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0화
대략 이각쯤 지나 채결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새파랗게 질린 그는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뗐다.
“황제 폐하……. 소인이 사람을 시켜 해명을 했지만… 서생들과 백성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인 하나를 대신 들이밀며 누굴 속여 먹으려는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이런 고얀 것들!”
정선제는 써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고 태자와 전지신, 요양성 등도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선제는 착 가라앉은 싸늘한 얼굴로 아래에 있는 주운환을 쳐다봤다.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운환을 보니 그도 풍 측비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풍 측비의 현재 처지를 생각해 보면 그녀가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니 말이다.
“황제 폐하, 이 일은 확실히 불합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평안이라는 자와 풍 측비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밀서도… 정말로 풍 측비가 필적을 모방한 것인지 알 수 없사옵니다. 그러니…….”
유 재상은 그리 말하고는 태자를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정선제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풍 측비와 태자의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긴 하지. 짐은 그리 흐리멍덩한 사람이 아니다. 양쪽이 각자 자기 의견을 주장하고 있으니 증거로 이야기하자꾸나.”
“폐하, 필적을 감정하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장찬이 말했다.
“그래.”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적을 감정하겠다는 이야기에 아래에 있던 조정 신하들은 어리둥절해하더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폐하, 누구에게 감정을 의뢰하실 것인지요?”
유 재상이 말했다.
“다들 말해 보거라. 누가 좋을 것 같으냐?”
정선제는 축 처진 눈으로 아래에 있는 조정 신하들을 쓱 훑어봤다. 그러자 신하들은 작은 목소리로 의논을 했다.
잠시 후, 상관수가 공수하며 나섰다.
“폐하, 서예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성에선 당연히 임 국공을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사옵니다. 게다가 임씨 가문은 대대로 제왕의 스승을 배출했사옵니다. 임 국공은 대제 최고의 대학자이고 서예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공정한 사람이옵니다.”
“상관수 대장의 말이 옳습니다.”
정 부윤이 동조했다.
“작년에 소신이 큰 사건 하나를 처리했는데 그때도 누군가가 필적을 모방했기에 임 국공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결국 임 국공이 필적이 모방되었음을 밝혀 냈사옵니다.”
“임 국공?”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사람이지. 임 국공 외에도 두 사람을 더 찾아보거라. 그래야 공정할 것이다.”
“폐하, 필적 구분에 있어서 낙 환관을 당해 낼 사람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이 말을 꺼낸 사람은 바로 채결이었다.
“낙 환관?”
사람들은 순간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누군가가 기억을 떠올렸다. 낙 환관은 바로 선황先皇을 모시던 우두머리 환관으로, 현재는 능성에서 노후를 보내며 도성에 들어오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되었다. 낙 환관은 골동품과 서예에 열광했던 사람이라 뛰어난 감별 능력을 갖고 있었다.
“또 한 사람…….”
병부상서 오봉이 사람을 더 추천했다.
“소신이 생각하기에 법화사의 요공 대사는 어떨까 하옵니다.”
“좋은 생각이오!”
사람들은 그 말을 듣더니 잇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요공 대사는 불법佛法에 정통하고 천문 지리에도 통달한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속세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러니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럼 이 세 사람으로 하자꾸나.”
정선제는 아주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쳤는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모두를 물렸다.
“이만 해산하거라!”
조정 신하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정선제가 떠나자 조정 신하들도 잇따라 자리를 떴고, 태자와 풍 측비는 대리시에 다시 감금되었다.
낙 환관은 능성에 있고 요공 대사는 도성 밖 법화사에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사흘 후에 다시 심문을 재개하게 되었다.
궁 밖의 서생들도 필적 감정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게다가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 공신력과 명망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온다는 말에 순식간에 모두 입을 다물고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밖에 있던 백성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고 결과를 기다리며 대리시 쪽 동향을 수소문했다.
“너희들 생각엔 태자 전하께서 누명을 쓴 것 같아?”
“그건 아직 단정하기 어려워. 어쨌든 풍 측비는 태자부에 살고 있잖아. 들어 보니 딸이 하나 있다고 하던데……. 쯧쯧, 어쩌면 죄를 뒤집어쓴 신세일지도 모르지.”
누군가가 그 말에 즉각 반박했다.
“이런 일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아무튼 며칠 있으면 결과가 나올 테니 기다려 보자고!”
* * *
그 시각 어계루.
강태공이 낚시하는 그림이 그려진 커다란 병풍 뒤로 양왕과 주운환이 앉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하, 아바마마는 참 쓸데없는 데 마음을 쓰시는구나.”
양왕은 창 밑에 놓인, 꽃문양이 조각된 기다란 녹나무 탑상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는 반짝거리는 복숭아 문양이 들어간 묵향보선墨香寶扇(고대 제후 등이 외출할 때 쓰던 부채 모양의 물건)을 돌리며 붉은 입술을 씩 올려 냉소를 지었다.
정선제는 태자를 보호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평범한 사건이었다면 풍 측비 같은 사람이 나서서 죄를 뒤집어쓰고 그런대로 말이 되기만 하면 사람들도 별다른 이견을 내지 않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크게 확대됐고, 더군다나 주운환은 현재 대제에 아주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까지 오고 만 것이다.
생각을 하던 양왕은 순간 매섭고 악랄한 눈빛을 번득였다.
풍씨 가문은 태자의 세력이니, 풍씨 가문이 이끄는 군대 안에 어떻게 이쪽의 염탐꾼이 없을 수 있겠는가? 태자가 풍씨 가문 형제에게 매복해 있다가 주운환을 공격하라고 했다는 소식은 자신도 진작 들었다. 만약 풍씨 가문 형제가 정말로 매복해 있다가 공격을 했다면 현장을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풍씨 가문 형제는 양심적인 사람들이라 태자의 뜻을 거역했다.
태자의 성격과 일 처리 방식을 미루어 볼 때 이 형제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이후 사람을 시켜 이들을 주시하게 했고, 짐작대로 풍씨 형제는 독살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풍씨 형제는 정말로 대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일이 있기 전에 두 사람은 평안에게 서신을 건넸는데, 그들은 평안에게 서신을 주운환에게 건네 태자를 고발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밀서를 태자에게 돌려보냄으로써 자신들의 충심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들은 태자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저희 풍씨 가문 형제는 죽음으로써 저희의 뜻을 밝히고자 하옵니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저희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이옵니다! 이 밀서는 속셈 있는 자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전하께 돌려드릴 것이옵니다!
그러니 태자 전하께서는 저희의 충심을 기억해 주시고, 이 점을 생각하여 풍 측비 마마에게 잘해 주시고 풍씨 가문도 잘 돌봐 주시길 바랄 뿐이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찌 이들의 뜻이 이뤄지도록 가만히 놔뒀겠는가?
게다가 태자의 성격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정말로 풍씨 형제의 뜻대로 움직였을리가 없었다. 풍씨 가문이 무너졌으니 풍 측비의 죽음은 이미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풍씨 형제가 죽은 후, 태자가 사람을 보내 평안을 추격해 죽이려는 것처럼 일을 꾸몄다. 평안은 자신을 쫓아와 죽이려는 자에게 태자에게 밀서를 건네겠다고 말했지만 그 추격자는 명받은 대로 연기했다.
“내 주인께서는 너희들이 모두 죽기를 바라신다. 그래야만 비밀을 지킬 수 있다.”
평안은 태자가 이처럼 잔인하고 악랄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밀서를 태자에게 건네는 행동이 결코 풍 측비와 풍씨 가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태자가 벌인 짓을 폭로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평안은 영리한 사람이라 관아에 밀서를 넘기면 은폐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동안 숨어 있었다. 때를 기다리다가 주씨 가문에서 연회가 열리는 날을 노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자의 만행을 폭로하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럼 백성들의 압박에 못 이겨서라도, 황제는 이 일을 불공정하게 처리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렇게 평안은 여러 가지를 고려했으나 황제의 마음만은 계산에서 빠뜨리고 말았다.
풍 측비가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 건 이미 양왕의 계산 안에 포함된 일이었다.
“임 국공이 대제 제일의 대학자이고 제왕의 스승이긴 하나 어쨌든 신하입니다. 그러니 어찌 황제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주운환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는 태자 전하를 편애하시고 지켜 주려고 하십니다. 국공도 이를 잘 알고 있을 텐데 정말로 공정한 감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
차게 웃은 양왕의 눈빛엔 조롱기가 가득했다.
“게다가 전에 전하께서는 선황을 곁에서 모시던 우두머리 환관인 낙 환관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자는 줄곧 황제 폐하의 사람이었고 황제 폐하께서 황위 다툼을 벌일 때 적잖이 힘을 보탰습니다. 낙 환관은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이 일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하셨죠.
고로 유일하게 공정한 감정을 할 사람은 요공 대사뿐입니다. 만일 낙 환관과 임 국공 모두 태자 전하가 그 밀서를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해 버리면 정말로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주운환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전하, 자신 있으신 겁니까?”
“진실을 말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 말하는 양왕의 눈빛엔 순간 살기가 번득였다.
* * *
가을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교외는 황금빛 물결이 넘실거리고 곳곳엔 노란 들풀과 야생화가 가득해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크고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오솔길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는데, 마차에 달린 발이 천천히 걷히더니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고상하고 점잖게 생긴 한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다름 아닌 임 국공이었다.
“나리, 방금 전에 황제 폐하의 뜻을 전달받았습니다. 사흘 후에 입궁하여 밀서 한 장의 필적을 감정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마차를 모는 사동이 전했다. 임 국공은 다소 혐오감이 느껴진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다!”
“그래도 외출하실 겁니까?”
사동이 물었다.
그들은 지금 특별한 곳을 가려는 게 아니라 그저 날씨가 좋고 상쾌한 가을바람이 불어 밖으로 산책을 나가려는 것이었다. 이런 날엔 교외로만 나들이해도 기분이 아주 좋아지기 마련이었다.
“흥, 나가지 않을 이유라도 있느냐?”
임 국공이 냉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이미 무슨 일인지 다 알고 있으니 때가 되면 그분의 뜻에 따라 이야기해 드리면 그만이다. 지금 놀러 나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나리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사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풍경이 아주 끝내줬다. 푸릇푸릇했던 풍경이 가을로 접어들며 노랗게 물들어 가는 모습이 그윽한 운치를 자아냈다. 양쪽으로 길게 자란 들풀은 노랗게 변해 가고 있었고, 먼 곳에 서 있는 단풍나무 몇 그루는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빛을 뽐내고 있었다. 또 길가의 야생화는 가을바람을 타고 향긋한 꽃내음을 풍겨 왔다.
“이랴!”
이때, 정면에서 말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