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화
“할아버지, 할머니. 숙부, 숙모.”
엽연채는 미소와 함께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엽학문과 묘씨 등이 고개를 들어 보니 오늘 엽연채는 특히나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연꽃이 수놓인 앞섶이 교차하는 형태의 다홍색 상의에 자잘한 꽃잎 문양이 들어간 하얀빛을 띤 노란색 백첩군百褶裙 차림이었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머리에 꽂은 진주 장식의 순금 술이 살랑살랑 흔들려 더욱 생기가 넘쳐 보였다.
“연채야.”
나씨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그녀를 추어올렸다.
“이젠 우리 모두 널 후 부인이라고 불러야겠구나. 하하하.”
이 말에 엽연채는 깔깔 웃으며 그들을 안으로 데려갔다.
“어서 안으로 드세요.”
그녀는 나씨와 묘씨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내주었다.
엽학문은 엽연채가 자신을 부축해 주지 않자 콧방귀를 뀌더니 두 손으로 뒷짐을 지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묘씨는 엽학문의 이런 모습을 보며 입꼬리만 삐죽거렸다. 이 늙은이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엽학문은 엽연채가 주운환에게 시집간 후로 엽연채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이후 집안에서 잇달아 소란이 일어나자 더욱더 엽연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녀를 미워하며 별일 없으면 집에 오지 말라는 말도 대놓고 여러 번 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은정랑 일로 엽연채 모녀를 못살게 굴기까지 했다.
그런데 주운환이 떡하니 장원 급제를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엽학문은 어안이 벙벙했고 엽연채가 조금 아깝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당시에는 허서가 있었기 때문에 아쉬워하면서도 그녀를 계속 미워했었다.
그런데 결국 허서가 가짜 손자로 밝혀진 뒤에는 엽학문은 후회막급이었고 장원이 된 손녀사위가 무척이나 소중해졌다.
그 후 진지항이 제 사위가 되자 엽학문은 주운환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향 조정했다. 어쨌든 사위가 손녀사위보다 더 가까운 존재 아닌가. 게다가 자신과 진지항은 엽연채 부부와의 사이처럼 말하기 애매한 해묵은 감정이 가득 쌓여 있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얼마 후, 주운환이 출정하게 되자 엽학문은 또다시 엽연채와 분명하게 선을 긋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하지만 엽연채가 진지항과 엽영교를 맺어 줬으니, 차마 전처럼 싫은 티를 내지는 못했다.
주운환이 죽기는커녕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이름을 날리고 대제의 영웅이 되어 후야에 봉해질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엽학문 자신도 한때 후야이기는 했지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나이 든 후야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패기만만한 주운환 같은 후야를 어디 비교나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엽학문은 엽연채와 주운환이 아까워 죽을 것만 같았다.
주운환이 도성으로 돌아온 후로 엽학문은 두 사람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묘씨가 한사코 말렸고, 엽학문도 생각해 보니 손윗사람인 자신이 먼저 손아랫사람을 보러 가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엽연채와 주운환이 할아버지인 저를 뵈러 오는 게 이치에 맞았다.
그런데 며칠을 기다려도 주씨 가문 쪽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엽학문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가 나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을 공경하지 않는 엽연채와 주운환에게 분개하며, 두 사람이 자신을 보러 오겠다고 빌어도 그들을 만나 주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굳게 맹세했다.
하지만 오늘 주씨 가문에서 연회가 열리자 결국 참지 못하고 이곳에 달려오고야 말았다. 그것도 아침 댓바람부터 고함을 지르며 좀 있으면 사람들이 많아져 길을 지나가기가 힘들어지니 일찍 출발하자고 집안사람들을 들들 볶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는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엽학문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으니 결국 스스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리, 마님. 안으로 드시지요.”
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안으로 들인 다음 소청의 원탁으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런데 엽학문은 원탁에 앉지 않고 뒷짐을 진 채 허정거리며 서차간으로 걸어가더니 그쪽 태사의에 앉았다.
엽연채와 묘씨 등은 그가 소청을 벗어나 응접실로 가는 모습을 보더니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응접실은 보통 오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오래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잠시 후면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올 테니 가문의 주인인 엽연채는 손님들을 접대하기에 바쁠 것이다.
하지만 엽학문이 먼저 자리를 잡아 버린 후였다. 엽승신과 엽승강은 제 부인을 데리고 서차간으로 들어갔고 묘씨도 할 수 없이 그쪽으로 따라갔다.
나씨는 걸어가면서 미소 띤 얼굴로 주운환을 찾았다.
“그런데 연채 네 부군은 보이지 않는구나?”
“부군은 일을 보러 아침 일찍 나갔어요. 제가 사람을 보내… 어, 돌아왔네요.”
엽연채가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오려고 하는데 때마침 주운환이 안으로 들어왔다.
묘씨와 나씨는 주운환을 보자마자 ‘아이고’ 하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나씨는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가 말을 붙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주운환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모두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그는 전부터 엽씨 가문 사람들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엽연채의 가족이었다. 그러니 관계가 어떻든 간에, 그들이 주씨 가문에 온 이상 엽연채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해 얼굴을 비쳐야 했다.
손씨와 엽승신은 주운환을 쳐다보며 맹렬한 질투심에 휩싸였다. 주운환은 원래 그들의 사위가 됐어야 했는데 지금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이득을 보게 됐으니,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두 사람은 오늘 주씨 가문에 오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오지 않으면 엽연채 부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말이다.
“나리, 마님. 밖에 손님들이 오셨어요!”
이때, 추길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알렸다.
“신양 공주 마마와 노왕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아이고, 공주 마마와 전하께서 오셨구나! 어서 밖으로 나가 보거라!”
묘씨가 다급히 말했다.
공주와 친왕은 엽씨 가문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아무리 만나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던 귀인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주씨 가문에 왔다고 하니 묘씨는 부러우면서도 신기한 마음이었다. 그녀는 혹시나 그들에게 밉보일까 싶어 얼른 엽연채와 주운환에게 마중을 나가라고 재촉했다.
“예.”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할머니, 가족들과 득승루 쪽으로 가 보세요.”
“그래.”
묘씨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으나 엽학문은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는 서차간에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계속 앉아 있으면 남들에게 특별하고 존귀한 사람처럼 보이기라도 하나?’
보다 못한 묘씨가 헛기침을 하며 그를 불렀다.
“나리,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엽학문은 얼굴 근육을 파르르 떨며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 주운환은 자신을 보더니 가볍게 읍만 하고는 곧장 고개를 돌려 묘씨 등하고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는 주운환이 자신을 공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밖으로 나가 손님들과 함께 섞여 있으면 그들과 같은 존재로 보이지 않겠는가? 자신은 분명 후야의 처조부인데 말이다.
엽연채는 엽학문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피곤하신 것 같으니 그럼 여기서 푹 쉬고 계세요. 저는 손님들을 접대하러 나가 볼게요!”
“그래, 그래. 어서 나가 보렴.”
묘씨와 나씨는 연거푸 엽연채를 재우쳤고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운환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주인인 엽연채와 주운환이 떠났는데 혼자 여기 앉아 있어서는 소용이 없었다. 엽학문은 뺨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리, 손님들이 모두 득승루 쪽에 있으니 저희도 어서 그쪽으로 가죠!”
묘씨는 다시 한번 권하면서 은근슬쩍 눈을 흘겼다. 이 상황이 난처하지도 않단 말인가?
“맞습니다. 아버지, 저희도 그쪽으로 가죠!”
엽승강이 엽학문 쪽으로 걸어가 그를 잡아당겼다.
엽학문은 부끄럽기 이를 데 없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화를 내면 자신이 나이를 내세워 거만하고 뻣뻣하게 구는 것처럼 보일 테고, 화를 내지 않으면 손아랫사람이 업신여기는 걸 그냥 내버려 두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엽승강이 계속 그를 잡아당기자 엽학문은 마지못해 일어서는 척을 하며 버럭 성질을 냈다.
“내가 걷지도 못하는 줄 아느냐?”
묘씨와 엽학문은 함께 문을 나선 뒤 득승루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은 이미 떠들썩한 분위기였고 꽤 많은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득승루는 조그만 사합원四合院으로, 사면에 2층짜리 망루가 세워져 있고 중간엔 연극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장군출정將軍出征>이라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묘씨 등은 득승루 안으로 들어간 뒤 여종의 안내를 받아 왼쪽 2층에 있는 팔선상으로 걸어갔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더니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할머니, 여기서 연극을 보고 계세요. 제가 잠시 후에 사람을 시켜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보낼게요.”
“참. 너희 어머니는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신 거니?”
나씨가 갑자기 온씨를 찾았다.
“에휴…….”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듯이 대꾸했다.
“원래는 부군이 도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능성에서 돌아오시려 했어요. 그런데 그때 하필 고뿔에 걸려 열이 많이 나셨대요. 돌아오는 길에 상태가 더 나빠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채 마마와 염교에게 어머니 고생시키지 말고 몸조리를 잘 돕다가 다 회복되면 그때 돌아오라고 했어요.”
“잘했다. 요즘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고 있고 바람도 세게 부니 건강 관리를 잘해야 돼.”
나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마님, 진씨 가문에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추길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진씨 가문 네 식구가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진무, 진 부인, 진지항과 엽영교였고 그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사람은 바로 주운환이었다.
“연채야.”
엽영교는 헤헤 웃으며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자 진지항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았다.
“조심해요! 이쪽으로 앉아, 이쪽으로.”
그는 그리 말하며 엽영교를 당겨 묘씨 옆에 앉혔고 묘씨는 엽영교를 보더니 뛸 듯이 기뻐하며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마님. 장씨 가문에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이때, 어린 여종 한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알렸다.
“교 마마가 이미 그분들을 모시고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래.”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입구 쪽에서 교 마마가 장씨 가문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