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5화
그 시각 동난각.
주운환은 안으로 걸어 들어가 정선제가 누워 있는 침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소신이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정선제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주운환을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일어나 자리에 앉거라!”
“황송하옵나이다, 폐하.”
주운환은 몸을 일으키더니 침상 근처에 있는 아치형 다리가 달린 둥근 배나무 의자에 앉았다.
“이 일은… 정말로 오해였다.”
정선제는 천천히 이 말을 꺼내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자 주운환은 얼른 그를 부축해 침상에 기대어 앉힌 다음 노란색 등받이 베개를 그의 허리에 받쳐 주었다.
“네가 놀랐겠구나.”
“황공하옵나이다.”
주운환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선제는 공손한 그의 태도를 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태자가 가끔 혈기가 넘치긴 하지만, 인재를 중히 여길 줄 아는 아이다. 앞으로 네가 많이 도와주거라.”
“명 받잡겠사옵나이다.”
“에휴…….”
정선제는 손을 가로젓더니 미소를 지으며 당부했다.
“태자가 군君이고 네가 신臣이지만 짐은 너희 군신 관계가 친형제처럼 가깝기를 바란다.”
정선제는 주운환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그가 운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분명 운하가 환생한 것이다! 재능도 뛰어나고 날 이리도 존경하는 걸 보니 틀림없다.’
정선제는 이 가능성만 떠올리면 마음속의 죄책감이 서서히 사라졌다.
운하와 양왕은 똑같이 그녀가 낳은 자식이었다. 만약 운하가 태자를 지지해 줄 수 있었다면, 남매끼리 서로 만나 웃음으로 화해했다면 자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었을 것이다.
소 황후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으니 원수였다고 해도 서로 만나서 웃으며 화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양왕은 소 황후의 이런 면을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성격이 괴팍하고 까다로우며 옹졸하기까지 했다. 반면 운하는 그리도 밝고 영리한 아이였으니 분명 웃으면서 화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선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운환을 쳐다봤다. 이 아이는 운하의 환생이니 운하를 대신해, 소 황후를 대신해 저를 용서했을 거고 앞으로 태자를 보필하며 태자와 함께 대제에 번영을 가져올 것이다.
“황제 폐하.”
이때, 채결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서생들이 밖에서 청원하던 일이 수습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한 가지 일어났사옵니다.”
그는 그리 고하며 주운환에게 잠깐 눈길을 두었다.
“흥미로운 일이라니?”
정선제도 조금 호기심이 동한 눈치였다. 채결은 밖에서 일어난 일을 바로 보고했다.
궁문 밖의 서생들은 찌는 듯한 초가을의 늦더위 때문에 조금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들은 태자가 저질렀던 뻔뻔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감정이 격양됐다.
“작년에 칭주秤州의 정산定山이 무너져 무려 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잖아. 다들 그곳이 천자의 제터라고 했었고 태자부에 천자복환령이 있는지 수색해 봤지만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지. 그리고 정산에서의 일도 거짓이라고 했어.
하지만 정산 쪽에 사는 내 친척이 말하길 정산에 정말로 천자의 제터가 세워졌다고 했어. 하지만 이건 황실 사람들 일이니 그런가 보다 했지.”
“그 후에 묘 공자 일이 일어났는데 이 일도 덮어졌지……. 정말 구역질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염문에 불과하니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며 마지못해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지금 이건… 개인의 사리사욕 때문에 공신을 살해하려고 한 것이니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야.”
서생들은 말을 하면 할수록 감정이 격양됐고 더는 결과를 기다릴 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아리따운 목소리로 분노에 찬 호통을 쳤다.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함부로 허튼소리를 떠들다니. 국법도 모르는 겁니까?”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사랑스럽게 생긴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백합 문양이 들어간 수홍색 배자를 입은 이 소녀는 부드럽고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생들은 놀라서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고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한 서생이 이렇게 말했다.
“어린 소저가 뭘 안다고 이러는 거요?”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소녀는 노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다들 태자 전하께서 주씨 가문에 못 할 짓을 했다고 하는데 내가 바로 주씨 가문 사람이에요! 난 주씨 가문의 고귀한 적장녀이고 진서후가 바로 내 오라버니인데, 아직도 내가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사람들은 그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당신들같이 덮어 놓고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나 이곳에서 제딴에는 정의롭다는 듯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어요. 우린 피해자인데도 그 누구보다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고요! 우린 태자 전하께서 억울한 누명을 썼고 누군가에게 모함당하고 있다고 믿어요. 누군가 태자부와 우리 주씨 가문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죠!”
주묘서는 날카로운 말투로 당당하게 외쳤다.
그 말에 사람들은 또 깜짝 놀랐다. 그중 누군가가 주묘서에게 그녀는 주씨 가문 적녀이고 적서嫡庶 간의 갈등으로 전부터 주운환과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지 않았느냐고 반박하려는 찰나, 궁 안에서 어린 환관 한 명이 뛰어나와 큰 목소리로 이렇게 알렸다.
“감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임 국공뿐만 아니라 요공 대사와 낙 환관 모두 태자 전하께서 쓰신 서신이 아니며 그 밀서는 태자 전하 측비의 소행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풍씨 가문의 부귀영화를 지키기 위해 그리했다고 합니다!”
“어……? 그게 무슨? 정말로 태자 전하께서 하신 일이 아니었다니!”
서생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정말로 측비가 벌인 짓이었어?”
청원할 용기는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끌려 나온 사람들이 당장 이렇게 입을 모았다.
“하긴, 이게 더 이치에 맞기는 해! 어쨌든 지금 풍씨 가문 사람들보다 더 풍씨 가문의 부귀영화를 지키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말이야!”
“거 봐요! 제 말이 맞죠? 태자 전하께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하셨겠어요!”
주묘서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마치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인 사람이며 또 유일하게 태자를 믿어 준 사람인 것만 같았다. 아주 대단한 사람 말이다.
채결의 보고를 듣던 정선제는 주묘서가 궁 밖에서 태자의 편에 서서 말을 해 줬다는 이야기에 기쁘고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운환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 주씨 가문 사람들은 다들 현명하구나. 가서 주씨 가문 대소저를 불러오너라.”
“예, 폐하.”
채결은 얼른 대답을 하고선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일각쯤 지나자 어린 환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주묘서의 모습이 보였다.
주묘서는 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몇 번 참석해 봤지만 황궁에서 지정한 화원이나 물가에 지은 정자에서 놀았던 게 다였다. 황제가 기거하는 이런 장소에 와 본 적이 없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밖에서 우쭐거리며 서생들을 꾸짖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린 환관에게 불려 궁 안으로 들어오게 되자 깜짝 놀랐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건 아닌가 하여 걸어오는 내내 낯빛이 창백했다.
주묘서가 동난각으로 들어와 보니 이곳은 우아하게 장식된 커다랗고 화려한 건물이었고 곳곳은 존귀함이 느껴지는 밝은 노란빛을 띠었다. 장지문 형태의 월공문으로 들어가자 밝은 황색 휘장이 드리워진 용 문양이 조각된 커다란 침상이 보였다.
주운환은 꼿꼿한 자세로 한쪽에 서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였다. 주묘서는 미간을 찌푸렸고 이어 침상 위에 누워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정선제였다.
전에 몇 번이나 이 지고지상한 황제를 보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아주 멀고 높은 곳에 서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주묘서는 더더욱 긴장이 됐다.
주묘서는 침상 근처로 걸어가더니 얼른 무릎을 꿇고 우물쭈물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정선제가 눈을 들어 쳐다보니 백합 문양이 들어간 수홍색 배자를 입은 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사랑스럽게 생긴 이 소녀도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정선제는 하하하 웃더니 이렇게 칭찬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뭘 먹고 사는지, 남녀 할 것 없이 빼어난 외모를 가졌구나!”
주묘서는 뜻밖에 정선제가 자신을 칭찬하자 몹시도 흥분하여 당장에 사의를 표했다.
“황제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주운환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황제가 누구라고 딱 꼬집어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칭찬한 거라고 성급하게 인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정선제는 미소를 지으며 주묘서에게 말을 붙였다.
“방금 전 밖에서 감정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어째서 태자를 옹호한 것이냐?”
주묘서가 보니 정선제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이 든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지만 위엄 있는 모습에서는 자상함이 느껴졌다. 자신이 밖에서 보였던 모든 행동이 분명 정선제의 마음에 들었다는 걸 알아챈 주묘서는 속으로 득의양양해하더니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황제 폐하, 소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태자 전하께서 억울한 누명을 쓰셨다는 걸 믿었사옵니다! 태자 전하께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셨겠습니까? 또 소녀는 황제 폐하께서는 현명하신 분이니 분명 태자 전하를 위해 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런데 그 서생들이 하는 말이 귀에 너무 거슬렸습니다. 게다가 태자 전하의 일은 당연히 황제 폐하께서 판결을 내리시는 건데, 언제부터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된 건지 모르겠사옵니다.”
그 말에 정선제는 속에 눌러 두었던 불만을 터뜨리며 이렇게 동조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말 한번 잘했다!”
밖에서 태자를 폐위하라는 백성들과 서생들의 청에 정선제는 화가 잔뜩 치밀었지만 어쨌든 성군의 모습을 보여야 하니 백성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서생들의 청원에도 화를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봄으로써 자신이 깨어 있는 군주임을 보여 줘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입을 열어 이 버릇없고 분별없는 것들을 꾸짖어 주니 정선제는 속이 아주 시원해졌고 그녀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주묘서는 정선제가 자신을 칭찬해 주자 더욱 의기양양해하며 말을 이었다.
“소녀는 그 사람들이 너무 억지를 부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몇 마디 해 준 것입니다.”
정선제는 주묘서를 쓱 훑어보더니 그녀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전부터 주운환이 태자를 보필하게 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한 사람의 충성심을 얻고 서로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