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1화
사동은 미간을 팩 찌푸렸다. 모처럼 느끼는 평온함이 운치라곤 전혀 모르는 저 우악스러운 사람 때문에 와장창 깨져 버렸잖은가.
저 멀리 보랏빛 형체가 가을바람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보랏빛 옷은 바람에 휘날리며 휙휙 소리를 냈는데, 그 모습이 아주 기세등등해 보였다.
말을 타고 질주하는 그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사동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양왕 전하이십니다!”
마차 안의 임 국공도 낯빛이 확 변하더니 미간을 씰룩거리며 사동을 독촉했다.
“어서 가자!”
사동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 머리를 돌리려고 했다. 하나 양왕은 이미 그들에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말채찍을 든 양왕이 사동의 몸 쪽으로 채찍을 휘두르자 사동은 ‘아이고’ 하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깜짝 놀란 말이 도망을 치려고 하자 양왕은 고삐를 확 잡아당기며 말을 강제로 멈춰 세웠다.
임 국공은 놀라서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고 노기 어린 눈빛으로 양왕을 쏘아봤다.
“하. 임 국공, 오랜만이오!”
양왕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붉은 입술을 끌어당기며 의기양양하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임 국공은 어두운 낯빛으로 대꾸했다.
“전하께서 왜 절 찾아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념하시지요. 전 전하를 도와드리지 않을 겁니다! 지난번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임 국공, 무슨 말을 하는 겐가? 내 어찌 그걸 모르겠는가?”
양왕은 ‘픽’ 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날씨가 좋길래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우연케도 국공과 마주친 거네. 이참에 국공과 함께 경치나 감상하려는 것뿐이니 자, 우리 함께 인생과 이상에 대해 논해 보세!”
그는 그리 말하며 말에서 뛰어내린 후 임 국공이 탄 마차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양왕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사동은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런데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고 침묵만이 흘렀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마차 두 대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보아하니 교외로 놀러 나온 모양이었다.
자신들 일행이 이곳에 이렇게 멈춰 서 있으면 무척 이상해 보일 것이었다. 저쪽에서 마차를 멈추고 무슨 일인지 물어볼지도 모르는데, 임 국공과 양왕이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면 결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사동이 얼른 마부석으로 뛰어올라 채찍을 가볍게 내리치자 말은 천천히 오솔길을 지나갔다.
마차가 흔들거리며 교외의 오솔길을 지나가니 양옆으로는 누렇게 시든 긴 들풀이 자라나 있고 저 멀리에는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빛을 뽐내는 단풍나무가 서 있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러 사람들의 불순한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 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런 풍경과는 달리 마차 안은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로 가득했고 임 국공의 품위 있는 얼굴 역시 차갑고 싸늘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보니 매한가지로 침묵을 유지하는 양왕이 매력적인 두 눈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기다란 속눈썹은 눈가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붉은 입술은 위로 살짝 올라가 있었다.
양왕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짙은 보랏빛 망포로 붉고 노랗고 푸른 야생화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의 손에 온갖 색깔의 야생화가 들려 있었는데 뒤죽박죽 섞여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길가에 흔히 보이는 야생화로 딱히 뭐라고 말할 만큼 아름다운 꽃은 아니었다.
“국공. 연초에 내가 국공의 집을 방문하게 했던 그 여인을 아직 기억하오?”
양왕의 차분한 목소리가 무심히 울려 퍼졌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가늘고 긴 손으로는 앞자락 위에 놓인 야생화를 한 송이씩 집어 서로 엮었다.
양왕의 말에 임 국공은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냉소를 지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주씨 가문 서자 주운환의 아내이더군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대제를 구한 대단한 영웅이자 신흥 귀족이 되었더군요. 그럴듯한 인물을 배출하셨네요! 하지만 그걸로는 아직 한참 부족하죠.”
양왕은 ‘픽’ 냉소를 흘렸다.
“주운환을 본 적이 있소?”
임 국공은 콧방귀를 뀌며 반문했다.
“제가 왜 그자를 봐야 합니까?”
임씨 가문은 제왕의 스승을 배출한 명문가로, 임 국공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정선제의 스승이었다. 임 국공은 차기 황제의 스승이 될 것이니 차기 황제에게만 충성을 다하면 된다고 여겨 평소 조정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요 몇 년 동안 그는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해 왔다. 궁에서 열리는 연회나 세도가들이 왕래하는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보통 그의 아들인 임묵긍 등이 대신 얼굴을 내비쳤다. 그래서 임 국공은 젊은 나이에 응성을 탈환한 소년 후야를 본 적이 없었다.
“시간 있으면 한번 가서 보시게.”
양왕은 비웃음을 지을 뿐 고개를 들지는 않았고 시선은 여전히 아래로 향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야생화는 어느새 간소한 화환으로 변해 있었다.
“흥! 전 조금도 흥미가 없습니다.”
임국공은 냉소를 지었다.
“이……!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그는 이내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양왕이 손에 들고 있던 화환을 갑자기 제 머리 위에 올려놓을 줄은 몰라 깜짝 놀랏다.
“이런 무례한 행동이 어디 있습니까!”
임 국공은 크게 호통을 쳤고 머리 위에 올려진 화환을 손으로 휙 쳐 버리자 화환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어째서 제 머리에 이런 지저분한 걸 올리시는 겁니까.”
그러자 양왕은 냉담한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동주에 있을 때 내 누님은 머리 장신구가 없어 이런 것만 머리에 두르고 다닐 수밖에 없었지.”
그 말에 임 국공은 순간 멍해졌다. 그는 자신이 손으로 떨쳐 내는 바람에 마차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야생화 화환을 쳐다보며 살짝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아름다운 걸 좋아했던 운하 공주는 머리에 꽂는 장신구와 몸에 걸치는 옷 모두 아름답지 않고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동주에서 지낼 때는 그럴싸한 머리 장신구 하나조차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임 국공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점잖은 얼굴은 금세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때 전하가 겨우 몇 살이었는데 뭘 얼마나 기억하신다는 겁니까?”
양왕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하며 대꾸했다.
“아마 국공은 안 믿겠지만, 난 두 살 때 기억이 아직 여기에 선명히 남아 있네.”
그는 그리 말하며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최초의 기억 속 자신은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집은 너무도 초라했는데 누추한 방 세 칸이 전부였고 평소엔 그 집에서 나갈 수조차 없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론 그 곁에 있던 사람은 누님인 운하뿐이었다.
그래도 생모인 소 황후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기억 속 소 황후는 정신병에 걸려 온종일 비정상적인 행동을 했고 몇 번이나 저를 목 졸라 죽일 뻔했었다. 결국 자신이 세 살이던 해에 소 황후는 세상을 떠났고, 누님은 집 안에 구덩이를 파서 그녀를 그곳에 묻어 주었다.
소 황후를 묻은 후, 운하는 문 입구에 놓인 커다란 청석 위에 앉아 저를 무릎에 안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왜 정신을 놓았는지 아니?”
자신은 다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일 가져다주는 음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야. 어머니는 음식에 독이 들어간 걸 분명히 아시면서도 드셔야만 했어. 왜냐하면 우리 세 사람 모두의 형편이 좋아질 수는 없었거든. 어머니가 정신을 놓고 세상을 뜨셔야 우리는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제대로 클 수 있게 되는 거야.”
당시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억하는 거라곤 남매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게 하려고 어머니는 음식에 사람을 실성하게 만드는 약이 들어 있음을 똑똑히 알면서도 그 음식을 먹어야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몇 살을 더 먹고 나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됐다. 어머니에게 변고가 생긴 사실이 궁에 전해질 텐데, 자신들 남매마저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너무도 공교로워 황제가 노할 것이란 이야기였다.
두 남매가 동주에서 보내는 생활은 따분하고 단조롭기 이를 데 없었고 평소 소일거리로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집 안에 야생화들이 자라나 있어 그녀는 늘 그 야생화들을 꺾어 화환을 만들어 머리에 두르곤 했다. 그러곤 빙그레 웃는 얼굴로 저를 쳐다보며 말했다.
“쟁아. 이 화환 예쁘니?”
“네, 예뻐요.”
자신이 어설픈 칭찬을 건넬 때마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짓고는 색이 바랜 구리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며 한참 동안 화환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그분이 이 모습을 봐도… 예쁘다고 생각하겠지?”
열세 살, 한창 꾸미는 데 관심이 많고 감성이 풍부할 나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가질 수 있는 건 이런 값어치 없는 야생화뿐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꽃을 꺾거나 아니면 곡을 연주하곤 했는데, 당시 자신은 나이가 어려 그녀가 그 곡을 잘 연주한 건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듣기에 좋았고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가 연주하던 <교령십삼조>는 끊이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이었는데, 이 곡은 그녀가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고 직접 만든 곡이었다.
“이건 어머니를 위해 만든 곡이야.”
이 곡은 잇달아 열세 번이나 전조轉調가 일어나며 높은 조에서 낮은 조로 갔다가 다시 낮은 조에서 높은 조로 올라갔다. 시작부터 끝까지 아주 까다로운 곡이었다.
처음에는 격양된 감정이 느껴지다가 뒤에선 기쁨에서 슬픔으로 곡의 분위기가 바뀌며 애끓는 슬픔과 단정斷情, 고요함과 쓸쓸함을 끊임없이 토로했다. 마지막에서 조를 높일 땐 쇠락하는 분위기가 한층 더 짙게 느껴졌다.
소 황후의 슬프고 처량한 일생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곡이었다.
자신이 네 살이던 해에 부귀한 차림을 한 할멈이 자신들의 처소를 자주 들락날락했다. 그녀는 운하를 한쪽으로 끌고 가 이런 말을 했었다.
“공주 마마, 굳이 이곳에서 지내며 스스로를 망가뜨릴 필요가 있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귀양을 보낸 분은 소 미인이시고 어린 황자께도 정이 없으십니다. 하지만 공주 마마는 다르십니다. 마마는 황제 폐하의 장녀이시고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키우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폐하께서 공주 마마를 데려오고 싶어도 그리하실 수가 없습니다. 공주 마마만 데려오고 어린 황자는 이곳에 남겨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어린 황자가 안 계신다면 공주 마마는 당장이라도 궁으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낯빛이 창백한 운하의 조그만 얼굴에 순간 냉담한 미소가 어리었다.
“고 마마, 날 내버려 두게. 생각해 보니 난 공주로 태어났지만 종의 팔자를 타고난 것 같네. 궁 안에서 호의호식하기는커녕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지. 그런데 고 마마 자네는 좋은 팔자를 타고난 것 같네. 우리 어머니를 떠나더니 금세 또 정 황후 밑으로 들어갔군. 생각해 보니 고 마마 자네는 노비여도 호사를 누릴 팔자인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