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69화 (469/858)

제469화

그 시각 봉의궁.

정 황후는 응접실에서 장부를 보고 있었는데 밖에서 태자의 방문을 알려 왔다. 정 황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보니 태자는 이미 그녀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어마마마.”

“바라던 일이 이뤄졌구나!”

정 황후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태자를 쳐다보며 입꼬리에 미소를 걸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네. 그 피투성이 사내가 난동을 피우지 않았다면 태자가 이렇게 빨리 주씨 가문의 힘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러자 태자는 득의양양하게 ‘흠’ 콧소리를 냈다. 자신이 대리시에 갇혀 있던 며칠 동안, 정 황후가 사람을 보내 분명 별일 없을 것이니 불안해하지 말라는 쪽지를 전달했는데 과연 그렇게 일이 잘 풀렸다.

“폐하께서 진정 우리에게 잘해 주시는구나.”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황금색 비단 장부를 접더니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였다.

“형부와 예부, 호부, 이렇게 육부의 절반이 우리 손에 있고 대리시경 장찬도 우리 사람이네. 분별없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태자 편을 들고 있지. 재상, 금위군 대장, 도성을 수비하는 병영의 책임자도 모두 폐하의 측근이야. 이제 하늘에서 내린 장군감인 주운환도 태자의 사람이 됐으니, 대제의 영토를 지키는 건 바로 태자라네.”

이 말에 태자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 주묘서는…….”

정 황후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를 떠올려 봤지만 별다른 인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지난번 주운환의 환영회 때 멀리서 봤는데 얼굴이 아주 예쁘다는 것만 기억났다.

“어찌 됐든 태자비 쪽도 간교한 계책을 꾸밀 수 없고 태자부의 다른 여인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었네. 앞으로 우린 헛발질하지 않고 조용히만 있으면 되네. 그렇게 침착하게 차근차근 나아간다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걸세.”

“예!”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 간에 좀 더 이야기를 나눈 후 태자는 그곳을 떠났다.

* * *

그 시각 양왕부.

커다란 서재 안은 음침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햇살이 들이비쳐도 서재 안의 음울한 분위기는 도저히 걷어 낼 수가 없었다.

양왕은 창문 아래에 놓인 매화 문양과 붉은 문양이 들어간 기다란 탑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의 고혹적인 얼굴에는 우울한 기색이 한가득했다.

“오늘 주씨 가문이 혼인 교서를 받았습니다.”

언서가 담담하게 고했다.

“하.”

양왕은 비웃음을 짓더니 붉은 입술을 올리며 더욱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매력적인 두 눈동자는 어둡고 흐릿해졌다.

“태자를 참으로 애지중지하는구나!”

그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일어나자 증오심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늙은 황제는 간사하기가 능구렁이 같았고 주변에도 인재들이 계속 배출되고 있었다.

양왕은 원래부터 필적 감정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이 늙은 황제가 그 일을 잘도 은폐했다.

양왕은 이 일로 그들을 타도할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을 타도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을 쓰는 것이었다. 지금 이 모든 것들은 앞으로 군대를 일으키기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했다.

필적 감정에서 태자가 모함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나중에 군대를 일으킬 때 피해자인 주운환이 자신의 편에 서서 태자가 가해자라고 밝힌다면 정벌에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태자는 그런 짓을 벌였으면서 대담하게 측비를 태자부로 들이려 한단 말인가?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 제위에 오르겠다는 말인가?

양왕은 이런 생각을 하며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어두운 빛이 스쳤다.

* * *

황제가 주묘서와 태자의 혼사를 맺어 준 일은 금세 전해져 온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다. 귀족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도 모두 깜짝 놀라 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들어 보니 어제 아침에 필적 감정을 할 때 서생들이 궁 밖에 앉아서 청원할 준비를 하고 있었대. 그런데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주씨 가문 첫째 소저가 그쪽으로 뛰어가 당당하게 그 서생들을 꾸짖으며 태자를 두둔했다고 하더라.”

“아… 그 주씨 가문 첫째 소저가… 태자를 좋아하는 거 아냐? 그러지 않고서야 어느 여인이 그리 뻔뻔하게 사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태자를 두둔했겠어. 그러다 결국 혼사가 맺어졌네.”

“내 말 좀 들어 보게…….”

그때, 오십 대로 보이는 한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내 친척 한 명이 주씨 가문 하인인데, 그 피범벅이 된 사내가 난입했던 날, 그러니까 주씨 가문에서 축하연을 베푼 날에 주씨 가문 첫째 소저와 태자가 물가의 정자에서 밀회를 가지는 걸 봤다고 하네.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고 하더군.”

“아? 그랬던 거군요! 그 두 사람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던 걸 보니 천생연분이네요.”

이십 대로 보이는 한 어린 부인이 어리둥절해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감은 무슨!”

그런데 이때, 한 사람이 침을 뱉으며 반박했다.

“주씨 가문 쪽은 그전에 이미 정혼하지 않았나?”

“어……?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네요!”

“맞아요! 이미 정혼했었어요!”

누군가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원래는 탐화와 소란이 있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탐화가 과거 시험에 붙기 전이라 그 소저가 탐화를 업신여겼었죠. 그런데 탐화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자 또 기어이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다고 했었고요.

결국 그 탐화가 진서후 부인의 고모를 아내로 맞이하자 두 모녀는 진서후는 팔이 바깥으로 굽는다고 울며불며 난리를 쳤죠. 그런데 알고 보니 사실은 본인이 생트집을 부린 거였고요.”

“누가 아니래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더니 나지막이 웃었다.

“진서후가 전쟁에 나가 남쪽 오랑캐의 영토로 들어가자 그 소저는 진서후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얼른 국자제주인 서씨 가문과 혼사를 맺었어요. 그런데 결국 진서후가 돌아오자… 뜻밖에도… 음… 바로 그렇게 된 거죠!”

서씨 가문을 뻥 차 버리고 태자를 낚아 측비가 됐다는 의미였다. 가난한 집안의 정실은 될 수 없고 귀한 집안의 첩실은 기꺼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주묘서다웠다.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참 가벼웠다.

백성들도 바보는 아니기에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상류 사회 귀족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더욱더 주묘서를 업신여기게 됐다. 주묘서와 진씨가 벌인 그 구질구질한 일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소문은 빨리도 퍼져 이튿날 주씨 가문과 태자부 그리고 궁 안으로 전해졌다.

정선제는 정 황후와 화원에서 차를 맛보고 있었는데 소문을 듣게 되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콧방귀를 뀌더니 노골적으로 언짢아했다.

“이 간악한 것들! 이건 황제의 뜻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 황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청귤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올려 정선제 앞에 내밀었다.

“금세 사라질 것입니다. 어쨌든 황제 폐하는 황제 폐하이십니다.”

“그렇지.”

기분이 좀 나아진 정선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정선제와 정 황후 등은 이런 소문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자신들이 입을 열지 않아도 서씨 가문 사람들이 나서서 해명할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묘서와 태자의 혼사가 정해진 후로 서씨 가문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서 대인과 서 부인은 원래 주묘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당시 주씨 가문은 몰락할 상황이었고 게다가 주묘서는 평판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아들이 기어코 주묘서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고집을 부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서 공자는 집안의 독자이고 서 대인과 서 부인이 서른이 되어서야 얻은 늦둥이였다. 그러니 당연히 금지옥엽으로 키웠고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아들이 주묘서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떼를 쓰니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의 뜻에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씨 가문의 처지가 뒤집히게 되자 진씨는 득달같이 달려와 파혼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비열하고 역겨운 인간이었다.

진씨와 주묘서는 대체 서씨 가문을 뭘로 보고 그리 행동하는 것인가. 시집온다고 하면 오는 거고 안 온다고 하면 안 와도 된다는 말인가?

서씨 부부는 진씨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고 서 공자도 주묘서에게 푹 빠져 있어 혼사를 무르지 않고 계속 진행했다. 그런데 황제가 주묘서와 태자의 혼사를 맺어 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빌어먹을 것!”

응접실에 있던 서 부인이 손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분명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먼저 태자를 유혹했을 겁니다! 지금 황제 폐하와 태자를 이용해 우리를 떼어 내려는 거죠.”

“됐소! 지금 그걸 말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소?”

옅은 한숨을 내쉬는 서 대인은 낯빛이 창백했다.

“어쨌든 이건 폐하의 뜻이니 어서 해명합시다!”

지금 서씨 가문은 안 좋은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억울해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서 공자는 얼빠진 표정으로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시들시들한 모습이었다.

“현아… 에휴. 더 좋은 처자를 찾을 수 있을 게다.”

서 부인은 고개를 돌려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들을 위로했다. 하지만 서 공자는 아무 말 없이 눈시울을 붉히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서 부인은 얼른 첩자를 써서 주씨 가문으로 보냈다. 지금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주씨 가문과 상의하기 위함이었다.

* * *

그 시각, 일상원.

소청의 탁자 위에는 벽라춘碧螺春 한 주전자와 부용고芙蓉糕 한 접시, 당증매화병糖蒸梅花餠 한 접시 등 서너 개의 간식거리가 차려져 있었다.

주묘서는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음. 이 벽라춘은 정말 그윽하면서도 상쾌한 향기가 나네요. 이렇게 좋은 차는 오랜만에 마셔 봐요.”

“정말 그렇구나!”

진씨는 매화병 하나를 집어 들더니 다소곳이 한 입 베어 물었다.

사실 차는 평소에도 마시던 차였다. 하지만 주묘서가 곧 태자부로 시집을 가니 모녀는 처지가 확 뒤바뀌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더없이 상쾌하고 후련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이런 행복과 기쁨을 느낀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엽연채가 집안으로 들어온 후, 둘은 주씨 집안 전체가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생각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괴롭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이제 주묘서의 앞날이 활짝 피게 된 것이다. 진씨는 집안에 드리워졌던 캄캄한 어둠과 짙은 안개가 흩어지고 평탄한 미래가 펼쳐지며 따스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기분이 들었다.

“마님.”

이때, 녹지가 첩자를 손에 들고 그들에게 달려왔다.

“서씨 가문 부인께서 마님께 첩자를 보내셨습니다. 혼사 문제를… 어찌 해결하면 좋을지 상의하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진씨는 ‘픽’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뭘 어찌 해결한다는 말이냐? 위쪽에서 이미 교서를 내리셨다! 그 별 볼 일 없는 집구석은 뭘 더 어쩌고 싶다는 것이냐? 쯧쯧. 신경 쓰지 말거라!”

“예!”

녹지는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하고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그건 황제의 뜻이었다. 서씨 가문이 도성에 머무를 생각이 없지 않은 한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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