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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464화 (464/858)

제464화

임 국공의 머릿속에선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일었고, 마음이 아프고 괴로우면서도 또 기쁨이 느껴졌다. 그는 이 심정을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낯빛은 창백해져 있었다.

주운환은 임 국공이 자신을 지나치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그쪽으로 걸어가 손에 든 밀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세 분, 훑어보십시오.”

임 국공은 입을 벌렸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한쪽에 있던 요공 대사도 주운환을 힐끗 봤다. 그는 주운환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양왕을 쳐다보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가로젓더니 시선을 아래로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올해 초가을은 늦더위가 유독 심했다. 가을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것과 별개로 더위를 당해 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궁문 밖에 앉아 있는 서생들은 푹푹 찌는 늦더위를 견뎌 내느라 너무도 괴로웠다. 얼굴에선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피부는 햇빛에 그을려 화끈거리는 통증마저 느껴졌다.

근처에 위치한 요릿집들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백성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들도 궁 안에서 전해지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자 폐위를 주청해야 할지 여부는 이번 감정 결과를 보고 결정할 심산이었다.

주묘서와 진씨는 한 요릿집의 2층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어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 막돼먹은 것들! 정말 하극상이 따로 없구나.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계신 태자 전하이신데 너희들이 뭐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이냐?”

주묘서가 분개한 목소리로 욕을 해 댔다. 목소리가 작지 않아 곧바로 주위 손님들의 시선을 끌었다.

“됐다. 기다려 보자꾸나.”

진씨가 낮은 목소리로 주묘서를 진정시켰다.

주운환은 현재 도성에서 평판이 가장 좋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단한 영웅이었다. 그리고 태자의 허물은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남녀 간의 염문이 아니라 공신을 해하려 했다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황제라고 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정말로 이런 일을 해야 한다면 몰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태자는 고작 태자에 불과한데 감히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였으니 만백성에게 질타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

주묘서는 콧방귀를 뀌더니 백합 문양이 수놓인 가볍고 얇은 손수건을 한층 꽉 움켜쥐었다.

* * *

소란스러운 궁 밖과 달리 대전 안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주운환은 손에 들고 있던 밀서를 긴 탁자에 내려놓은 후 제자리로 돌아갔다.

상석의 정선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명했다.

“시작하거라!”

“예, 폐하.”

임 국공 등은 얼른 대답을 하고선 그 밀서를 들고 천천히 살펴보며 감정을 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조정 신하들은 전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임 국공 등을 뚫어지게 쳐다만 봤고, 정선제는 처진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덤덤한 눈빛으로 아래를 쓱 훑어봤다.

태자의 품위 있는 얼굴은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서신을 감정하고 있는 임 국공 등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 얼굴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양왕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려하게 잘생긴 얼굴엔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정선제는 이런 양왕을 보고 있으니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던 소 황후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앞에서 그녀는 항상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 줬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정선제의 눈길이 다시 서신을 감정하고 있는 세 사람에게 향했다.

양왕은 위로 말린 기다란 속눈썹을 살짝 아래로 드리우며 눈에 비친 싸늘한 조롱기를 감췄다.

대전 안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하며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대략 반 시진이 지나서야 임 국공 등은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어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 국공이 입을 뗐다.

“폐하, 감정 결과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사옵니다.”

그 말에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랐다. 이런 감정은 늘 의견 차이를 보이곤 하는데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할 줄이야. 그렇다면 확실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결과가 어떻느냐?”

정선제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임 국공을 쳐다봤다. 임 국공의 품위 있는 얼굴은 조금 창백했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

“황제 폐하, 감정 결과 이 서신은 태자 전하께서 쓰신 것이 아니옵니다.”

대전 안은 충격에 휩싸였고 태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맥이 풀려 바닥에 널브러질 것만 같았으나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무릎을 꿇은 채 억울한 모습을 보였다.

“아이고, 제가 분명 태자 전하는 누명을 쓰신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지신이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태자의 편에 섰다.

“태자 전하께서는 너그럽고 선량하며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현명하신 분입니다. 진서후 같은 큰 영웅을 가장 중요시하는 분인데 어찌 그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셨겠습니까?”

요양성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지신을 거들었고, 양왕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양왕은 수려한 얼굴로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하도 음침하고 냉랭해 소름이 확 끼칠 정도였다. 매혹적인 눈동자엔 사납고 맹렬한 기운이 감춰져 있었고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임 국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임 국공의 표정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선제는 고개를 숙인 채라지만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양왕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살짝 마른 입술을 저도 모르게 오므렸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리곤 더는 양왕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바마마,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아바마마께서 소자의 결백함을 밝혀 주셨사옵니다.”

태자는 바닥에 엎드려 정선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

“알겠으니 일어나거라.”

정선제의 낯빛은 조금 창백했고 두통이 살짝 느껴졌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받치더니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서… 이 소식을 밖으로 공표하거라!”

밖에 있던 어린 환관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후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황제 폐하, 어디 편찮으십니까?”

채결은 정선제의 조금 질린 낯빛, 또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그의 지병이 재차 도졌음을 눈치챘다.

“먼저 퇴청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자꾸나. 남은 일은 내일 다시 결정하도록 하겠다.”

“살펴 가시옵소서, 전하.”

조정 신하들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정선제는 채결의 부축을 받으며 대전 옆에 있는 동난각東暖閣으로 돌아가 침상에 누웠다. 채결이 몸을 굽혀 그에게 물었다.

“폐하… 양왕 전하를 모셔올까요?”

예전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황제는 항상 양왕을 불러와 그에게 선물을 건넸고 그리함으로써 태자를 두둔하면서 느낀 죄책감을 덜어 내려고 했다.

정선제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신은 양왕에게 많은 선물을 건넸지만 아들은 매번 냉담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고 그에 더더욱 괴로움을 느껴야 했다.

정선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짐이 몸이 편치 않으니 양왕을 보지 않겠다. 진서후를 불러오너라.”

“예, 폐하.”

채결은 얼른 밖으로 뛰어나가 어린 환관에게 분부를 전달했다.

* * *

정선제가 떠난 후 조정 신하들도 자리를 떴다.

양왕은 임 국공을 끌고 궁 안의 버려진 뜰로 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에 임 국공도 미간을 찌푸리며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전 전하께 약속드린 대로 행동했습니다! 진실을 말했습니다! 그건 정말로 태자 전하의 필적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자신에게 양왕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요공 대사와 낙 환관은 진실을 고할 텐데 저 혼자 거짓을 말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양왕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고 그는 정선제 쪽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매력적인 눈동자에 순간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더니 하하 냉소를 지었다.

“잘했네. 정말 끝내주는군!”

“저야말로 전하께 여쭤보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임 국공은 그리 말하며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그 진서후가…….”

양왕의 차가운 눈빛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양왕은 조롱기와 냉담함이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임 국공은 이런 그의 표정을 보더니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답은 이미 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놀랍고도 또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자는 운하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혈육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그자를 찾으셨던 겁니까? 그런데 그자를 끌어들여 함께 반역을 꾀하다니요! 성공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실패하면 죽는 겁니다!”

“그럼 나와 함께 죽으면 되지!”

양왕은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획 돌렸다. 임 국공을 쳐다보는 양왕의 눈빛은 증오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입으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조카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아니네! 내가 없었더라도 그 애는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렸을 거네. 그 아이를 내 쪽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설마 황제의 충신이 되게 하라는 말인가? 그런 다음 태자에게 넘겨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돕게 하라는 건가?”

그 말에 임 국공은 큰 충격을 받았고 모골이 다 송연해졌다.

그렇다. 어떤 일들은 애초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선택하지 않으면 그건 곧 배신하는 것이었다.

임 국공은 잠시 침묵을 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이 이야기를 본인에게 알려 주지 않으실 겁니까?”

“국공은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양왕은 ‘하’ 냉소를 짓더니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임 국공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씁쓸함과 후회, 이러한 감정에 매몰될 것만 같았다. 어쩌면 당사자인 주운환은 이 일을 조금도 알고 싶지 않을지도 몰랐다.

양왕이 그 버려진 뜰을 떠나자 언서가 그 앞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전했다.

“황제 폐하께서… 이번엔 전하를 부르시지…….”

양왕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냉소를 흘렸다.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나 보구나!”

양왕은 그리 말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칼집에서 나온 예리한 칼이 서늘한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싸늘한 기운을 온몸에 완연히 드러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면 누구든, 그 무엇이든 발기발기 찢어 버릴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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