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72화 (472/858)

제472화

그 시각 궁명헌.

엽연채는 탑상에 앉아 화본을 보고 있다가 서 공자 일을 전해 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님, 영교 아가씨 부부께서 오셨어요.”

밖에서 추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진지항이 엽영교를 부축하며 함께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 어쩐 일이에요? 조심해요!”

엽연채는 얼른 밖으로 뛰어나가 엽영교를 부축하며 문턱을 넘어섰다. 엽영교는 임신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됐기 때문에 엽연채는 혹시라도 그녀가 넘어질까 봐 걱정스러웠다.

안으로 들어와 소청의 원탁에 둘러앉고 나서 엽연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서씨 가문 일을 듣고 온 거야…….”

엽영교는 그리 말하며 진지항을 쳐다봤다. 그러자 진지항은 낯빛이 새파래지더니 이어 냉소를 지었다.

“주묘서, 참 대단한 여인이야! 욕심이 끝이 없지. 전에 내가 그 여인에게 혼담을 꺼냈었는데 그 여인이 원치 않아 내가…….”

진지항은 조금 부끄러워져 말꼬리를 흐렸다.

“부군이 어리석어 주묘서를 찾아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결국 주묘서는 부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드러냈지. 그런데 그러면서도 애매모호한 말을 하며 부군을 갖고 놀려고 했어.”

엽영교는 피식 웃더니 진지항 대신 말했다.

“다행히도 이 바보 같은 부군이 눈이 삐지는 않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녀는 뒷말을 삼키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주묘서는 사랑에 푹 빠져 또 주묘서를 찾아간 서 공자에게 또 애매하게 여지를 주었을 것이고, 그 바람에 서 공자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진을 택했을 게 분명했다.

* * *

그 시각 일상원.

주묘서는 진씨의 품에 안겨 덜덜 떨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 공자는 사랑에 눈이 멀었었는데… 목매 죽은 귀신이 되어… 날 찾아오면…….’

주묘서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죽인 게 아니에요…….”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당연히 네가 죽인 게 아니지!”

진씨는 얼른 이렇게 부정했으나 그녀의 낯빛 또한 창백했다.

“이건 황제 폐하께서 정해 주신 혼사다! 그자가 허튼 생각을 한 것뿐이야. 본인이 어리석어 그리 행동한 건데 누굴 탓해!”

그럼에도 주묘서는 두려움에 혼자 잘 수가 없어 저녁에 진씨의 처소로 넘어왔다.

하룻밤이 지나서야 주묘서는 마음이 좀 진정됐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녀는 진씨와 함께 탑상에 눌러앉아 낙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녹엽이 갑자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마님… 아가씨… 그 서씨 가문에서…….”

“서씨 가문이 뭐?”

주묘서는 깜짝 놀라 몸을 떨더니 손에 들고 있던 낙자를 떨어뜨렸다.

‘서씨 가문 사람들이 따지러 온 건가?’

이것이 바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서 공자의 죽음이 그날 그를 자극했던 자신의 행동과 무관하다는 말은 본인조차 믿지 못할 것이었다. 사람을 죽게 만들었으니 속으로 켕기고 두려워하고 있는데, 서씨 가문 사람들이 직접 따지러 온다면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 소란스러워지면 몹시 볼썽사나워질 게 분명했다. 자신은 조용히 태자부로 시집가고 싶은데 말이다.

“이건 황제 폐하께서 정해 주신 혼사다! 그런데 그자들이 감히 소란을 피우러 온 것이냐?”

진씨는 들고 있던 매화 모양의 낙자를 탑상 위로 집어 던지더니 격분한 목소리로 성을 냈다.

“그자가 스스로 자진한 건데 누굴 탓할 수 있단 말이냐?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지도 아직 모르는 판국에!”

“서씨 가문…….”

녹엽은 쭈뼛거리며 진씨를 쳐다봤다.

“서씨 가문 분들이 오신 게 아닙니다……. 서씨 가문 부인과 노야, 그리고… 그 댁 조부모님이 모두 목을 매어 자결하셨답니다!”

그 말에 진씨와 주묘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모두… 목을 매어 자결했다니?”

진씨는 목소리를 떨었고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게 무슨 뜻이냐?”

“그러니까… 온 가족이 모두 목을 매달았습니다!”

녹엽이 창백한 얼굴로 다시 한번 반복했다.

“방금 전에 제가 물건을 사러 밖에 나갔었는데… 밖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두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진씨와 주묘서는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서 공자가 죽자 꽤 많은 도성 사람들이 그의 어리석음을 탄식했고 서씨 가문 상황을 주의 깊게 살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서씨 가문을 찾아가 서 공자를 위해 향불을 피우고 물건을 태워 줬다.

그런데 이튿날 이른 아침, 어제 장례 절차를 도왔던 부인이 영구靈柩를 모신 방 안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관 위로 네 사람이 나란히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서 대인과 서 부인, 서 공자의 조부모였다.

네 사람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고 하나같이 낯빛이 창백했다. 그들은 달갑잖은 기색이 느껴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핏발이 잔뜩 선 눈알은 당장이라도 빠져나올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부인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고 다시 깨어나서도 겁에 질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더니 겨우 몸을 일으켜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서씨 가문에서 뛰쳐나와 울부짖었다.

“서씨 가문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 영구를 모신 방 안에서 목매달아 죽었다!”

이 말은 순식간에 온 도성에 파문을 일으켰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안 죽고 배기겠어! 유일한 아들이 죽었으니……. 나였어도 아들을 따라 죽으려고 했을 거야.”

“쯧쯧… 정말 가엾네. 게다가… 이건 너무하잖아!”

그들이 너무하다고 탓하는 사람은 당연히 정선제였다.

서 공자 한 명만 죽었다면 그가 어리석어서 그런 거라고 말하겠지만, 지금 집안사람이 전부 죽어 버렸으니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그 혼사를 위해 다섯 식구를 죽음으로 내몰다니! 한 가문이 멸문된 셈 아닌가! 이건 모반이나 일으켜야 받을 처우였다.

서씨 가문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상황을 다 받아들였으며 충심을 다했다. 황제가 주묘서와 태자를 맺어 주겠다고 하니 서씨 가문 사람들은 황제가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찍소리도 안 하고 그들의 뜻에 따랐다.

그런데 그 결과 서씨 가문은 멸문되고 말았다.

“그 사람들은 모든 것에 순응하였는데… 관용을 베풀 수는 없었던 걸까. 원래 정혼까지 잘 맺은 사이었는데…….”

말을 하던 이는 감히 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던 거겠지!”

한 백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개죽음을 당했으니 보통 억울한 일인가. 하지만 서씨 가문은 신하이니 황제에게 항명할 수도 없고 보복할 능력도 없었다. 그저 죽음으로써 모든 걸 끝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속으로 정선제에게 침을 뱉으며 그를 부덕하다고 욕했다.

* * *

그 시각 황궁 안.

정선제는 어두운 얼굴로 봉의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축 처진 얼굴로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뺨을 푸르르 떨고 있었다.

서씨 일가가 갑자기 다 목숨을 끊으면서, 자신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늘 성군이라며 자신했건만, 지금은 충신 일가가 멸문되도록 몰아붙인, 어질지도 의롭지도 못한 폭군이 되어 버린 것이다.

태자는 창백한 얼굴로 하좌에 앉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자신의 혼사를 맺어 주다가 생긴 일이었기 때문이다.

“서씨 가문 사람들이… 머리가 어떻게 돼서 그리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정 황후가 침묵을 깨고 나섰다.

“게다가 아직 왜 그랬는지 이유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서 공자가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해서 형벌이 두려워 자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서 공자는 서씨 가문 외아들이니 부모와 조부모가 상심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 죽은 것입니다.”

정선제는 얼굴 근육을 파르르 떨더니 태자를 쓱 쳐다봤다.

이 빌어먹을 놈이 주운환을 암살하려는 일만 벌이지 않았다면 자신도 이렇게 서둘러 주운환을 태자 곁에 묶어 놓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잘잘못을 따져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황후가 말한 대로 사람을 시켜 결코 태자의 혼사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포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주씨 가문 대문 앞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상복을 입은 한 소년이 서씨 가문에서 뛰어나와 곧장 주씨 가문으로 향하더니 주씨 가문 대문 앞에서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주묘서, 이 파렴치한 몹쓸 년아! 당장 밖으로 뛰어나와! 우리 도련님을 해치고 우리 나리와 마님까지 죽이다니! 네년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소년은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서씨 가문을 둘러싸고 구경을 하고 있던 백성들은 상복 차림의 소년이 서씨 가문에서 뛰어나오는 모습을 보더니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직감하고는 그를 쫓아왔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욕을 하는 그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정한 혼사인데… 서 공자가 생각을 잘못한 거지…….”

“그래요! 우리 도련님이 생각을 잘못하신 거예요! 도련님이 어리석었어요!”

그 사동은 그리 말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때 주씨 가문은 몰락한 상태였고, 사람들은 모두 진서후 나리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며 주씨 가문은 끝장날 거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우리 도련님은 주씨 가문 대소저를 저버리지 않으셨어요.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혼을 유지하셨죠!

그땐 주씨 가문 부인도 이 혼사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요! 우리 도련님이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혼사를 맺자고 재촉했었죠.

그런데 진서후 나리가 무사히 돌아오자마자 주씨 가문 부인이 우리 가문으로 달려와 파혼하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댁 서녀를 적녀 대신 시집보내겠다는 말도 했죠! 주씨 가문 대소저에게 푹 빠진 우리 도련님은 주씨 가문 부인의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시고 한사코 파혼을 거절하셨어요!

그런데 사실은 이 댁 대소저가 몰래 태자 전하와 사통을 한 거예요!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자 우리 도련님을 짓밟은 거죠! 가엾은 우리 도련님께서는 소저가 가장 초라할 때도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는데, 소저는 집안 가세가 좋아지기 무섭게 우리 도련님을 짓밟은 거라고요!”

그 말에 주위를 둘러싼 백성들은 덩달아 대문을 향해 침을 뱉었다.

“주 부인이 너희 가문을 찾아가 혼담 이야기를 꺼냈다는 말이지? 그뿐만 아니라 이미 태자 전하와 사통을 했다?”

사동이 이어서 말했다.

“그분은 황실의 자제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혼사를 정하겠다고 하시는데 신하인 서씨 가문이 뭘 더 어쩔 수 있었겠어요. 그저 따르는 수밖에요! 그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죠!

그래도 우리 도련님은 상심을 이겨 내시지 못하고 주씨 가문 소저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물어보려고 소저를 찾아가셨어요. 분명히 말해 주면 단념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글쎄 그 소저가 억울한 표정으로 본인은 강요당한 거라고 말하더군요! 그럴 줄 누가 알았겠어요. 도련님에게 아직 정이 남아 있다는 걸 은근히 내비친 건데, 사실은 도련님을 갖고 논 거죠!

소저가 도련님과의 관계를 깨끗이 정리했다면 도련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단념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소저는 그러지 않았죠!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순진한 우리 도련님은 두 사람이 서로를 여전히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으셨지만 어찌하실 도리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시더니 한순간의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혀 자결하신 겁니다!”

백성들은 경악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사정이 그렇다면 서 공자를 주묘서가 죽인 셈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맞아, 그날 내가 길을 지나가다가 서 공자와 주씨 가문 첫째 소저가 골목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걸 분명히 봤어. 나중에 서 공자가 크게 상심한 얼굴로 그곳을 떠나더라.”

한 백성이 목격담을 늘어놓았다.

“아… 정말 이 젊은이가 말한 대로라면 진짜 후안무치하고 야비한 사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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