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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468화 (468/858)

제468화

진씨와 주묘서는 엽연채가 말끝마다 첩실 운운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진씨가 굳은 표정으로 성을 냈다.

“이, 너처럼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첩실이라니!”

“어머.”

엽연채는 깜짝 놀라는 척했다.

“설마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측비가 첩실이 아니면 그럼… 태자비 마마는 뭔데요? 방금 전에 교서에서 아가씨는 태자 측비가 된다고 했어요. 정비는 아니었죠. 교서의 내용을 거역하려는 거예요?”

“이!”

주묘서는 화가 나 눈물을 쏟으려고 했다.

“아이고. 됐다! 왜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주 백야는 얼른 주묘서 쪽으로 걸어가 엽연채에게 다가가 삿대질을 하려는 그녀를 잡아끌었다. 주묘서는 이를 악물더니 비웃음을 짓고는 멸시하는 눈빛으로 엽연채를 노려보았다.

“날 질투하는 거겠죠. 난 태자 측비가 됐으니까요! 정비는 아니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고귀한 존재이니까요! 정3품 장찬의 손녀 장만만과 그 후부의 적녀를 봐요. 서로 측비가 되겠다고 안달이었지만, 결국 태자 전하는 그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말을 마친 주묘서는 콧방귀를 뀌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진씨도 엽연채와 주운환을 싸늘한 눈빛으로 흘기고는 주묘서 등과 함께 일상원으로 돌아갔다.

백 이낭은 얼른 주묘화를 끌고 일상원으로 달려가 그곳에 자리했다.

그런데 그들이 일상원에 앉아 있는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밖에 있던 여종이 이렇게 외쳤다.

“셋째 나리와 셋째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진씨와 주묘서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보니 연청색 도포를 입은 주운환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온몸에서 맑고 깨끗한 기운을 드러내며 화사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세속을 초월한 듯한 느낌도 전해졌다. 그 곁, 수려한 외모의 엽연채는 단정한 아름다움을 물씬 풍겼다.

“이낭과 묘화는 먼저 나가 있거라.”

주운환이 갑자기 백 이낭과 주묘화를 쓱 보며 말했다.

백 이낭과 주묘화는 어리둥절해하며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날카롭고 어두운 그의 눈빛을 보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백 이낭은 얼른 미소를 지으며 주묘화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엔 주 백야와 진씨, 주묘서와 주운환, 엽연채 다섯 사람만 남아 있었다. 밖을 지키고 서는 여종들마저 주운환이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기 때문이었다.

“셋째야, 이게 뭐 하는 것이냐?”

주 백야는 어리둥절했다.

“중요한 말씀을 좀 드리려고요.”

주운환의 날 선 눈빛이 주묘서와 진씨에게 향했다.

“흥. 방금 전에 안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또 왔네요.”

주묘서는 코웃음을 치며 속으로 아주 의기양양해했다. 그런데 엽연채는 차분한 목소리로 동문서답했다.

“아가씨, 정말로 태자부에 시집가고 싶은 거예요? 지금이라도 마음이 변했으면 황제 폐하께 절대로 아가씨를 태자부에 시집보낼 수 없다고 청을 드릴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네 시누이가 시집가는 걸 원치 않는다는 말이냐?”

진씨는 너무도 화가 나 손에 들고 있는 찻잔을 집어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힐난을 퍼부었다.

“그렇게도 네 시누이가 잘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냐?”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기어이 시집을 가겠다는 거군요. 그럼 저희가 강요한 게 아니고 황제 폐하께서도 강요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가씨는 이미 태자 전하를 유혹했고 스스로 태자 전하께 매달렸으니까요.”

그 말에 진씨와 주묘서는 화가 나 몸이 옆으로 휙 기울어졌다.

‘어떻게 안 거지……?’

“무,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매달렸다니!”

진씨는 화를 내며 잡아뗐다.

“폐하께서 총명하고 용모도 아름다운 묘서가 마음에 들어 태자 전하와 혼사를 맺어 주신 게다!”

주묘서가 먼저 태자를 유혹한 게 되면 태자부에 들어간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녀를 좀 깔보게 될 테니, 이 일은 절대로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엽연채는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하신 말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저희는 말렸지만 어머님과 아가씨가 매달리신 거예요. 아버님도 똑똑히 들으신 거예요.”

“에휴…….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주 백야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 주운환과 진씨 모녀가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주운환이 주묘서가 좋은 곳에 시집가는 걸 원치 않는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좀 언짢아졌지만 주 백야는 주운환을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셋째야, 묘서는 네 누이동생이다! 묘서가 태자부에 들어가면 너에게도 좋은 일이다! 앞으로 남매끼리 서로 도와야지!”

주 백야는 폐인이 된 지 오래됐지만 그래도 벼슬살이에 대해선 아는 바가 있었다. 인간관계는 정말로 중요했다.

“네, 그리하죠.”

주운환은 짧게 대꾸하고는 휙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는 주운환과 함께 일상원을 나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혜연이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가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마님, 방금 전에 마님과 큰아가씨에게 경고하신 말을 그쪽에서 폭로하지는 않을까 걱정 안 되세요? 일이 그렇게 됐다간 태자 전하와 황제 폐하께서 태자 전하에 대한 두 분의 충성심을 의심하실지도 몰라요. 어쨌든… 방금 전 그 경고는 이 혼사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신 거잖아요.”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혜연을 이렇게 다독였다.

“불안해할 것 없어. 방금 전 그 경고는 아녀자가 한 말에 불과해. 정말로 밖으로 전해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저 두 여인이 서열 싸움을 했다고 생각할 거란다.”

혜연은 이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지금 우리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감히 알릴 수 없을걸. 그러니 밖에다 이 이야기를 전하지도 않을 거야.”

엽연채가 자신만만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 * *

그 시각 태자부.

정화원의 태자비는 매화 절지折枝 문양이 들어간 자단목紫檀木 탑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고 팔꿈치를 탁자 위에 댄 채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본래도 엄숙한 얼굴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는데, 버들잎 모양의 고운 눈썹을 찡그리자 미간 부분이 꽈배기처럼 비비 꼬여 들었다.

아래에 자리한 금슬과 시녀들은 모두 창백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금슬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마… 점심 식사가 이미 준비…….”

‘와당탕’ 큰 소리에 금슬의 말이 끊겨 버렸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다기茶器가 태자비의 손에 확 쓸려 바닥 위로 떨어진 것이었다.

금슬과 검은색 옷을 입은 시녀들은 깜짝 놀라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태자비가 음산한 목소리로 묻자 금슬은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전하께서는 입궁하셨습니다…….”

“입궁? 입궁은 왜? 은혜를 입었으니 감사 인사라도 하러 가셨단 말이냐?”

태자비는 그리 말하며 또 손에 든 찻잔을 집어 던졌다. 찻잔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금슬의 발치에서 깨졌다.

“그 빌어먹을 계집이 뭐라고!”

태자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풍씨 가문이 기울고 숙적도 죽게 되자 태자비는 오랫동안 정수리 위에 매달려 있던 칼 한 자루가 마침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주운환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고, 여기에 이제 태자도 감히 엽연채를 건드릴 수 없게 됐으니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갑자기 따사로운 봄빛이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풍씨 가문이 몰락한 후, 태자는 전보다 그녀에게 훨씬 잘해 줬고 잇달아 몇 번이나 그녀의 처소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자비는 지금까지 아이를 갖지 못했다.

‘가까스로 풍 측비를 물리쳤더니 주묘서가 나타날 줄이야!’

태자비는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주씨 가문은 풍씨 가문보다 훨씬 더 대단한 가문이 아닌가. 풍씨 가문은 간신히 응성을 지키는 게 고작으로, 서노가 틈을 봐서 공격해 오면 풍씨 가문은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주씨 가문은 달랐다. 그 주운환이라는 자는 진정한 장군감이었다. 게다가 황제에게 받는 총애 또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가까스로 사나운 들개를 쫓아냈더니 맹호가 찾아온 격이었다.

태자비는 정말이지 분해도 너무 분했다. 그녀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됐고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꾹 참느라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그 주묘서라니!”

태자비는 벌떡 일어나다가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더니 하좌의 오른쪽 자리를 가리켰다.

“작년에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행동하며 저기서 조심스럽게 꽃이나 닦던 것이……! 나한테 쫓겨나기까지 했던 미천한 것이 아니냐!

태자 전하께서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던 뻔뻔한 것이 이제 태자부로 들어와 총애를 받는 측비가 된다니! 그 미천한 것이! 그 계집애가 뭔데! 대체 뭐라고! 아…….”

태자비는 몸이 기우뚱하더니 탑상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금슬 등은 그녀가 가슴 아프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슬프고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 역시 두 눈을 붉히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 * *

정화원의 슬프고 처량한 분위기와는 달리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하는 태자는 만면에 희색을 띠고 있었다.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졸고 있는데 때마침 베개가 나타나듯 바라시던 일이 이뤄졌습니다!”

이계가 미소를 지으며 경하의 말을 건넸다.

태자는 피식 웃음을 흘렸고, 품위 있는 그의 얼굴에도 득의양양한 기색이 비쳤다.

주묘서를 꾀어내기는 했지만, 이후 어떻게 그녀를 태자부로 들여야 정선제의 마음에 불만이 생기지 않을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선제가 이렇듯 알아서 자신과 주묘서의 혼사를 맺어 줄 줄은 몰랐다.

태자의 마차는 한참을 더 가서야 궁문으로 들어섰다.

정선제는 상석에서 상주서를 읽으며 지시를 내리거나 수정을 하고 있었는데 밖에 있던 어린 환관이 고해 왔다.

“황제 폐하,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안으로 들이거라.”

정선제는 차분한 목소리로 허했다.

잠시 후, 태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사의를 표했다.

“아바마마께서 맺어 주신 혼사에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정선제는 감격스러운 태자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옅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앞으로 진서후와 잘 지내도록 하거라.”

“예, 아바마마.”

태자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정선제는 태자와 정무에 대해 논의한 후 그를 내보냈고 상서방을 나온 태자는 곧장 봉의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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