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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455화 (455/858)

제455화

스스로도 얼마나 달려왔는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을 뿐이었다.

정신이 돌아와 보니 주묘서는 어느새 백로 정자 쪽에 와 있었다. 넓고 맑은 호수가 눈앞에 펼쳐져 있고 처마 끝이 높이 솟은 팔각정자들이 푸르른 호수 위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녀는 그쪽으로 걸어가지 않고 계화나무 아래에 앉아 소리 죽여 슬피 울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소?”

그런데 이때,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묘서가 고개를 돌려 보니 귀티가 흘러넘치는 사내가 서 있었다. 아름다운 수를 놓은 검은색 망포 차림의 그는 온화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태자였다.

태자가 갑자기 나타나자 주묘서는 깜짝 놀라면서도 부끄러워했고 화장이 번질까 봐 얼른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전…….”

주묘서는 서 공자 일이 떠오르자 낯빛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뒷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마음 아픈 일이 좀 떠올라서……. 그런데… 태자 전하께서는 어떻게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그리 말하는 그녀는 가슴이 콩닥콩닥 방망이질했다.

“난… 나도 소저와 마찬가지로 마음 아픈 일이 좀 떠올라서.”

태자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외출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진서후의 체면을 살려 줘야 하니 할 수 없이 이렇게 와 본 거네. 그렇게 얼마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안이 너무 시끄러워 마음이 편치 않더군. 그래서 밖으로 나와 좀 거닐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우리가 인연인 건지 이곳에서 마주치게 됐군.”

주묘서는 태자가 ‘인연’이라는 말을 꺼내자 마음속에서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주위는 조용하고 뒤에선 계화의 싱그러운 향기가 전해지며 눈앞엔 맑고 푸르른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시원한 가을바람 사이로 은은한 꽃향기가 전해져 가슴이 탁 트이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라 눈앞의 태자가 더욱더 잘생겨 보였다. 주묘서는 온화한 표정에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계속해서 쿵쿵 뛰었다.

전에는 멀게만 느껴졌던,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던 태자 전하가 지금 이리도 가까운 거리에서 더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묘서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어째서 세상은 이리도 불공평한가. 멀쩡한 주씨 가문 첫째 소저가, 귀하디귀한 주씨 가문 적녀가 종4품 소관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니. 이보다 더한 풍자와 가혹한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왜 자신이 시집갈 사람이 태자가 아닌 것인가. 지금 자신의 신분으론 그의 정비로 시집가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주묘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파 눈물을 뚝뚝 흘렸다.

“화려하게 단장한 옥용玉容에 눈물이 흐르니 비에 젖은 배꽃처럼 가히 경국지색이로구나.”

태자가 갑자기 시구를 읊조리자 주묘서는 깜짝 놀랐다. 그가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경국지색이라 칭찬할 줄은 몰랐다. 주묘서는 조그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부끄러우면서도 기뻐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원래부터 태자를 사모했는데 지금 태자가 저를 이리도 부드럽게 대해 주자 결국 참지 못하고 그 품으로 냅다 달려들었다.

“전하, 제발 저 좀 구해 주세요…….”

“소저, 이, 이런…….”

태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나에게 알려 주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면 온 힘을 다해 도와주겠네.”

“전하…….”

주묘서는 그저 그의 품으로 더더욱 파고들며 흐느껴 울기만 했다.

“전하…….”

그 누구보다 존귀한 사내의 품으로 파고들어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비에 젖은 배꽃처럼 눈물을 흘리면, 존귀한 사내는 부드럽게 저를 위로해 주는 장면. 주묘서는 이런 장면을 수도 없이 상상해 봤다.

그녀는 자신이 존귀한 사내에게 이런 부드럽고 따뜻한 대접과 다정한 보살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주묘서는 한참을 울고 나서야 훌쩍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 사내와 정혼했는데 나중에서야… 그 사내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저희는 파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게다가 전 전하를 사모합니다. 전하… 절 구해 주세요. 전하께 시집갈 수만 있다면 그저 양제良娣(태자의 첩실)가 된다고 해도… 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옵니다.”

그녀는 또르르 눈물을 흘리며 한없이 억울해했다.

“소저…….”

태자는 흥분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처럼 신분이 고귀하고 경국지색의 미모를 가진 여인이 어떻게 일개 양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지위가 너무 낮으면 이는 주운환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주씨 가문은 말할 것도 없고 황제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묘서는 그가 자신을 첩실로 들이겠다고 할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지위를 주겠다고 하자 더없이 기뻤다.

“하지만 전하께는 이미 정비와 측비가 있지 않습니까?”

“정비 자리는 그대에게 줄 수 없소. 어쨌든 내 조강지처이고 아바마마께서도 절대로 동의하지 않으실 테니 말이오. 하지만 측비 자리라면 분명 문제없을 것이오. 걱정 마시오. 그 둘이 어떻게 그대와 비교가 되겠소.”

태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묘서는 속으로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하…….”

“서야…….”

주묘서는 지금껏 이렇게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원하고 원했던 것이었다. 주묘서의 온 마음이 순식간에 연애 감정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은 백로 정자 쪽에서 잠깐 더 머물다가 못내 아쉬워하며 헤어졌다.

득승루 안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연극 무대에선 해학적인 희곡이 공연되고 있어 감상하는 사람들은 요란하게 박장대소했다.

진씨만이 어두운 얼굴로 구석에 앉아 있었다. 어찌해도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자리에 머물러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 빌어먹을 것들이 의기양양해하는 꼴 따위를 보고 싶어 할 리가 있는가. 하지만 서둘러 주묘서의 짝을 찾아 주지 않는다면 또 언제까지 그녀의 혼사를 미뤄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마님.”

이때, 녹엽이 뛰어 들어왔다.

“큰아가씨께서 일상원으로 마님을 부르셨습니다.”

“묘서가?”

진씨는 어리둥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전에 묘서가 어디에 갔었느냐?”

“저도 모릅니다.”

녹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는 일상원 쪽을 지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가씨가 다가오시더니 마님을 일상원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진씨는 녹엽과 함께 일상원으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묘서가 탑상에 기대어 앉아 옥패 하나를 쳐다보며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묘서야?”

진씨는 방실방실 웃고 있는 주묘서를 보자 순간 어리둥절했다. 요즘 주묘서는 몹시 우울해하며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아 너무도 마음이 아팠는데,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진씨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어머니, 오셨군요!”

주묘서는 몸을 돌려 일어서더니 달려가 진씨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께 알려 드릴 좋은 소식이 있어요.”

“좋은 소식이라니?”

진씨는 그녀에게 이끌려 탑상으로 가 자리에 앉았다.

“제가 좋은 혼처를 구했어요.”

“뭐?”

진씨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묘서의 손을 꼭 잡고 다급히 물었다.

“혼처라니? 누군데?”

“그게… 태자 전하요!”

주묘서는 헤헤 웃으며 방금 전 백로 정자에서 있었던 일을 진씨에게 이야기해 줬다.

“전하께서 제게 측비 자리를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 말에 진씨는 낯빛이 확 변했다.

“측비 자리를? 그분에게는 이미 측비가 있지 않느냐? 그런데 어떻게?”

“전하께서 그 둘이 어떻게 저와 비교가 되겠냐고 하셨어요!”

주묘서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자신했다.

“이런 일이…….”

진씨는 깜짝 놀라더니 이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주묘서가 태자의 정비에게 꿀리는 꼴을 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자 측비와 서씨 가문 며느리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게다가 측비는 태자비에게만 좀 꿀릴 뿐, 첩실이기는 해도 봉호를 받는 정2품이며 황실 족보에도 이름이 오른다. 나중에 태자가 황위를 계승하게 되면 황귀비皇貴妃가 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장만만과 장국후부 등의 적녀들조차 죽기 살기로 측비가 되려고 했다. 더군다나 지금 태자비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나중에 주묘서가 태자에게 아들을 낳아 준다면 그 아이는 군왕郡王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후에 태자가 황위를 계승하게 되면 그 아이는 친왕의 작위를 받게 된다.심지어 태자가 될지도 몰랐다.

‘그리되면……!’

진씨는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흥분됐다.

“하지만 서씨 가문 쪽이…….”

진씨는 그리 말하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주묘서는 미소를 지으며 진씨에게 팔짱을 끼고는 그 어깨에 기댔다.

“제가 이미 전하께 서씨 가문과 정혼했음을 알려 드렸어요. 전하께서 전부 전하께 맡기라고 하셨어요.”

“그래, 그래.”

진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기뻐했다.

“어쩌면 이게 다 운명인가 보구나!”

“맞아요!”

주묘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전에 그런 초라한 처지였을 때 제게 어떻게 태자부에 드나들 수 있는 기회가 생겼겠어요? 원래부터 제가 그곳에서 살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죠.”

“내 새끼가 복 있는 아이였구나! 앞으로도 큰 행운이 따를 게다!”

진씨는 생각을 해 보니 이건 어쩌면 전설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주묘서는 한걸음씩 위로 올라갈 것이다. 측비에서 태자비로 태자비에서 황후로 또 태후로 말이다.

사서를 쓰는 사람은 첫 장에 이렇게 적을 것이다.

「주씨 가문 묘서는 우연히 태자부를 방문해 꽃을 말린 그날 이후로 태자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고, 그렇게 운명처럼 그녀의 비범하고도 영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때로는 이렇듯 우연히 내디딘 한 걸음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한다.

진씨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런 상상을 하다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더니 힘없이 탑상에 기대었다.

요즘 그녀는 주묘서의 혼사 때문에 날마다 근심하며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게 됐으니 진씨는 그저 푹 자고 편히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하하!”

반면, 주묘서는 윤이 나는 짙은 푸른빛의 옥패를 손에 쥐고 설레는 마음에 소리 내어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한 바퀴 돌았다.

“오늘 아주 시끌벅적하던데 득승루에 가서 재미있게 놀아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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