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6화
“묘서야!”
진씨가 그녀를 붙잡았다.
“이 일은 당분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거라.”
“하지만…….”
주묘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신이 곧 태자의 측비가 된다는 기쁘기 한량없는 소식을 어째서 감추라는 말인가?
“셋째 내외 그 망할 것들을 잊은 것이냐?”
진씨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것들이 네가 태자 전하의 측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수작을 부릴 것이다. 그러니 전하께서 이 일을 처리해 놓으시면 그때 이야기하자꾸나.”
주묘서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냥 득승루에 가서 놀게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함께 가자꾸나.”
진씨도 흥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모녀는 채비를 하고 문을 나서서 시끌벅적한 득승루로 돌아갔다.
엽연채는 묘씨 등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음식을 먹으며 아주 즐겁게 웃고 있었고 주묘화도 엽연채 옆에 앉아 있었다.
“작은새언니와 묘화가 여기 있었네요.”
주묘서가 빙그레 웃으며 걸어왔다.
“사돈 어르신, 그간 안녕하셨어요?”
진씨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엽연채는 갑자기 상쾌한 표정을 짓는 이 모녀를 보더니 미간을 꿈틀거렸다. 이 모녀는 주묘서의 혼사 때문에 하루 종일 우울한 표정이었는데, 갑자기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 사람처럼 싱글벙글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어머니, 언니.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주묘화는 창백한 얼굴로 조심스레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진씨와 진지항 가문이 껄끄러운 사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엽연채와 함께 있고 싶어 한자리에 앉도록 권한 것이다. 그런데 진씨가 이쪽으로 걸어올 줄이야.
“그래.”
그러나 진씨는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고 주묘서를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주묘화는 놀랐지만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묘서를 본 진지항과 엽영교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전에 그런 소란이 있었으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진 부인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렇게 운을 뗐다.
“어머, 주 부인과 대소저가 오셨네요. 들어 보니 대소저가 정혼했다고 하던데 혼례식은 언제 올리나요?”
진 부인은 일부러 진씨에게 이 말을 꺼냈다. 이 모녀가 너무 밉살스러워 기를 눌러 주고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씨는 성을 내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답했다.
“진 부인, 걱정 마세요.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부인께 알려 드릴게요. 그러니 다들 차분하게 좋은 소식을 기다려 주세요!”
주묘서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까치 문양이 들어간 손수건을 손에 감으며 빙그레 웃는 낯으로 맹씨와 엽이채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고민을 하며 뭔가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한 모습이었다.
“장 부인 아니세요? 왜 장 소저의 모습은 보이지 않나요?”
주묘서가 대뜸 물었다.
그러자 맹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으론 장만만과 주묘서는 교분이 없는데 어째서 갑자기 자신의 딸에 대해 물어본단 말인가?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만만이는 요즘 몸이 좋지 않아 거의 외출을 하지 않네.”
“아……!”
주묘서는 길게 ‘아’ 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장 소저는 정혼했습니까?”
그 말에 맹씨는 표정이 확 굳어졌으나 선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직 못했네.”
“아, 그렇군요.”
주묘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보탰다.
“정말 장 소저를 한번 만나 보고 싶어요.”
장만만은 태자에게 시집가지 못해 측비가 되지 못했고 게다가 그 일이 파다하게 퍼져 도성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으니 분명 원통하고 한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태자에게 시집가서 장만만이 그토록 바라던 태자 측비가 되게 생겼으니, 주묘서는 장씨 가문 사람들과 장만만 앞에서 우쭐대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말할 수가 없으니, 나중에 꼭 기회를 봐서 장만만을 찾아가 날 부러워하고 질투하게 만들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주묘서는 사방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고 그녀의 시선은 맞은편 망루에 있는 존귀하고 품위 있는 한 사내에게서 멈추었다.
주묘서는 그를 바라보며 환희를 느꼈다. 좀 있으면 자신은 태자에게 시집가게 된다. 황제 다음으로 대제에서 가장 존귀한 사내에게 시집가는 것이다. 그리되면 대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부러워할 것이다.
맞은편의 태자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쪽을 쓱 보며 미소를 짓고 다시 고개를 돌려 노왕과 이야기를 나눴다.
“전하, 일은 성사되셨습니까?”
이계가 그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태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계집은 식은 죽 먹기지.”
“감축드립니다. 전하.”
이계가 미소를 지으며 하례하자 태자는 비웃음 어린 미소를 짓더니 술을 들이켜고는 아래층의 연극 무대를 쳐다봤다.
“꺄악!”
그런데 이때, 아래층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랐고 아래층과 위층에 있는 사람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봤다.
태자와 양왕, 주운환 등도 아래를 봤고 엽연채와 엽영교 등도 깜짝 놀라 잇달아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득승루 입구 쪽으로 피범벅이 된 사람이 갑자기 달려 들어와 바닥에 쓰러지더니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진서후 나리!”
태자와 양왕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주운환은 이미 돌아서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태자 등도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엽영교와 한담을 나누고 있던 엽연채 역시 화들짝 놀라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묘서와 진씨는 서로 눈을 맞추더니 상대에게서 ‘셋째 부부의 불행을 즐기자!’라는 눈빛을 읽어 냈다.
주묘서는 옅은 한숨을 쉬며 한마디 했다.
“에휴. 셋째 오라버니와 새언니는 대체 하인들을 어떻게 관리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피범벅이 된 사람이 달려오다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진씨도 거들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들 모녀도 구경을 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손님들도 호기심에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머……!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손님들은 놀란 눈빛으로 피범벅이 된 사람을 쳐다보며 계속해서 수군거렸다.
키가 크고 건장한 한 사내가 고개를 땅으로 숙인 채 쓰러져 있었다. 평범한 회색 옷을 입은 그는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한눈에도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 같았다.
이때, 네다섯 명의 하인이 뛰어 들어오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중 한 명은 바로 주 백야를 곁에서 모시는 대복이었다.
커다란 몽둥이를 든 대복은 우선 주위로 몰려든 손님들에게 공수하며 사과를 건넸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제대로 막지 못해 이런 떠돌이 비적이 난입하게 만들었습니다.”
“뭐라? 떠돌이 비적이라고!”
손님들은 그 말에 깜짝 놀라 잇달아 뒤로 물러섰다.
“세상에!”
요 몇 년간 끊이지 않는 전란 때문에 살 곳을 잃은 서북과 응성 혹은 서남쪽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다가 조정에 반기를 드는 군대를 조직해 곳곳에서 난을 일으키고 있었다. ‘떠돌이 비적’은 바로 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서북쪽에서 몇 년간 이어진 전쟁은 연초에 끝났고 서남쪽 응성의 전쟁은 지난달에 끝이 났다. 하지만 떠돌이 비적들은 조직한 군대를 해산할 뜻이 없었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세를 확장해 갔다. 황제는 비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도성을 수비하는 병영의 책임자인 오일의를 파견했지만 아직 좋은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이 비적들은 감히 도성으로 접근하지는 못해 도성과 인근 지역은 아주 평온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이들이 일으킨 난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오늘은 주씨 가문에서 연회가 열려 대복은 집안 하인들을 데리고 문 입구마다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피범벅이 된 사람이 안으로 달려들었고 그를 잡아 죽이겠다며 또 다른 두 사람이 그 뒤를 쫓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대복을 포함한 하인들은 깜짝 놀랐고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뒤에서 피범벅이 된 사내를 쫓아오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저자는 떠돌이 비적이다! 떠돌이 비적이 사람을 죽였다!”
대복 등은 아연실색했고 얼른 사람들을 데리고 뒤를 쫓았다. 그런데 이 비적이 이곳으로 달려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복은 계속해서 죄송하다며 고두백배했고 그의 뒤에 있던 둘은 숨이 끊어져 가는 사내에게 얼른 다가가 그를 질질 끌어당겼다.
“잠깐!”
이때, 누군가가 호통을 쳤다.
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랐고 겁먹은 대복은 얼른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보니 사람들이 전부 길을 내주었고, 그 사이로 주운환, 태자, 양왕, 노왕, 장찬, 요양성 등 꽤 많은 조정 중신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엽연채를 비롯한 주씨 가문의 여식솔들도 걸어와 그 앞에 멈춰 섰다.
“나리!”
대복은 창백한 얼굴로 공수했다.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자는 떠돌이 비적인데… 소인이 소임을 다하지 못해…….”
주운환은 대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더니 그 피범벅이 된 사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진서후다. 날 불렀느냐?”
피범벅이 된 사내는 의식이 몽롱했는데 ‘진서후’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고개를 들자 사람들은 그를 쳐다봤는데, 평범하게 생긴 얼굴에 칼에 베인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고 그 상처에선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 나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서후 나리… 제발 소인의 주인 되시는 분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사내는 힘겹게 목소리를 짜내며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 주운환에게 건넸다.
주운환은 잠시 당황했으나 얼른 그 종이 뭉치를 건네받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시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억울함을 풀어 달라니? 무슨 억울한 사건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런 거라면 왜 정 부윤이나 대리시경 장 대인을 찾지 않는 거지?”
옆에 있던 정 부윤과 장찬은 서로 눈을 맞췄고 정 부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보게, 무슨 억울한 일이 있거든 관아에 가서 북을 치게.”
피범벅이 된 사내는 그를 상대하지도 않고 숨을 훅 내쉬더니 다시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후야께서는 소인이 모시는 나리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십니다. 저희 나리께서 어떻게 부귀영화를 위해 후야를 해칠 수 있었겠습니까!”
주위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고 주운환이 그에게 물었다.
“네 상전이 누구냐?”
궁금증이 인 손님들은 전부 목을 쭉 내밀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피범벅이 된 그 사내는 온몸에 남아 있는 힘을 전부 동원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소인의 상전은 바로 그저께 세상을 떠나신 풍흠, 풍용 형제이십니다. 두 분은 응성에서 진서후를 살해하라는 태자 전하의 밀서를 받으셨는데 그 뜻에 따르지 않아 태자 전하께서 두 분을 죽여 입막음을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