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9화
그 말에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무엄하구나!”
정선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시작한 것이냐?”
“소인은 모르옵니다.”
어린 환관이 덜덜 떨며 답했다.
“폐하, 이 일은 반드시 철저하게 조사해야 하옵니다! 관용을 베푸시면 절대 아니 되옵니다!”
사부상서 자학전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러자 공부상서 종병과 유 재상, 조정 신하들도 잇달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지금 조사하고 있지 않느냐!”
정선제는 큰 소리로 그들을 꾸짖었고 험상궂은 얼굴을 파르르 떨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수옥水玉으로 만든 짐승 머리 모양의 진자鎭子(종이나 서책을 눌러 놓는데 사용하던 물건)를 탁자 위로 냅다 던져 버렸다. 진자는 네다섯 조각으로 산산이 깨졌다.
대전 안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고 얼마간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 이각쯤 지나자 마침내 풍 측비가 대전으로 불려왔다.
사람들은 모두 풍 측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스물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네모난 얼굴의 그녀는 보통 이하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너무 말라서 뼈만 남아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최근에 풍씨 가문 주장主將들이 참살되어 가문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될 운명을 맞게 되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칠 대로 지친 게 틀림없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풍 측비는 몸을 낮추며 무릎을 꿇었다.
“이 몹쓸 것. 내 너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이런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냐!”
태자는 그녀를 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풍 측비는 태자가 호통을 치자 비틀거리다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며 그저 눈물만 흘렸다.
“어제 진서후의 집에 피범벅이 된 사내가 들이닥친 일을 너도 들었으렷다?”
정선제는 싸늘하고 어두운 얼굴로 아래에 있는 풍 측비를 매섭게 노려봤다.
“지난달에 진서후가 남쪽 오랑캐의 영토로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된 후 네가 내게 풍씨 가문 형제에게 가서를 보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느냐?”
태자는 그리 말하며 온화하고 품위 있는 얼굴로 한없이 차갑고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
“형제를 살리려는 마음이 간절해 보여 네가 청두응을 빌려 가서를 보내는 걸 허락해 줬다. 그런데… 네 가서에 풍씨 가문 형제에게 사람을 죽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전하…….”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풍 측비의 창백한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얼굴이 예쁘지 않은데도 그녀가 그동안 태자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전부 출신, 즉 풍씨 가문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풍씨 가문의 영예는 남아 있지 않으니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을 꺼내 봤자 태자에게 혐오감만 안겨 줄 뿐이었다.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얻을 수 없었다.
응성이 함락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오라버니들이 죽던 날 풍 측비는 자신의 인생이 끝장나 버렸음을 직감했다.
다만 가족들이 죽고 가문이 몰락하고 태자부에서 세력을 잃은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 태자의 무정함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오싹함과 서늘함엔 못 미칠 뿐이었다.
설사 용모가 뛰어나지 않더라도, 그동안 풍씨 가문 덕분에 총애를 받은 것이라고 해도 태자와 무려 십여 년의 세월을 진실되게 함께 해 왔다.
‘그런데 태자는 내게 정말로 정이란 것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가…….’
풍 측비는 온몸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풍 측비?”
위에서 정선제의 착 가라앉은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풍 측비가 고개를 들어 보니 태자는 품위 있는 얼굴로 차디찬 표정을 짓고 있었고 평소 부드럽기만 하던 그의 눈빛에선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냉기가 느껴졌다.
주위의 조정 신하들도 대부분 그녀에게 얼음 같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제가 잘못했사옵니다.”
잘못했다는 그녀의 말에 주위의 조정 신하들은 깜짝 놀랐고 이어 고개를 끄덕이거나 탄식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의 발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뜻 아닌가.
풍 측비는 훌쩍거리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전 원래 일개 양제에 불과했습니다. 저희 가문 사람들이 갑자기 기용되어 조정의 중신이 되지 않았다면… 그동안 제가 어떻게… 태자부에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겠사옵니까……. 그런데 지금 집안에 갑자기 변이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오라버니들이 잇달아 목숨을 잃고…….”
그녀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풍 측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두려웠습니다……. 친정이 세력을 잃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풍씨 가문이 무너져 버리면 저는 기댈 곳이 없사옵니다! 그래서 전 두 오라버니에게 진서후를 죽여 공을 가로채라고…….”
“정말이지 악독하기 그지없군요!”
요양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감히 대제의 공신을 해하려 하다니.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이옵니다.”
왕성촌 역시 냉담한 목소리로 비난을 퍼부었다.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들이 공을 가로채게 할 생각이었다면, 어째서 직접 서신을 보낼 생각을 하지 않고 전하의 이름을 사칭하고 전하의 필체를 사용한 것인가?”
전지신의 이 말에 풍 측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제 오라버니들이 충직한 성격이라… 제가 오라버니들에게 그리하라고 했으면 오라버니들은 절대로 응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오라버니들은 태자 전하를 존경하기 때문에 전하께서 두 분에게 내린 명령이라고 하면 분명 따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태자 전하의 이름을 도용하고 전하의 필적을 모방했습니다……. 또 전하를 속여 제가 청두응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저는 가서를 보낸다고 말하며 태자 전하께서 그 가서를 보시게끔 했습니다. 하지만 청두응 다리에 달린 서신을 넣는 작은 통에 가서를 넣을 때 미리 준비해 놓은 밀서를 소매 안에서 몰래 꺼내 바꿔치기했습니다……. 그런데… 두 오라버니가 이렇게까지 충직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몹쓸 것!”
상석의 정선제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 뒤엔 어찌했느냐?”
“이것 참 이상하군요. 태자 전하의 소행이 아니라면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가 어째서 돌아오자마자 먼저 태자 전하를 뵈었고 왜 독살을 당했을까요? 또 어째서 이 밀서를 진서후에게 건넸을까요?”
보다 못한 양왕이 냉소를 지으며 개입했다.
정선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양왕을 쳐다봤다.
“그건…….”
풍 측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라버니들은 전하께서 밀서를 보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여 돌아오자마자 전하를 찾았습니다. 그때 제가 마침 전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오라버니들이 찾아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전 태자 전하께 오라버니들과 셋이서만 있게 해 달라고 말씀드렸죠. 그다음에 두 오라버니에게 경고했습니다. 일을 실행하지 못한 건… 전하께서는 나무라지 않으실 테니… 돌아가서 잠자코 있으라고 했습니다. 오라버니들은 전하를 뵙지 못했고 저만 만났던 겁니다…….”
“그럼 네 오라비들은 어째서 죽은 것이냐?”
정선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런 것이옵니다…….”
풍 측비는 그리 말하며 통곡했다.
“오라버니들이 태자 전하께 밀서 이야기를 꺼낼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리되면 제가 전하의 이름을 도용하여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일을 벌인 걸 알게 되실 텐데… 그럼 분명 절 용서치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풍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인데 이 일이 폭로되면… 전 정말로 끝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안위를 위해… 오라버니들을 독살했습니다. 그런데 오라버니들이 전하의 소행이라고 오해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저렇게 악독할 수가! 공신을 살해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친오라버니마저 살해하다니!”
요양성이 버럭 호통을 쳤다.
“저런 개돼지만도 못한 자를 봤나!”
조정 신하들은 잇달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태자는 품위 있는 얼굴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양왕을 힐끗했다.
‘날 반편이로 본 것이냐? 내가 눈 뜨고 당할 줄 알았느냐?’
어제 궁으로 들어오는 길에 그는 요양성 등과 대책을 논의했는데 그 대책은 바로 모든 죄를 풍 측비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태자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싸늘한 눈빛으로 풍 측비를 쳐다봤다.
풍 측비는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쏟으며 상심, 절망,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서서 희생양이 되지 않는다면 태자가 맞닥뜨리게 될 최악의 결과는 폐위되어 태자부에 감금되는 것이다.
그리되면 그녀 자신 또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이제 겨우 여섯 살밖에 안 된 그녀의 딸도 살아남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송초는 태자를 대신해 그녀에게 약속했다. 그녀가 죄를 뒤집어쓰면 앞으로 그녀의 딸은 잘 살 수 있으며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갈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풍 측비는 이 약속이 지켜질 수 있을지 그 여부를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응하면 딸에게 살길이 생길 수도 있으나, 응하지 않으면 딸에게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이 몹쓸 것!”
태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려 정선제를 쳐다보고는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아바마마, 다 소자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옵니다! 다행히도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소자가 벌을 달게 받겠사옵니다!”
정선제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아래에 있는 조정 신하들을 훑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페하… 이 일은 전하께도 소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이 있사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저 악독한 자가 벌인 일이옵니다!”
정 부윤이 말했다.
“지금 증인과 물증이…….”
“증인과 물증은 전부 태자 전하를 가리키고 있죠!”
양왕이 냉소를 지으며 말허리를 잘랐다.
“방금 전에 평안이라는 자가 말하길,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는 측비가 아닌 태자 전하와 상세히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지금 이 사람은 태자의 측비입니다. 듣자 하니 측비에게는 겨우 여섯 살밖에 안 된 딸이 있다고 하더군요. 측비가 희생양이 되지 않으면 아이는 살아남을 수 없겠지요.”
“양왕 자네는 참 지독한 사람이군! 그 아이는 내 딸이기도 하네. 다른 사람들도 다 자네처럼 모질고 냉정하다고 생각하나 보지?”
태자는 음산한 눈빛으로 양왕을 쳐다봤다.
“아바마마, 궁 밖에 아직 청원하는 서생과 백성들이 있사옵니다. 밖으로 사람을 보내 지금 이 ‘실상’을 알려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안 그러면 사람들이 형님을 오해할 것입니다.”
양왕의 이 말에 정선제는 표정이 싸늘하고 어둡게 변했고 채결을 향해 한마디 했다.
“나가 보거라!”
채결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