠죠? 나리 본인도 기뻐했던 일인데 이제 일이 생기니 나 몰라라 하시는 겁니까! 나리는 묘서의 아버지인데, 묘서는 아버지가 있어도 별수 없는 겁니까!”

진씨가 통곡하기 시작하자 주 백야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이……! 지금 이 혼사는 단순히 우리 집안일이 아니오. 아무튼 우린 관여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오. 관여하려 해도 소용없소!”

그는 다시금 옷소매를 홱 털며 그곳을 떠났다.

진씨와 주묘서가 더욱 섧게 울자 정 마마가 나서서 그들을 타일렀다.

“나리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이 일은 단순한 집안일이 아니에요. 어찌 됐든 간에 저희는 그저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씨와 주묘서는 그에 온 세상이 암흑 속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결국 울음을 그치고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그 시각 황궁의 상서방.

정선제는 어두운 얼굴로 책상 앞에 서서 뒷짐을 지고 있었고, 진홍색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는 정 황후가 한쪽에 서 있었다. 그리고 태자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바마마…….”

“무릎을 꿇어서 뭐 하느냐!”

정선제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소자의 일로 아바마마를 난처하게 만들었사옵니다!”

태자가 작은 목소리로 사죄했다.

“뭘 난처하게 만들었느냐?”

정선제는 그리 물으며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조금 떨었고, 날카로운 시선을 발하는 흐릿한 두 눈동자로 태자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말해 보라니까.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

추궁을 당한 태자는 몸을 떨었고 부드럽고 품위 있는 얼굴 역시 표정이 싹 변했다. 방금 전 송구스러웠던 마음이 삽시간에 분노로 바뀌었지만 감히 입을 열지는 못했다.

보다 못한 정 황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자를 감쌌다.

“태자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렇소. 태자는 잘못이 없소! 그리고 짐도 잘못이 없소!”

정선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큰소리쳤다.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다. 자신은 천자이고 태자는 황위를 이을 황태자이니 잘못을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이 천하는 모두 자신의 것이다.

주묘서가 이미 정혼을 했다 한들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태자가 빼앗으면 그들은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들이 감히 죽음을 이용해 자신들을 난처하게 만들다니, 이는 그야말로 황권皇權에 도전하는 행위였다. 서씨 가문 사람들이 전부 죽지 않았다면 이들을 능지처참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정선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럼 혼사는…….”

태자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들어 정선제를 쳐다봤다.

“그건 폐하의 뜻이네. 폐하께서 정해 주신 혼사이니 당연히 그대로 진행해야지.”

정 황후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정선제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면 어떻게 소 황후를 끌어내고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는가?

정 황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정선제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이 일을 어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뭐 어떻게 처리하겠소?”

정선제는 콧방귀를 뀌었고 그의 눈빛에는 매서운 기운이 가득했다.

그 서씨 가문 노비는 참으로 교활했다. 감히 그런 이야기를 했으니 황제는 자비롭지 않고 인자하지 않으며 두 남녀의 사이를 억지로 갈라놓은 사람이 되었고, 여전히 서 공자를 흠모하는 주묘서와 혼인하게 된 태자는 오쟁이를 지게 되었다.

아니면 주묘서가 서 공자와 정혼했는데 태자와 사통했으니 주묘서와 태자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뭐 이런 더러운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