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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457화 (457/858)

제457화

그 말에 득승루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얼어붙었고, 이어 경악한 얼굴로 다들 태자를 쳐다봤다.

태자는 낯빛이 확 변했고 순간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방금 전만 해도 무슨 구경거리가 났나 보다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구경거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그 자신일 줄은 몰랐다.

“허튼소리 말거라!”

태자의 잘생긴 얼굴이 차갑고 어둡게 변하더니 버럭 소리를 쳤다.

“웬 빌어먹을 놈이 대놓고 태자 전하를 모함하며 군신 관계를 이간질하는 것이냐!”

뒤에 있던 이계도 얼른 앞으로 한 발짝 나오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맞습니다. 이 빌어먹을 놈에게는 불순한 목적이 있을 겁니다!”

요양성이 매섭게 소리쳤다.

“뭐 하고 있느냐? 어서 이놈을 끌어내 흠씬 두들겨 패거라!”

요양성이 호통을 치자 대복 등은 깜짝 놀랐고 옆에 있던 하인이 얼른 그를 끌고 나가려고 했다.

“잠깐!”

그때, 양왕이 냉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서두를 게 뭐가 있느냐! 누가 옳고 그른지는 요 상서가 마음대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태자 전하와 요 상서의 이익과 관계된 일이면 모함이 되는 것이냐? 대제의 국법은 장식품이란 말이냐?”

그 말에 요양성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태자는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태자는 당장이라도 이 피범벅이 된 사내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주위에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이 너무 많아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하하, 어떤 자들은 모함을 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저지르기도 하지.”

태자는 냉소를 짓더니 양왕을 힐끗 봤다. 그 말인즉 지금 양왕이 저를 모함하기 위해 일을 꾸몄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초조해진 태자는 옷소매를 홱 뿌리치더니 뒷짐을 지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양왕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태자를 쓱 보고는 주운환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방금 전에 그 사람이 뭘 줬는가?”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손님들 모두 호기심이 발동해 고개를 쭉 내밀고 주운환을 쳐다봤다.

주운환의 손에는 손바닥 크기만 한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 종이 뭉치를 펼치자 안에는 선 모양의 금박 무늬가 들어간 담황색 서신이 들어 있었다.

그 서신을 본 태자는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했다.

이 서신은 다름 아닌 자신이 풍씨 가문 형제에게 보냈던 밀서였다.

지난번에 자신이 풍씨 형제에게 물어봤을 때 형제는 이 서신을 불태웠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서신이 다시 튀어나올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게 바로 태자 전하께서 풍씨 가문 형제에게 자네를 죽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밀서인가?”

양왕이 미소를 지으며 묻자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밀서가 맞습니다.”

“온몸이 피범벅인 걸 보니 아마도 누군가가 죽이려고 쫓아온 모양이구나! 대리시경! 사람을 시켜 이자를 대리시로 데려가게.”

양왕의 명령에 장찬은 움찔하더니 얼른 몸을 굽히며 앞으로 나왔다.

“예!”

“갑시다! 형님, 진서후, 어서 궁으로 가십시다.”

양왕은 그리 말하고는 먼저 자리를 떠났고 주운환이 따라서 돌아서려는 찰나, 태자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당부했다.

“진서후, 오해하지 말게. 난 결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네.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날 모함하려는 거네.”

주운환은 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고개를 까딱하며 대꾸했다.

“이 일은 황제 폐하께 맡기시지요. 폐하께서 판결하실 겁니다.”

그는 그리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고 태자도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돌아섰다.

요양성과 전지신 등도 낯빛이 솥 바닥처럼 어두워지더니 자리를 떠났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귀빈 중 조정에 나갈 자격이 있는 신하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득승루는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고 중앙에 마련된 연극 무대의 공연자들조차 노래를 멈추었다. 남은 사람은 대부분 여식솔들이었다.

“이 일은… 분명 오해일 것이네.”

태자비는 창백한 얼굴로 앞으로 나오더니 엽연채에게 해명했다.

“예전부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네.”

엽연채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고, 신양 공주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보더니 미소 띤 얼굴로 말머리를 돌렸다.

“늦었는데 우리 식사나 하십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죠.”

“예.”

엽연채는 밖으로 나가더니 어멈들에게 상 차릴 준비를 하라고 했고, 손님들도 천천히 2층이나 1층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진씨의 낯빛이 푸르죽죽해지자 뒤에 있던 정 마마가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전하께서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이 말에 주묘서는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에 존귀한 태자 전하와 정혼했는데 만약 태자가 주운환에게 손을 썼다면 두 가문은 원수지간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엽연채는 서둘러 어멈들에게 상을 차리라고 했지만 정작 본인은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사람들도 그녀가 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온 신경은 이곳이 아닌 태자가 사람을 시켜 주운환을 죽이라고 했는지에 쏠려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엽연채가 궁명헌으로 돌아오자 엽영교와 묘씨 등이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별일 없을 게다.”

하지만 다들 이럴 땐 뭘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실 거예요.”

진지항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확실히 이건 조정의 일이니 이 자리에서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묘씨와 나씨 등도 이런 일은 겪어 본 적이 없기에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눈 후 그곳을 떠났다.

* * *

책상 앞의 정선제는 하좌에 나란히 선 신하들을 응시하며 희끗희끗한 눈썹을 씰룩거렸다.

응성 전투가 승리로 끝났고 주운환이 오늘 연회를 열기 때문에 정선제는 조정 신하들에게 하루 휴가를 주었다. 주운환이 연회를 성대하게 치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주씨 가문 연회에 참석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부 조복으로 갈아입고 자신 앞에 나란히 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선제가 냉랭한 목소리로 하문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누구든 짐에게 고하거라.”

“아바마마, 소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옵소서!”

태자가 제일 먼저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고는 억울한 얼굴로 소리쳤다.

“폐하.”

장찬이 앞으로 한 발짝 내딛더니 공수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오늘 주씨 가문 연회에 갑자기 피범벅이 된 한 사내가 난입하더니 본인을 풍씨 가문 하인이라 말하며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의 억울함을 밝혀 달라고 했사옵니다. 그러면서…….”

“장황하게 지껄이지 말고 제대로 말해 보거라!”

정선제는 조금 짜증이 일었다.

“그자가 말하길, 응성에 있을 때 진서후가 남쪽 오랑캐의 영토로 들어가자 태자 전하께서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에게 밀서를 보내셨다고 하옵니다. 그들에게 매복하고 있다가 진서후가 남쪽 오랑캐의 영토에서 나오면 교살한 뒤 서노군을 격퇴하고 응성을 탈환한 공을 가로채라고 하셨다 하옵니다.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는 이를 원치 않았고 태자 전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사옵니다. 그들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태자 전하께서는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염려되어 두 사람을 죽여 입막음을 하셨다고 하옵니다. 그 피범벅이 된 사내는 풍씨 가문 하인인데, 그자가 태자 전하께서 응성으로 보내셨던 밀서를 진서후에게 건넸사옵니다.”

그 말에 대전 안은 정적이 흘렀다. 아직 상황을 모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쉬더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태자를 쳐다봤다.

정선제는 표정이 음랭하게 변했다. 그는 머리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모든 신경이 다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양왕은 ‘픽’ 웃더니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조롱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바마마, 소자는 억울하옵니다!”

무릎을 꿇고 있던 태자가 고개를 들어 스스로를 변호했다. 그는 품위 있는 얼굴로 아주 냉정하고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풍씨 가문이든 주씨 가문이든 전부 대제의 신하입니다. 소자가 굳이 그런 쓸모없는 일을 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맞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누명을 쓰신 겁니다.”

요양성과 전지신 등이 잇달아 맞장구를 쳤다.

“밀서는?”

정선제가 착 가라앉은 싸늘한 목소리로 밀서를 찾았다.

“여기 있사옵니다.”

주운환은 그리 답하며 선 모양의 금박 무늬가 들어간 담황색 서신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채결이 얼른 아래로 내려오더니 밀서를 건네받아 정선제 앞에 내밀었다. 정선제는 서신을 확 낚아채 안에 적힌 내용을 쓱 훑어봤다.

밀서의 내용은 간단했지만 전달하려는 의미는 아주 명확했고 장찬이 했던 말과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정선제는 탁 소리를 내며 밀서로 탁자를 힘껏 내리치더니 노성을 내질렀다.

“이런……! 감히 이런 몹쓸 짓을 벌이다니!”

“아바마마, 소자는… 정말로 억울하옵니다. 소자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사옵니다.”

태자는 입술을 꽉 깨물며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철저히 조사하셔야 하옵니다.”

요양성이 말했다.

“짐은 조사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정선제는 손으로 탁자를 쾅쾅 내려치더니 축 처져 있음에도 매서운 기운이 느껴지는 두 눈으로 장찬을 바라보며 명했다.

“태자는 당분간 대리시에 감금한다. 이 일은 대리시경과 부윤에게 맡길 것이니 함께 철저히 조사하거라! 노왕도 이에 협조하거라!”

“예.”

장찬, 정 부윤, 노왕은 얼른 명을 받들었다.

이때, 정선제가 다시 고개를 들더니 흐릿한 두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주운환을 쳐다봤다.

“이 밀서는 우선 진서후가 보관하거라.”

“예.”

주운환은 공수하며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주운환에게 밀서를 돌려준다는 소리에 태자와 전지신, 요양성 등은 혼비백산하며 낯빛이 창백해졌지만 감히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채결은 밀서를 챙긴 다음 몸을 굽히고 주운환 곁으로 걸어가 다시 그것을 건네주었다.

정선제는 관자놀이 부분이 툭툭 불거지며 두통이 느껴지자 손사래를 치며 모두를 물렸다.

“일단 해산하거라. 내일 이어서 친국親鞫(황제가 직접 죄인을 심문함)하겠다!”

* * *

엽연채는 노란 국화 문양이 가득 들어간 둥글부채를 쥐고 파초나무 아래에 놓인 돌 탁자 위에 엎드린 채, 부채질을 하는 둥 마는 둥 그저 문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다.

미시未時(오후 1시~3시)의 절반이 지나서야 주운환이 문안으로 들어섰다.

“부군!”

엽연채는 손에 들고 있던 둥글부채를 집어 던지고 그에게 달려갔다.

주운환은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풀나풀 날아오는 나비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엽연채의 모습을 보자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확 끌어안고는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 우리 연채.”

“어떻게 됐어요?”

엽연채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 일… 자신 있는 거예요?”

‘이 일’이란 태자를 무너뜨리는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고생 좀 해야 될 겁니다.”

주운환은 수묵으로 그린 것 같은 눈동자를 살짝 깜빡이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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