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6화
이번 일을 통해 정선제는 태자와 주운환을 더욱 꽁꽁 묶어 놓고 싶어졌다. 그는 태자를 이야기하는 주묘서의 들뜬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옅은 미소를 짓더니 상을 내렸다.
“정말 좋은 아이로구나. 채결아, 이 아이에게 여의 한 쌍을 하사하겠다.”
“예, 폐하.”
채결은 대답을 하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주묘서는 정선제가 자신에게 하사품을 내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얼른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 인사를 올렸다.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그래. 이만 물러가 보거라!”
정선제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주묘서는 재차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린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선제는 그제야 주운환을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이동생이 아주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구나.”
정선제는 그리 말하며 주운환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봤고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소신의 누이동생이… 평소 조금 당돌하게 행동하기는 하나… 어쨌든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난 아이옵니다.”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운환과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그를 돌려보냈다.
주운환이 밖으로 나가자 정선제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하명했다.
“그 불효자를 불러오너라!”
채결은 일순 몸을 떨더니 얼른 허리를 굽히고 그리하겠다고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잠시 후 태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낯빛이 창백했고 정선제를 보자마자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아바마마… 소자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선제는 한쪽에 놓인 백자와 옥침을 집어 들어 냅다 던져 버렸다. 그러자 큰 소리와 함께 옥침은 태자 옆에서 깨져 버렸고, 백자의 조각이 태자의 얼굴에 튀면서 잘생긴 얼굴에 작은 핏자국이 생겼다.
그러나 태자는 아파서 ‘흡’ 소리를 냈을 뿐, 엎드린 채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 고얀 것……!”
정선제는 또다시 호통을 쳤다. 아래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태자를 보고 있으려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주운환이 남쪽 이민족의 영토로 들어갔을 때 도성에선 응성을 탈환하고 서노군을 몰아낸 공로가 풍씨 가문의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 하지만 백성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결국 이 일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연히 정선제는 이것이 태자가 꾸민 얄팍한 수임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때는 자신도 태자의 이런 행동을 묵인했었는데 이는 특정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정말로 주운환이 남쪽 이민족의 영토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자신 역시 공로를 풍씨 가문으로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주운환이 살아서 나왔으니 풍씨 가문이 공로를 가로채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태자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짓을 벌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풍씨 가문 형제에게 매복해 있다가 주운환을 공격하라고 했다니.
정선제는 정말이지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태자가 무너지면 양왕이 뜻을 이루게 된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태자와 황후는 자신이 인정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들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들보다 못할 수가 있단 말이냐!’
어쨌든 태자는 자신이 인정한 후계자로 자신은 태자를 많이 아꼈다. 태자는 부드럽고 너그러우며 효심이 깊었고 또 정 황후는 온화하고 교양이 있으며 사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태자의 허물을 덮어 줄 수밖에 없었다.
주운환이 밀서를 건넸을 때 정선제는 이 밀서를 탁자의 암격暗格(물건을 숨겨 두는 숨겨진 공간)을 통해 탁자 밑으로 던졌고 탁자 밑에는 그의 심복인 어린 환관 동언이 숨어 있었다.
모사模寫에 있어서 따라올 자가 없는 이 어린 환관은 곧장 태자부 특유의 편지지를 꺼내더니 밀서를 모사한 다음 정선제에게 건넸다.
고로 주운환의 손에 돌아갔을 때 밀서는 이미 바꿔치기 된 후였다.
임 국공은 감히 자신에게 엇설 수 없고 낙 환관도 자신의 사람이긴 하지만, 요공 대사는 정말로 공정한 사람이므로 거짓을 꾸미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되면 의견이 엇갈리게 되고, 피범벅이 된 사내의 고발 사건을 풍 측비에게 떠넘긴다고 해도 찝찝함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아바마마… 소자가 한순간의 치기로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는 풍 측비 그 미천한 것이 소자를 부추겼기 때문입니다.”
태자는 눈물을 흘리며 변명했다. 그는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책임의 반은 풍 측비에게 전가하려고 했다.
“풍 측비가 날마다 소자에게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풍씨 가문이 몰락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사옵니다…….”
“됐으니 그 입 다물거라!”
정선제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에 태자는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더니 숨소리조차 죽였다.
정선제는 후회하는 태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속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러나 가슴속의 노기를 조금 가라앉히고는 간곡하게 타일렀다.
“그런 느낌은… 짐도 알고 있다. 진서후가 너무 특출난 사람이라 누르기가 쉽지 않겠지. 하지만 그자는 순수한 마음을 지녔으니 잘만 쓰면 큰 충신이 될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간 우리 대제의 영토는 그자에게 달려 있다!”
“예!”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소자가 잘못했사옵니다. 그 일을 저지른 후… 소자도 후회막급이었습니다. 그래도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되어 다행이옵니다! 모두 아바마마께서 소자를 아껴 주신 덕분이옵니다. 소자 앞으로는 진서후와 잘 지내겠사옵니다! 또 아바마마께도 곱절로 효도하겠사옵니다!”
그 말에 정선제는 평소 태자가 자신에게 보였던 효심과 겸손하게 스스로를 낮추며 자신을 사모해 온 정 황후가 떠올랐다. 정선제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나가 보거라! 돌아가서 『제술帝術』을 백 번 필사하거라!”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태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자 『제술』뿐만 아니라 아바마마의 복을 기원하며 『지장경』도 필사하겠사옵니다.”
정선제는 옅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태자는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상서방을 나온 태자가 고개를 들어 보니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피범벅으로 난동을 부렸던 사내의 사건이 종결되자 요 며칠간의 답답함과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고 우울했던 마음도 깨끗이 날아갔다.
태자가 떠나자 채결은 참지 못하고 정선제에게 물었다.
“황제 폐하, 정말로 주씨 가문 대소저를 태자 전하의 측비로 들이시려는 겁니까?”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추켜세우며 대꾸했다.
“그렇다.”
“하지만 진서후는 서출이고 주씨 가문 첫째 소저는 적출입니다. 들어 보니 진서후는 적모와 누이동생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옵니다.”
하지만 정선제는 이에 개의치 않았고 손에 든 상주서를 천천히 펼치며 대답했다.
“그럼 뭐 어떻느냐? 그건 여인들과의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진서후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니 주묘서도 태자부로 시집을 오면 진서후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진서후도 태자 측비인 누이동생이 생기면 자신의 입지가 더욱 견고해질 테고.”
이런 소소한 문제는 정선제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두 사람이 하나로 뭉치고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기만 하면 적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맞습니다. 과연 폐하는 현명하십니다!”
채결은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정선제는 권모술수에 능한 제왕의 눈빛으로 이 혼사를 바라봤다. 그는 주묘서의 행동이 천성적으로 남들과는 다르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채결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주묘서는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는 듯하옵니다.”
“흥, 정혼한 사람?”
정선제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채결도 미소를 지으며 정혼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떤 정혼이든 간에 황제의 뜻 앞에서는 물려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서씨 가문 사람이 조정에서 굴러먹을 생각이 없지 않는 한 말이다.
정선제는 종이를 꺼내 쓱쓱 소리를 내며 직접 혼인 교서를 적었다.
* * *
요 며칠간 떠들썩했던 피범벅이 된 사내 사건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여러 검증을 통해 태자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며 태자 측비인 풍씨의 소행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태자도 관리가 소홀했던 부분이 있었던 셈이지만 다행히도 진서후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풍 측비는 결국 즉결 참수형에 처해졌고, 태자는 일 년 감봉 처분을 받았다.
풍씨 가문 사람들은 사정을 모르고 있었지만 이 일에 연루되어 재산을 몰수당했고, 자손 대대로 벼슬살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날 태자가 직접 사람들을 데려와 풍씨 가문 재산을 몰수했고, 몇몇 상전들을 제외한 모든 하인과 출산하지 않은 첩실마저 전부 관가官家에 의해 팔리게 되었다. 풍씨 가문 스무 명가량의 상전들은 입고 있던 좋은 의복마저 전부 싹 벗겨졌고 다들 무명옷을 입고 문을 나섰다.
장식용 못이 박혀 있는 붉은 칠을 한 풍씨 가문 대저택의 대문은 화려함을 뒤로하고 천천히 닫혔다.
풍씨 가문 노부인이 고개를 들어 보니 발이 걷힌 화려하고 귀한 관교를 타고 있는 태자의 모습이 보였다. 온몸에서 고귀함을 풍기는 그는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에 풍씨 가문에 자주 들러 보이던 상냥하고 부드러운 모습이 어디 지금까지 남아 있으랴.
풍씨 가문 사람들은 오싹함과 함께 한없이 슬프고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더니 결국 넋이 나가고 말았다.
주위에 있던 백성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구경 중이었다. 백성들은 풍씨 가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쉴 새 없이 그들을 욕했다. 응성을 지키지 못했고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죽게 만들었으며 응성 사람들이 도륙되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또 가문이 얼마나 뻔뻔하면 그런 악독한 딸을 낳았겠냐는 말도 했다.
풍씨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여인이었고, 사내가 몇 명 있기는 하나 일고여덟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들이었다. 가문의 장성한 사내들은 다 응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모진 욕설에 풍씨 가문 노부인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족들을 데리고 천천히 도성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지금 그들은 너무도 가난하여 마차를 탈 돈조차 없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척들도 다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진작에 그들과 왕래를 끊었다.
추풍秋風은 쓸쓸했고 명성이 자자하던 장수 가문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풍씨 일가가 성문 밖으로 나가 보니 황량한 들판이 펼쳐졌고 추풍만이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그런데 이때, 앞쪽을 보니 오륙십 대로 보이는 회색 옷을 입은 마마 한 명이 길 정중앙에 서 있었다. 풍씨 가문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회색 옷의 마마는 손을 내밀더니 풍씨 가문 노부인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풍씨 가문 노부인과 뒤에 있던 가족들은 깜짝 놀랐고 사방을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 멈춰서 있는 마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 덮개가 달린 아주 간소한 작은 마차였지만, 마차 위에 주씨 가문의 표식이 붙어 있었다.
“노부인.”
그리고 그 마마는 여전히 돈주머니를 내밀고 있었다.
풍씨 가문 노부인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으나 얼른 돈주머니를 건네받은 후 멀리 있는 그 마차를 향해 예를 올렸다. 그녀는 고맙다고 답례한 다음 조용히 풍씨 가문 식솔들을 이끌고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