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3화
그 시각 일상원.
밖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들은 진씨와 주묘서는 화가 난 나머지 몸이 기우뚱했다.
“아……!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얼굴이 종잇장처럼 질린 주묘서는 탑상 위에 웅크리고 앉아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분명 그자가 나에게 푹 빠져 허황된 망상을 한 것에 불과한데…….”
“어서 묘서의 명예를 더럽히는 그 천한 놈을 쫓아내거라!”
진씨는 노하여 호통을 쳤다.
정 마마가 얼른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하인 몇 명을 불러 모았다. 이윽고 ‘쿵’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어떤 고얀 놈이 우리 큰아가씨를 중상모략하는 것이냐! 너희 서 공자가 우리 아가씨에게 푹 빠져 헛된 망상을 하고 죽기 살기로 매달린 거다! 우리 아가씨가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목을 매달고 자결한 거란 말이다!”
정 마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을러댔다.
“우리 아가씨께서는 이미 정2품 측비로 책봉되셨다! 이미 황실 사람이시란 말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뭐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 게야?”
정 마마의 으름장에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깜짝 놀라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물러나지 않고 도리어 주묘서와 서 공자가 아주 다정해 보이는 모습을 직접 봤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 않냐고 받아치고 싶어 했다.
“하하하! 용기 있으면 주 소저가 직접 나와 해명해 보시든가!”
그때, 서씨 가문 사동이 큰 소리로 웃으며 반박했다.
“그날 도련님께서 아가씨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시겠다고 하셔서 나는 한쪽으로 비켜서 있었어요. 하지만 들어야 할 건 다 들었고 봐야 할 건 다 봤어요.
어찌나 애처로운 얼굴로 강요당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던지! 주 소저는 자신은 진심으로 우리 도련님에게 시집오고 싶지만, 황제 폐하께서 억지로 두 분 사이를 갈라놓고 혼인 교서를 내린 거라고 했어요!”
그 말에 정 마마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방자한 놈! 서씨 가문 노비는 정말 예의가 없구나. 감히 황제 폐하를 폄훼하다니.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가장 중요한 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주묘서의 인격을 모독하며 황제와 주묘서의 관계를 이간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키거라! 비켜!”
이때, 누군가가 다급히 호통을 쳤다.
백성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포졸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고 선두에 선 포졸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헛소문을 퍼뜨리며 말썽을 부리는 자다! 끌고 가거라!”
그리 말하자 포졸들이 그 사동을 끌고 자리를 떴다.
포졸들을 본 백성들은 놀란 나머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몰래 모여서 사동이 했던 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황제가 억지로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기에 주묘서 역시 강요를 당한 것일까? 아니면 주묘서가 서 공자를 데리고 놀다가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일까?
사동은 포졸에게 끌려갔지만 그가 남긴 문제 때문에 주묘서는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 * *
궁명헌 안, 엽연채는 밖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듣더니 미간을 씰룩거렸다.
어떻게 해명을 해도 주묘서의 체면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주묘서가 강요당한 거라면 정선제는 두 사람 사이를 억지로 갈라놓고 다섯 식구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 된다. 게다가 주묘서가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태자가 아니라 서 공자인 것이었다.
주묘서가 강요당한 게 아니라면 그녀는 혼인 약속을 깨 버리고 태자와 놀아난 천박한 여인인 것이다. 서 공자는 버림을 받아 이미 충분히 가여운 사람인데 그녀는 그를 갖고 놀려고 했다.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붙잡아 두어 그를 더욱 상심하고 절망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 * *
주씨 가문 대문 밖에 서 있던 백성들은 서씨 가문 사동이 끌려가자 삽시간에 흩어졌다.
정 마마는 사람을 시켜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근 뒤 서둘러 일상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안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흑흑. 그 빌어먹을 것들이……. 난 결코… 난 그런 적이 없어…….”
그러나 무엇을 그런 적이 없다는 건지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주묘서는 그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억울해했고 진씨는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꼭 안고 있었다.
“맞습니다, 맞아요. 아가씨는 결백한 분이십니다! 이게 다 그 역겨운 사람 때문이에요. 자기가 얻지 못하니까 아가씨가 잘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아가씨의 명예와 절조를 더럽힌 거예요!”
정 마마는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주묘서의 편을 들었다.
“정 마마!”
주묘서는 그 말을 듣더니 얼른 그녀의 품으로 달려가 가슴이 찢어질 듯 슬프게 울었다.
진씨도 걱정이 되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그녀가 걱정하는 건 서씨 가문 사람들이 목매 죽은 귀신이 되는 게 아니라 주묘서의 혼사였다. 이런 일이 벌어져 주묘서가 윗분들을 난처하게 만들었으니, 혼사에 영향을 줄까 봐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진씨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유, 뭘 그렇게 우세요!”
이때, 누군가의 비웃음이 울려 퍼졌고 진씨와 주묘서는 낯빛이 싹 변했다. 비 이낭이 몸을 흔들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주묘서는 안색이 확 변하더니 얼른 정 마마의 품에서 나와 눈물을 닦았다. 안 그러면 비 이낭 이 빌어먹을 여편네에게 비웃음을 잔뜩 살 게 뻔했다.
“여긴 왜 온 것이냐?”
진씨는 비 이낭을 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마님, 저도 큰아가씨가 걱정되는 것뿐입니다.”
비 이낭은 버들잎 모양의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세웠다.
“자네 걱정은 필요 없네!”
“전 정말로 걱정이 됩니다!”
비 이낭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이렇게 가다가는 큰아가씨의 혼사에 영향을 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안 좋은 평판이 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바깥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러는 건 어떨까요? 희생양을 만드는 겁니다!”
진씨와 주묘서는 낯빛이 변했으나 비 이낭의 말투를 들어 보니 정말로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어떻게 희생양을 만든다는 것이냐?”
“그게 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비 이낭은 반문하며 얼른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 일이 참 난처하게 됐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두 분의 사이를 억지로 갈라놓은 것이 되거나 큰아가씨의 평판이 엉망이 되거나, 두 가지밖에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저희가 사람을 시켜 셋째 도련님이 태자 전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누이동생을 팔아 부귀영화를 얻으려 했다고 밖에다 소문을 내는 겁니다. 셋째 도련님이 태자 전하께 서씨 가문과 아가씨는 진작에 혼약이 깨졌다고 거짓말했다고 하는 거죠. 그리하면…….”
진씨와 주묘서는 그 말에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이때, ‘촤락’ 소리를 내며 주렴이 걷히더니 아리따운 모습의 여인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름 아닌 엽연채였다.
“이낭, 어머님.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걸어왔다.
“이!”
진씨와 비 이낭 등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엽연채에게 이 상황을 딱 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녹엽이… 녹엽이 이 빌어먹을 것이……!”
화가 난 진씨는 이 말만 외칠 뿐이었다.
늘 문을 지키는 녹엽은 누가 오면 항상 소리를 쳤는데, 하필 이렇게 중요한 때에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녹엽이를 불러서 뭐 하시려고요?”
누군가의 싸늘한 목소리가 엽연채 뒤에서 울려 퍼졌다. 회색 옷을 입은 나이 든 마마가 걸어나왔는데, 바로 매씨를 곁에서 모시는 장 마마였다.
“녹엽이는 제가 공거로 보내 물건을 좀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백주 대낮에 항상 문을 지키게 해야 합니까? 뭔가 떳떳치 못한 일이라도 벌이고 계셨나 보지요? 문을 지키라고 하신 걸 보니 말이죠.”
진씨와 비 이낭은 낯빛이 새파래졌다.
“비 이낭과 어머님은 참 좋은 생각을 하셨네요. 지난번에 저와 부군이 이곳에 왔을 때 어머님과 아가씨에게 그분에게 시집가지 말라고 했는데 어머님과 아가씨는 끝까지 매달리셨어요. 그런데 이제 일이 터지기 무섭게 저희에게 구정물을 튀기려고 하시네요?”
엽연채가 냉랭한 목소리로 힐난하자 진씨와 주묘서는 안색이 또다시 확 변했다.
“허, 허튼소리 말거라!”
진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며 얼른 그녀의 말을 부인했다.
“지금 허튼소리라고 하셨어요?”
엽연채는 ‘픽’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저와 장 마마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러자 진씨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그녀는 대뜸 비 이낭의 뺨을 때렸다. 뺨을 맞은 비 이낭은 비명을 질렀다.
“아악! 마님……!”
“이 악독한 것. 감히 그따위 말을 꺼내다니!”
진씨는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엽연채와 장 마마를 쳐다봤다.
“이 악독한 것을 혼내려는 참이었는데 마침 너희들이 온 거다.”
“아. 그랬던 거군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 부군이 누이동생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다는 소문이 밖에 퍼지면, 부군은 곧장 황제 폐하께 아가씨와 태자 전하를 맺어 주겠다는 폐하의 뜻을 거둬 달라고 주청을 드릴 겁니다. 그리함으로써 부군의 결백을 증명하겠죠. 전 부군이 충분히 그리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말에 진씨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격노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밖에 떠도는 소문이 하도 흉흉하길래 아가씨가 잘 있는지 보러 온 겁니다. 괜찮아 보이니 마음이 놓이네요.”
엽연채는 제 할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고, 장 마마는 냉랭한 눈빛으로 진씨와 주묘서를 쓱 쳐다보더니 이렇게 한마디 했다.
“저도 노마님을 대신해 큰아가씨의 안부를 여쭈러 왔는데 아무 일도 없어 보이니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장 마마도 휙 그곳을 떠났다.
진씨는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주렴을 쳐다보자 화가 치밀어 올라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삿대질을 했다.
“저 빌어먹을 것……!”
“마님!”
정 마마가 다급한 목소리로 진씨를 부르더니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말렸다.
“셋째 마님이 하신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하시면 아니 됩니다! 궁지에 몰리면 셋째 나리는 정말로 그리하실 겁니다! 다행히도 이 일을 셋째 마님께서 들으셨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진씨도 두려움을 느끼며 가슴을 움켜쥐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비 이낭을 쏘아봤다.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얼토당토 않는 생각만 꺼내 놓다니!’
“이낭은 별일 없으면 이곳에 오지 말거라! 우린 온종일 남을 해칠 궁리만 하는 자네와는 다르네.”
비 이낭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변명했다.
“전… 그저 큰아가씨를 도우려던 것뿐입니다.”
그러고는 멋쩍은 듯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비 이낭은 진심으로 주묘서를 돕고 싶었다. 주운환과 주종과 모두 서자이기 때문에 둘은 은근히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주운환이 벼락출세를 하게 되었으니 그만 잘되는 꼴을 어찌 지켜만 본단 말인가.
가만히 있다가는 주종과는 적녀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데, 그럴 바에야 주묘서에게 잘 보이는 편이 나았다.
주묘서는 태자 측비가 되었으니 앞으로 그녀가 교류할 사람들은 전부 황제의 친인척일 것이다. 비 이낭은 주묘서가 주종과에게 명문가 적녀를 찾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