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0화
녹지는 밖으로 뛰어나가 서씨 가문 하인을 내쫓았다.
서씨 가문 하인이 집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전달하자 서 부인은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설령 황제의 뜻이라고 해도 두 가문의 자제는 이미 정혼한 상태이니 주씨 가문에서 자신들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상황인데, 진씨는 빈말로도 사과하지 않았다.
서 부인은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으나 주씨 가문을 어찌할 방법이 없으니 이를 악물고 그저 스스로 해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씨 가문 사람들은 이틀에 걸쳐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명했다. 서씨 가문 아들이 주묘서와 정혼했던 게 맞기는 하나 궁합을 볼 때 아들이 사주를 잘못 적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으며, 당시에는 궁합이 좋은 줄 알고 정혼을 했으나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사주를 잘못 적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에 다시 올바른 사주를 절로 보냈더니 두 사람의 궁합이 안 맞는다는 결과가 나와 양가가 파혼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랬던 거군!”
사람들이 정말로 믿는지 아닌지는 당연히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서씨 가문 사람들이 해명을 했으니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떠들고 다닐 수 없었다. 오히려 누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태자와 주묘서가 얼마나 이상적인 한 쌍인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에 대해 다들 이야기하고 다녔다.
진씨와 주묘서는 밖에서 들리는 주묘서 칭찬에 냉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쯧쯧. 죄짓고는 못 사는 법이지! 그러게 우리가 파혼하자고 했을 때 얌전히 파혼했으면 얼마나 좋았어. 그랬으면 우리도 그 사람들에게 덕담 몇 마디는 해 줬을 게다! 이젠 우리가 입을 열 필요도 없이 저들이 알아서 우리를 위해 상황을 수습해 주는구나.”
“아가씨!”
이때, 녹지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첩자를 건넸다.
주묘서는 교룡 문양 금박을 붙인 첩자를 보더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전에는 태자부에서 온 첩자를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모른다. 게다가 태자부의 첩자를 받고 싶으면 엽연채에게 굽신거려야 했는데, 이젠 태자부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첩자를 보낸 것이다.
주묘서는 득의양양해하며 첩자를 열었다.
“뭐라고 적혀 있느냐?”
진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태자 전하께서… 내일 호수를 유람하자고 하시네요!”
주묘서는 조그만 얼굴이 붉어졌고 그녀의 눈빛에는 행복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럼 곱게 치장해야겠구나.”
진씨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활짝 핀 꽃 문양이 들어간 발이 ‘촤락’ 소리를 내며 걷히더니 백 이낭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밖에서 들었는데 큰아가씨께서 내일 태자 전하와 호수를 유람하신다고요. 태자 전하께서 큰아가씨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시나 봅니다. 정말 축하할 일이네요.”
백 이낭은 듣기 좋은 말을 건네며 하좌에 놓인 권의에 앉았다.
진씨와 주묘서는 기뻐서 입이 귀에 걸렸고 주묘서는 수줍어서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큰아가씨의 혼사도 정해졌으니… 부인, 묘화 아가씨의 혼처도 찾아봐 주십시오. 묘화 아가씨도 열여섯입니다.”
백 이낭은 진씨에게 잘 보이려는 얼굴로 간곡히 부탁했다.
“알겠다. 우리가 잊어버릴까 봐 그러느냐?”
진씨는 청화 찻잔을 손에 들더니 찻잔 뚜껑으로 찻잔 안의 찻잎을 살살 저었다.
백 이낭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진씨를 보더니 초조한 마음에 할 수 없이 이렇게 말을 보탰다.
“부인… 그 서씨 가문은… 이제 큰아가씨는 곧 태자부로 시집가실 겁니다. 서씨 가문이 우리 주씨 가문과 정혼했던 것도 인연이고… 게다가 지난번에 부인께서도 묘화가 대신 그 가문에 시집가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결국 서씨 가문에서 승낙하지 않기는 했지만요.
이제 큰아가씨는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게 확실시되었는데 서씨 가문 사람들이 어떻게 큰아가씨같이 대단한 분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묘화 아가씨는 큰아가씨처럼 좋은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으니 이번에야말로 서씨 가문에 시집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 이낭은 서씨 가문이 괜찮은 가문이라고 생각했다. 주씨 가문 가세가 추락할 때 서씨 가문이 이를 못마땅해하지 않은 걸 보면 인품이 아주 좋은 사람들인 게 틀림없었다.
또 서 공자를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수려한 외모를 가진 훤칠한 사내였고 수재의 공명도 얻은 자였다. 그러니 주묘화가 시집을 가게 된다면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건 아니어도 적어도 편안하고 윤택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백 이낭은 그리 생각하며 눈을 들어 조심스럽게 진씨를 훑어봤다.
진씨는 차를 홀짝거리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도 처음에는 서씨 가문이 좋은 혼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 며칠 동안 알아보니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네. 그 서 공자는 인품이 형편없어 정말로 좋은 배필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묘화가 내 배로 낳은 딸이 아니기는 하나 그래도 내 딸이다. 그런데 내 어찌 묘화를 박대하겠느냐? 게다가 자네는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자랐고 날 보필해 왔으니 더더욱 묘화가 그런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건 볼 수 없지.”
백 이낭은 그 말에 표정이 굳어졌고 순간 진씨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게 되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진씨는 아직도 엽연채와 엽이채의 남편이 바뀐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서자인 주운환이 아내가 바뀐 덕에 점점 더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고 믿으니, 진씨는 나중에 서씨 가문의 가세가 좋아질까 봐 걱정이 되어 이 혼사를 주묘화에게 넘기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백 이낭은 분통이 터지고 기분이 쌉쌀했다. 그래서 그저 허허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그곳에서 물러 나갔다.
주묘서는 백 이낭이 떠난 방향을 쳐다보며 콧방귀를 뀌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버린 걸 걔가 뭔데 얻게 놔두겠어!”
* * *
어찌 됐든 간에 바깥의 동향에는 조금 변화가 생겼다.
궁명헌 안, 엽연채는 제민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추길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밖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글쎄, 사람들이 태자 전하와 묘서 아가씨가 천생연분이라며 칭찬을 하고 있어요.”
제민은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빈정거렸다.
“천생연분? 그럼 태자비 마마는 뭐라는 말이냐?”
엽연채도 비웃음을 짓더니 말을 받았다.
“주묘서는 자신을 정비로 생각하거든! 하지만 태자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거야.”
앞으로 대제의 영토를 굳건히 수호하는 막중한 사명은 주운환에게 달려 있으니, 태자는 주운환을 끌어들이기 위해 주묘서를 높은 지위에 앉히려고 할 것이다. 태자비는 나이가 꽤 들도록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그는 주묘서가 아들이라도 낳으면 태자비를 죽이고 주묘서를 정비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사람이었다.
“네 그 시누이는 공연히 말썽을 피우는 데 일가견이 있잖아. 태자부로 들어가게 되면 태자부는…….”
제민은 그리 말하며 쯧쯧 혀를 찼고 괜히 태자가 걱정이 됐다.
하지만 제민은 주묘서를 얕봐도 한참 얕봤다. 태자부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녀는 공연히 말썽을 피우는 자신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미리 보여 주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약속대로 태자는 주묘서와 함께 호수를 유람했다.
태자는 외모를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태자비는 아주 평범하게 생긴 데다 늘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재미도 없어 태자는 그녀를 몹시 혐오스러워했다.
그에 반해 주묘서는 미인이었다. 물론 엽연채의 아름다움에는 못 미치고 심지어 백여언에게도 못 미치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나름대로 자태가 볼만하고 또 태도가 퍽 애교스럽기도 했다.
주묘서와 함께 시간을 보내 보니 태자는 그녀가 조금 가식적이기는 하나 모든 면에서 자신과 마음이 잘 맞는다고 느꼈고, 그에 정말로 순식간에 주묘서와 뜨거운 애정을 나누게 되었다.
호수 유람을 마치고 미시未時(오후 1시~3시)쯤에 태자가 주묘서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묘서가 한창 득의양양해하고 있을 때였다. 사람은 우쭐해지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며 잘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하고 싶은 법이었다.
그래서 태자가 돌아간 뒤 주묘서는 다시 거리로 나가 돌아다니려고 했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 한두 명을 만나고 그들이 저를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주 흡족한 기분이 들 테니 말이다.
주묘서는 예쁘게 치장을 한 상태였다. 그녀는 오밀조밀한 복숭아꽃 문양이 들어간 붉은색 배자를 입고, 원보계 머리에 녹주석과 비취로 장식된 머리꽂이를 꽂고 있었다. 득의만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묘서에게선 그녀만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어 전보다 더욱 귀엽고 아리따워 보였다.
주묘서가 후문을 통해 골목에 나오는데, 야위고 낯빛이 창백한 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앗!”
주묘서는 그 사람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이 소년은 준수한 외모를 갖고 있지만 파리하고 수척했다. 다름 아닌 서 공자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깜짝 놀란 춘산은 얼른 앞으로 달려가 주묘서와 서 공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소저…….”
괴로워 보이는 서 공자의 얼굴에는 분노도 담겨 있었다.
“소저… 태자 전하를 연모하는 겁니까? 그때 우리는 이미 정혼했던 사이입니다……. 그런데 태자 전하와 사통했던 겁니까?
이전에는 소저의 어머니가 우리 집을 찾아와 파혼하겠다며 소란을 피웠는데… 이 또한 소저의 뜻이었어요? 소저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난 소저에게 온 마음을 다 바쳤는데… 소저는…….”
서 공자는 정말로 주묘서를 좋아했다.
그는 첫눈에 주묘서에게 반했고 그 후 예비부부가 되어 그녀와 몇 번 만나면서 그녀가 귀엽고 아리따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서 공자는 처음으로 여인과 이렇게 친밀하게 지낸 터라 마음속이 온통 주묘서로 가득했고, 그에게 여인은 오로지 그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묘서는 사실 가난한 자를 싫어하고 부유한 자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회가 오자마자 자신을 버리고 높은 지위에 있는 태자에게 갔다. 이럴 줄 어디 생각이나 했겠는가?
주묘서는 괴로운 표정의 그를 보더니 순간 뜨끔했고 또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서 공자가 자신을 사모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주묘서는 이제 태자에게 시집가게 됐으니 별 볼 일 없는 서씨 가문 서 공자를 몹시 하찮게 생각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계속 자신을 사모하도록 하고 싶었다.
이 사내가 필요 없어도 한결같이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다. 설령 나중에 그가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고 해도 그 여인이 그의 마음속 자신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