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4화
한편, 엽연채와 주운환이 아래로 내려가 보니 양왕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양왕이 오늘 데려온 사람은 조앵기가 아니라 웬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얼굴이 동그스름하고 단정해 보였으며 아리따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양왕부의 집안일을 주관하고 양왕이 가장 신뢰하는 육 측비였다.
“연채야, 오랜만이구나!”
육 측비는 엽연채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을 움켜잡으며 듣기 좋은 말을 해 주었다.
“난 우리 연채가 복 있는 아이인 줄 알았다.”
어색해진 엽연채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평범한 안부 인사를 건넸다.
“측비 마마,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평소 사람을 만나는 일은 전부 육 측비가 해 왔고, 연회에 참석하는 일도 그녀가 맡아 왔다. 정선제가 육 측비에게 맹탕 같은 양왕비를 대신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측비는 비록 첩실이기는 하나 어쨌든 황실의 첩실이며 정2품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 황실 족보에도 올라와 있으니 애당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였다. 그래서 다른 집안의 이낭들이 외출을 하면 창피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과는 달리 왕부王府의 많은 측비들은 모두 연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간 엽연채는 몇 번이나 조앵기를 봤었는데, 그건 궁에서 중요한 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왕은 아주 가끔씩만 조앵기를 풀어 주고, 평소엔 외출을 못하게 하니 이 자리에 그녀가 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엽연채는 내심 크게 실망했다. 그녀는 똑똑하고 일 잘하는 육 측비보다 좀 맹해 보이는 조앵기를 더 좋아했다.
“진서후. 동승마장東昇馬場 쪽에 호마胡馬(중국 북방이나 동북방 등지에서 나던 말)들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시간 있으면 우리 함께 가서 구경하세나.”
양왕이 미소를 지으며 권하는 찰나, 누군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양왕이 아주 빨리도 도착했구먼!”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태자와 태자비가 여종의 안내를 받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태자 전하, 태자비 마마를 뵈옵니다.”
엽연채와 주운환이 얼른 예를 올렸다.
“진서후, 부인.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소!”
태자는 그리 말하며 양왕을 쳐다봤다.
“양왕, 방금 전에 호마라고 했는가? 호마가 좋을 게 뭐가 있나! 내가 교외 쪽에 한혈마汗血馬(아라비아에서 나는 명마)들을 기르고 있으니 시간이 되면 보러 오게! 진서후도 함께 오게나.”
“예, 그럼 분부대로 따르겠사옵니다.”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답례하고는 두 귀인 일행을 자리로 안내했다.
“두 분. 이쪽으로 오시지요.”
양왕이 피식 냉소를 흘리자 태자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양왕을 쓱 봤다.
양왕이 진서후를 포섭하려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양왕이 어떻게 노력하든 간에 방금 전 자신이 나타났을 때 주운환은 분명 자신에게 더 마음이 쏠렸을 터였다. 자신이야말로 이 나라의 태자이며 정통 아닌가.
그렇다고는 하나 주운환이 가진 힘을 확실히 손안에 쥐어야 했다.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제위에 오른 후에도 주운환이 저를 위해 능력을 발휘하게 하려면 지금부터 관계를 돈독히 해야 했다.
주운환은 태자와 양왕을 데리고 오른쪽에 있는 망루로 향했다.
엽연채는 태자비와 육 측비를 데리고 왼쪽 망루로 갔다. 남쪽에 세워진 기둥 옆으로 녹나무로 만든 커다란 팔선상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신양 공주와 노왕비 등 황실 사람들과 공훈이 있는 귀족 부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도 다들 옅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에휴, 이런 일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네요.”
신양 공주가 탄식했다.
“공주 마마,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태자비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셋째 숙모님의 집안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이때, 누군가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그쪽을 쳐다보니 신양 공주 옆에 앉아 있는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부인이 보였다. 봄꽃처럼 아리따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찬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엽연채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정선제의 장손녀이며, 평왕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평왕은 정선제의 차남인데 안타깝게도 20여 년 전에 딸 하나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녀를 갈란葛蘭 군주라고 불렀고 그녀는 도성을 수비하는 병영의 책임자인 오일의에게 시집을 갔다.
오일의와 상관수는 정선제가 가장 신임하는 무장이었다. 한 사람은 도성과 교외에 주둔하여 그곳을 지키고 다른 한 사람은 궁 안의 금위군을 장악하여 궁궐을 지켰다.
“우리 집안일이라니?”
태자비는 미소를 지으며 육 측비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우리 태자부에 뭐 이야기할 만한 것이 있나?”
“응성에서 살아 돌아온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가 자결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풍 측비는 풍씨 가문 여식이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태자부 일이라고 볼 수 있죠.”
갈란군주의 대꾸에 태자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네. 풍씨 가문에서 태자부로 부고 소식을 알려 왔고 풍 측비가 몹시 괴로워했지! 에휴. 풍 노장군이 참살된 후 풍 측비는 병으로 몸져누웠는데 이젠 갑작스레 혈육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됐으니… 상심이 크겠지. 태자 전하께서 요 며칠 동안 계속 풍 측비를 위로하고 계시네.”
태자비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실컷 비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풍 측비를 오랫동안 꺼려 왔다. 그런데 이제 풍씨 가문이 몰락했으니 풍 측비도 함께 무너진 것이다. 고로 이제 태자부의 여인들 중에서 자신의 신분과 지위가 가장 높았다. 그 누구도 자신과 서열을 놓고 다툴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이고. 정말 그런 일이 다 있었군요.”
노왕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상사兵家常事가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주 부인, 안 그런가?”
“예.”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왕비와 신양 공주 등도 고개를 끄덕이며 ‘주씨 가문도 과거 처절한 패배를 맛봤지만 그래도 구차하게 살아남아 지금 이렇게 처지가 확 뒤집히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참.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이야기했는가?”
“그게… 풍씨 가문의 말에 따르면 독을 마셨다고 합니다……. 에휴. 어쩜 그리 성미가 급한 것인지.”
신양 공주의 물음에 태자비가 답했다. 그 말인즉 풍씨 가문 사람들이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풍씨 가문도 과거 주씨 가문이 겪었던 일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주씨 가문을 치켜세우는 동시에 풍씨 가문을 짓밟으려고 했다.
풍씨 가문 사람들은 무능하고, 젊은 장수들이 죽자 노장이 나섰는데 그 노장도 전사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응성 백성들을 살해당하게 만들었다고 그들을 욕했다.
남은 두 젊은 장수도 무능한 사람들이라 패잔병들을 이끌고 도망이나 갔다고 욕을 해 대니 풍씨 가문 사람들은 감히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한 발짝이라도 나갔다가는 바로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소를 당할 테니 말이다.
풍씨 가문 두 젊은 장수는 아마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견뎌 낼 수 없었고, 또 전쟁에서 패해 응성 사람들이 도륙된 데 자책감을 떨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었다.
풍씨 가문은 그동안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무장 가문이었다. 풍씨 가문에 일이 생기면 정선제는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상황이 어떠한지 물어봐 주곤 했는데, 하루아침에 전쟁에서 패하고 풍씨 가문 사내들이 전부 목숨을 잃자 아무도 이 가문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었다.
과연 황제의 은총이란 가장 무정했다. 주씨 가문에게도 그랬고 풍씨 가문에게도 그러했다.
“연채야.”
이때, 한 무리의 소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엽연채 쪽으로 걸어왔다.
제민, 상관운, 원남옥 등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들과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부인들이었다.
“연채야, 오랜만이야.”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소저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인 포모였다. 그녀는 장만만과 마찬가지로 태자 측비 후보에 올랐기 때문에 몇 년 동안 혼사가 늦춰져 아직까지도 시집을 가지 못한 상태였다.
포모 뒤로 낯빛이 창백한 포기가 있었다. 포기는 전부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엽연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엽이채하고만 사이가 좋았다.
포기는 엽연채가 비천한 서자의 부인에서 단번에 후 부인으로 탈바꿈한 모습을 보게 되자 질투심과 미움으로 속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끌려온 이 자리에서는 어쨌든 그녀와 교류해야만 했다. 이렇게 많은 권세가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연채야, 오랜만이야!”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부인들이 밀어닥쳤는데 이들은 엽연채가 출가하기 전에 그녀와 사이가 아주 돈독했던 벗들이었다. 그런데 엽연채가 주운환에게 시집간 후로 그들은 더 이상 그녀와 왕래를 하지 않았다. 그리 처신했으면서 또 오늘은 이렇게 몰려와 그녀와 교분을 맺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엽연채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가자. 우리 맞은편에 가서 앉자.”
그러면서 제민을 끌고 상관운 등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손님들은 계속해서 득승루로 들어왔다. 그들은 여종이나 어멈들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고 하인들은 그들에게 다과를 가져다주었다.
진씨와 주묘서가 안으로 들어와 보니 저 멀리 2층에 있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고 규수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모습을 보자 낯빛이 홱 어두워졌다.
“어머, 주 부인이 아니십니까? 어서 이쪽으로 와 앉으세요.”
이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은 영안후 부인과 장국후 부인이었는데 진씨를 보자마자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을 했다.
진씨 모녀는 꽤 많은 귀부인들과 함께 1층 자리에 앉았다.
진씨는 주묘서를 잡아당기며 주변에 인사를 드리라고 했고, 영안후부 부인은 주묘서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듣자 하니 주씨 가문 대소저에게 곧 좋은 일이 있다고 하던데요.”
영안후 부인은 바로 원남옥의 어머니였다.
“맞아요!”
장국후 부인이 바로 맞장구를 쳤다.
“국자제주 집안의 공자라고 하던데 그 공자가 인물이 아주 빼어납니다!”
“참. 오늘 왜 서 부인은 오지 않은 걸까요?”
이 말을 꺼낸 사람은 바로 어사 왕성촌의 부인인 왕 부인이었다.
“제가 서 부인과 친분이 좀 있어서요.”
진씨와 주묘서는 그 말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고 왕 부인의 눈빛에 담긴 조롱기를 보자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주묘서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
“혼례식 날짜는 언제로 정해졌나요?”
왕 부인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말에 진씨는 표정이 확 굳어졌고 주묘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술을 물더니 냅다 돌아서서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